한국 복싱이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좀처럼 깊은 침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최근 막을 내린 2014 인천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복싱은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금3·은2·동5개) 이후 12년 만에 금맥을 다시 찾으며 금2, 은3, 동1개로 마쳐 카자흐스탄(금6·은2·동2개)에 이어 종목 종합 2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싱에 대한 국민적인 관심이 특별히 높아진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지난 2012 런던올림픽에서 금메달 후보라는 관심에도 불구하고 조기 탈락의 비운을 맛봤던 신종훈이 이번 인천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냈다는 사연이 그나마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이다.

▲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복싱 라이트 플라이급(-49kg) 결승전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신종훈' ⓒ연합뉴스
프로복싱의 현실은 여전히 암담하다.

여전히 세계 주요 프로복싱기구의 남자 세계챔피언은 나올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여자 세계챔피언이 있어도 그나마 스폰서를 구하지 못해 언제 챔피언벨트를 박탈당할지 모른다. 스폰서가 지급하기로 한 대전료를 지급하지 않아 말썽이 빚어지는 사례도 발생한다.

한국 타이틀이나 한-일 교류전 등 케이블TV 채널을 통해 방영되는 프로복싱 경기는 지방 어느 군민회관이나 대학체육관을 전전하고 있고, 그나마 관중석에는 대회 관계자나 선수 가족을 제외하고는 유료 관중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프로복싱 중흥의 콘트롤타워가 되어야 할 한국권투위원회(KBC)는 오랜 내분을 겪었고, KBC 체제에 불만을 품은 권투인들이 새로운 단체를 만들어 프로복싱 중흥을 위한 활동을 펼쳐 보지만 역부족인 상황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 프로복싱계도 한국의 현실과 비슷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국내에 소개되는 기회가 현저히 줄어들었지만 세계적으로 프로복싱은 여전한 인기스포츠다. 선수들의 파이트머니는 천문학적인 수준이고, 미국의 최고 스포츠전문 채널에서 매주 세계적인 선수들이 펼치는 환상적인 경기를 방영하고 이들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고공행진을 거듭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복싱이 인기 격투 종목으로서 각광을 받고 있는 반면 한국에서는 존폐의 위기를 이어오고 있는 현재의 상황은 결국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스포츠에도 적용되는 것임을 해주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국에도 복싱이 다시 인기 스포츠로 단기간에 발돋움할 수 있다는 가능성 내지 희망을 보여줬던 사례가 최근 한 차례 있었다. 바로 손정오의 사례다.

손정오는 작년 11월 19일 제주그랜드호텔 특설링에서 열린 프로복싱 세계권투협회(WBA) 밴텀급 타이틀 매치에서 챔피언 가메다에게 1-2로 판정패했다.

가메다(31승 1패)는 3체급 석권에 빛나는 일본의 복싱 영웅으로 장남인 그뿐만 아니라 동생 다이키가 국제복싱연맹(IBF) 슈퍼플라이급, 도모키가 세계복싱기구(WBO) 밴텀급 챔피언으로 3형제가 세계 챔피언으로 기네스북에도 올라 있을 만큼 일본에서는 알아주는 복싱 가문이다.

하지만 이번 타이틀전은 최근 가메다가 펼친 일본에서의 방어전에 대한 불공정 판정시비와 '안방 챔피언'이라는 일각의 비판을 잠재우기 위해 동급 14위 손정오를 선택해 치러진 원정 방어전으로 가메다 집안이 운영하는 가메다프로모션이 주관해 판정으로 갔을 경우 승산이 희박했던 경기였다.

▲ 19일 오후 제주 그랜드호텔에서 열린 WBA 밴텀급 세계타이틀전에서 한국 손정오가 일본 가메다 고키의 얼굴을 공격하고 있다. 손정오는 한국 선수로는 7년 만에 프로복싱 세계챔피언 타이틀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패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그와 같은 태생적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당시 손정오는 한 박자 빠른 잽과 콤비네이션 펀치를 앞세워 시종 가메다에 우세한 경기를 펼쳤고, 10라운드에서는 다운을 빼앗기도 했지만 결국 KO로 경기를 끝내지 못하고 판정으로 간 끝에 판정패하고 말았다.

그날의 경기는 손정오에게 ‘한국판 작은 록키’라는 별명을 안기며 국내 복싱 팬들의 가슴에 한 차례 큰 화산폭발을 일으켰다.

만약 손정오가 이후 꾸준히 누군가의 후원으로 선수생활을 이어가며 다시 가메다에게 도전할 기회를 얻거나 다른 복싱기구의 타이틀에 도전하는 등 챔피언을 향한 행보를 이어갔다면 분명 한국 복싱의 중흥에 하나의 구심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충분했다.

결국 손정오라는 한 명의 살아있는 영웅, 살아있는 우상이 백약이 무효인 상태의 한국 복싱을 회생시킬 수 있는 명약이 될 수 있었다는 점을 확인한 데서 한국 복싱 중흥의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한국의 복서들이 롤모델로서 삼을 만한 한국인 선수 내지 한국계 선수를 내세워 그의 경기를 자주 보여주고, 그의 길을 국내 복서들이 따라갈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복싱 인기 부활의 열쇠가 될 수 있다.

한국 프로복싱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는 1980년대 세계를 주름잡던 한국의 챔피언들이 우상으로 삼았던 복서는 다른 국가의 챔피언이 아닌 한국의 챔피언들이었다.

홍수환의 4전5기 신화를 지켜보며 챔피언의 꿈을 키웠고, 그 외에 염동균, 유제두, 김태식 등 기라성 같은 챔피언들이 한국 프로복싱의 전성기를 이끈 챔피언들의 가슴 속 ‘꿈의 뿌리’가 됐다.

이들이 없었다면 유명우, 장정구, 박종팔 등과 같은 세계 프로복싱계가 기억하는 위대한 한국인 챔피언은 나올 수 없었고, 세계타이틀전이 벌어지면 거리에 행인과 자동차들이 사라질 정도의 복싱열기도 있을 수 없었다.

국내에서 복싱의 인기를 고스란히 빼앗아간 종합격투기의 사례를 살펴보면 국내에 격투기가 소개된 초창기 K-1의 어네스트 후스트, 피터 아츠, 제롬 르 밴너와 같은 영웅적 선수들이 한국에서 입식 타격의 영웅을 꿈꾸는 선수들을 나오게 만든 계기가 됐고, 프라이드를 통해서는 에밀리아넨코 표도르, 노게이라 등 불세출의 스타 선수들이 국내에도 종합 격투기 스타의 꿈을 키우는 선수들에게 희망의 존재가 됐다.

그리고 이들 스타들에게 감동을 받은 격투기 팬들에게 ‘우리도 저런 한국인 파이터를 스타로 갖고 싶다’는 열망을 가슴에 품은 채 국내 격투기 경기가 펼쳐지는 체육관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 김동현 ⓒ연합뉴스
지금 UFC 무대에서 활약하는 김동현, 정찬성 등과 같은 한국인 UFC 스타들은 이런 과정을 자양분으로 성장하고 만들어진 스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에 비추어 보면 지금 세계를 무대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고 있는 한국인 내지 한국계 복싱 스타를 살아있는 우상으로 내세울 수 있다면 한국 복싱은 언제든 중흥에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런 점에서 카자흐스탄 출신의 한국계 세계챔피언 게나디 골로프킨은 한국의 복싱계와 스포츠 미디어가 주목할 만한 선수다.

현재 WBA 미들급 세계 챔피언인 골로프킨은 어머니가 한국 포항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골로프킨은 카자흐스탄 국가대표 복싱 선수로서 2004 아테네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냈고, 프로 전향 이후에는 31전 전승에 28KO라는 엄청난 전적으로 현재 세계 복싱계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복서다.

골로프킨은 현재 어머니의 나라 한국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골로프킨과 같은 선수를 적극적으로 국내 복싱 팬들에게 알리고 그의 경기모습과 활동을 자주 전하다 보면 골로프킨을 롤모델로 삼아 세계에 도전하는 복서들이 충분히 나올 수 있고, 복싱의 인기도 높여갈 수 있지 않을까?

UFC의 한국계 챔피언 벤 헨더슨이 스스로 한국계 선수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국내 격투기팬들과의 잦은 스킨십을 통해 그 자신의 인기에도 도움을 받고 UFC의 한국 내 인기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점을 떠올려 본다면 골로프킨 역시 한국 프로복싱의 중흥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져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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