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일본의 주요 인사가 잇따라 방한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과 제21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에서 정상회담을 갖게 됐다는 소식이 나왔다. 갑자기 동아시아 정세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고 있는 상황이다.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뭔가 지지부진한, 서로 얽히고 설킨 관계가 해소될 수 있을지 논란이 뜨겁다.

국내 언론은 한일관계가 개선의 필요성이 있다는 점에는 공감하고 있다. 22일 대다수 일간지들은 전날 김관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과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국장의 면담에 대해 한일관계 개선을 위해서는 일본의 태도 변화가 급선무라는 점을 지적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 등 주요 당국자들이 역사 인식 문제에 대한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으면 한일관계가 풀리기는 아무래도 어렵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 22일자 사설.

하지만 여기서 한 발 나아간 주문도 나온다. <동아일보>는 이 날 <한일 정상, 11월 APEC 회동 외면할 만큼 한가하나>라는 제목의 사설을 실었다. <동아일보>는 이 사설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의 탕자쉬안 전 중국 외교담당 국무위원을 예방했으면서도 아치 쇼타로 국장은 대통령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뜨거운 한중관계, 차가운 한일관계’가 지속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일관계의 개선을 모색하는 것을 넘어서서 중국과의 관계까지 놓고 동아시아 상황을 논한 것이다.

이는 한미일 동맹의 강화를 지지하는 보수적 인사들이 갖는 우려감을 일부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 회담하는 것은 벌써 취임 이후 다섯번째다. 미국과 중국의 껄끄러운 관계를 감안하면 중국과 이렇게 친하게 지내는 게 미국과의 관계에 악영향을 끼치는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올법도 하다. 실제 과거 보수언론들은 이러한 점에서 일본과의 관계개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선 바 있다.

▲ 윤병세 외교부 장관이 21일 오후 서울 도렴동 정부서울청사 별관 외교부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교 책사로 평가받는 야치 쇼타로(谷內正太郞) 일본 국가안전보장 국장과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러한 보수세력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보수정권이 시진핑 주석과의 돈독한 관계를 이어가는 이유가 뭘까? 언론들은 이번 한중정상회담에서 주요하게 다뤄질 주제로 남북관계와 한중FTA를 꼽고 있다. 여기서 집중해볼 주제는 아무래도 남북관계다. 한중FTA야 양국간의 협의를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만 남북관계의 문제는 현안대응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관계는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연상케하는 혼란을 겪고 있다. 황병서, 최룡해, 김양건 등 핵심 3인방이 아시안게임 폐회식에 참석하는가 하면 대통령의 실명을 거론한 비난이 제기되고, 남북군사회담이 진행되는가하면 군사분계선과 NLL에서 군사적 충돌이 야기되는 등 혼란의 도가니다.

북한이 남측에 대해 나름대로는 유연한 강온전략을 쓸 수 있는 것은 최근 북한의 외교적 활로가 다변화된 측면이 크다. 지난달 강석주 조선노동당 비서가 유럽을 순방한 데 이어 리수용 외무상이 직접 미국에서 열린 UN총회에 참석하는 등 최근 북한의 외교적 노력은 상당히 넓은 보폭으로 진행되고 있다. 북한은 21일 지난 5월부터 억류돼있던 미국인 3인 중 1인을 석방해 인권 문제로 압박을 제기해오던 미국과 협상할 수 있는 가교를 만들었다. 오바마 대통령의 경우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입장에서 자국 국민의 안전이 달려있는 문제를 소홀히 처리할 수 없다. 북한 입장에서 미국과 어떤 문제로든 협의를 진행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가해지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고립을 풀기 위한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4월 서울 용산 미군기지 내 콜리어필드에서 주한미군병사를 대상으로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북한은 동아시아의 또다른 변수인 일본과도 납북자 문제를 고리로 서로의 간극을 좁혀나가고 있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이르면 27일 이하라 준이치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이 조만간 북한을 방문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야치 쇼타로 국장이 방한을 한 상황에서도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은 것과 비교해보면 일본이 어느 쪽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를 잘 파악할 수 있다. 22일 스가 요시히데 일본 관방장관이 위안부 강제연행을 인정한 고노담화에 대해 또다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것은 한국, 중국 등과의 관계개선에 당분간은 전력을 쏟지 않겠다는 방침을 재확인해주는 부분이다.

재미있는 것은 북한이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이다. 북한의 관영언론인 조선중앙통신은 21일 재동-강동-남포 노선 철도의 개건 착공식이 열렸다는 점을 보도하면서 “조-러 인민들의 공동의 발전과 이익에 부합되는 대규모 협조계획 실현의 첫 단계인 철도 개건이 두 나라 사이의 경제협조를 발전시키는 중요한 사업으로 된다”는 착공식 연설 내용을 강조했다. 이 철도 개건 사업에 러시아 정부는 250억 달러 가량을 투입할 것으로 알려진다.

전문가들은 러시아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우크라이나 문제로 유럽으로 향하는 자원수출 등의 길이 좁아진 상황에서 일종의 ‘동진행보’를 하는 것 아니겠느냐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러시아가 사할린과 홋카이도를 잇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 건설을 일본 정부에 제안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일본으로서는 후쿠시마 참사 이후 전력 생산에 차질을 빚고 있는 상황에서 외면할 수 없는 성격의 논의일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입장을 고려해볼때 일본과 러시아의 경제협력이 어느 정도 수준까지 진척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최소한 북한을 둘러싼 정세가 경제적 문제를 중심으로도 새롭게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에는 충분한 소식이다.

▲ 제22회 소치 동계올림픽 폐막식 리셉션에서 정홍원 국무총리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만나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결국 다시 정리하면 북한은 미국, 러시아, 일본 등과 모두 이런 저런 차원의 외교적 실마리를 붙잡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문제를 좀 더 확장하면 북한은 미국에 대한 태도와 무기수출을 고리로 한 이란과의 관계 역시 외교적 카드로 활용할 수 있는 입장이다. 최근 이란의 몸값은 미국이 이슬람국가(IS)에 대한 중동국가들의 공동대응을 모색하면서 몸값이 상당히 올라있는 상태다. 즉, 북한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각국의 이해관계를 동시다발적으로 고려할 수 밖에 없는 이 게임에 하나의 플레이어로서 개입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각국을 대상으로 벌이고 있는 셈이다.

물론 우리 정부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가입과 중국, 일본, 러시아 등과의 관계개선을 비롯한 다양한 시도를 해온 바 있다. 하지만 TPP의 경우 미국의 중간선거 결과에 따라 그 운명이 달라질 수 있고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와 산케이 신문 서울지국장 기소 문제 때문에 당분간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어려우며 고고도미사일요격체계(THAAD) 배치 문제 등의 논란 때문에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냥 긍정적인 전망을 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남측과의 대화에 불성실하게 응하거나 군사적 긴장을 높이는 방향으로 행보를 거듭하게 되면 우리 정부로서는 북한을 제어할 수단을 찾기 어려워진다. 하지만 여전히 북한과의 관계를 고리로 해서 주변국들과의 다양한 외교적 개선을 고려하는 것은 우리 정부의 주요한 외교적 정책 방향이다. 즉, 지금 남북관계에서 급한 쪽은 오히려 우리일 수 있다.

▲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내외가 지난 7월 오후 서울 성북동 가구박물관에서 특별오찬을 마친 뒤 선물을 교환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그간 일절 언급한 일이 없는 5·24조치에 대한 입장 변화를 암시하는 등의 행보를 이어가는 것에는 이런 곡절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일관계 개선이 아니라 중국에 매달리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모두가 북한과 제각기 사이가 좋을 때에 유일하게 북한에 우리 정부의 입장을 조금이나마 강제할 수 있는 주체는 중국 뿐이기 때문이다. 이게 아마도 ‘뜨거운 한중관계, 차가운 한일관계’가 지속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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