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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을 ‘개인’문제 취급하는 언론 있어 ‘세월호’는 계속된다조선일보, 성수대교 참사 20년 특집 기사에서 ‘안전’ 고립시켜
한윤형 기자 | 승인 2014.10.22 13:30
   
▲ 2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반년이 지난 때, 성수대교 붕괴 사고 20년이 되던 그날 한 사회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신문의 특집 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세월호의 비극 6개월 만에 터진 이번 사고는 지금보다 더 철저하게 각성하고 조심하지 않는 한 우리 모두는 결코 세월호에서 내릴 수 없는 운명임을 말해준다(...)”(2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다시 안전이다] [1] 성수대교 20年… 아직 발밑이 不安하다>

그러나 “더 철저하게 각성하고 조심”하는 방식이 다소 괴이하다. 21일자 특집 기사에 등장한 다른 전문가와 달리 기사 말미에 등장하는 한 전문가는 “시민 각자의 각성”을 강조한다. 1면에서 이어진 3면 기사에서, 연세대 사회환경시스템공학부 조원철 명예교수는 "시민 개개인이 매 순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체질화해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조선일보'와 조원철, '검은 봉다리' 들라는데...
 
의표를 찔린 느낌이다. 여객선 승객들이 선원들의 통제를 너무 잘 따라서 참사 규모가 커진 세월호와, 진행자의 안전통제에 응하지 않아 부조리가 사고로 터진 판교 사이에서, 우리는 어떻게 “매 순간 자신의 행동이 위험한지 습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체질화”할 수 있을까?
 
   
▲ 21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조원철 명예교수에 관해 찾아보았다. 지난 8월 말 연세대학교에서 퇴임한, 30년 간 방재연구를 한 국내 최고의 방재전문가라고 한다. <연합뉴스>의 보도에 따르면, “조 교수는 외출할 때면 항상 가방 안에 '검은색 비닐봉지'를 하나씩 챙겨다닌다. 지하철이나 건물 등 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났을 때 응급 산소마스크로 사용하기 위해서다”라고 한다.  
 
또, “실제로 그의 차 안에는 안전모와 방독 마스크와 함께 수난 사고가 나면 구조 도구로 쓸 페트병을 매단 10m짜리 밧줄 5개가 비치돼 있다”고 한다. 조원철 명예교수는 "가정에선 항상 부엌 근처에 액체 소화기를 비치하는 게 좋다"며 "전부 간단하고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위급한 상황에서는 엄청난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개개인이 이러한 대비를 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성수대교 참사 20년, 세월호 참사 6개월 후에 나온 이 특집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성수대교를 달리던 자동차들은 대체 뭘 조심할 수 있었던 걸까? 그들은 한국 사회의 어느 곳이든 무너질 수 있다고 믿고 자동차를 포기해야 했던 걸까? 그렇다면 지하철은? 세월호의 승객들은 모든 체제를 불신하고 무조건 튀쳐나가야 했던 걸까? 그런 것을 권유한다면, 그것은 ‘나라’의 대책이 될 수 있는가?
 
그래도 호의적으로 해석하려 했다. 개인 차원의 대비를 말하면 무조건 구조의 문제만 들이대는 것이 진보주의자들의 역편향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22일 두 번째 특집기사에서 <조선일보>와 조원철 명예교수는 선을 넘었다. 22일 특집의 한꼭지인 <조선일보> 3면 하단 기사 <참사 20년 주기說… "사고후 시간 지날수록 안전 의식 느슨">에 등장한 조원철 명예교수는 "20년 정도 지나면 사람들의 안전 의식이 무뎌지는데 더구나 복지 논쟁, 정치 투쟁 등으로 국력을 낭비했고 안전은 뒷전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선일보>는 이 어마어마한 발언을 뻔뻔스럽게도 “복지 논쟁 등에 안전은 뒷전 / 올해 대형 참사로 나타난 것”이란 부제로 그대로 담았다. 
 
   
▲ 22일자 조선일보 3면 하단 기사
 
지난 몇 년간 진보파가 제시했던 ‘복지’ 정책이 안전문제에 밀착하지 못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또 보수파가 최근 ‘안보’를 넘어 ‘안전’을 화두로 던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보수파가 주도한 정책은 규제 혁파와 민영화 추구로 안전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들이 말한 ‘안전’은 불심검문 강화, 휴대폰 웹메신저 검열, 불량식품 척결 따위의 한심한 세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처 이름을 ‘안전행정부’로 바꾼 이 정부의 ‘안전’에 대한 감각이 어떠했는지는 세월호 참사 이후 대응이 만천하에 보여준 바 있다. ‘안전’은 ‘안중’에도 없고 대통령 ‘의전’에만 ‘집중’하는 그 모습을. 
 
대운하 찬성했던 30년 '방재 전문가'
 
‘복지 논쟁’이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의 증거였다고 말한다면, 같은 식으로는 성수대교 붕괴 20년 후에도 새누리당이 존속하는 것이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의 증거라고 우길 수도 있다. <조선일보>가 아직 폐간되지 않고 살아남은 것도 시민들의 안전불감증의 증거라고 우길 수도 있다. 제 정파의 집권만이 문제해결의 방법이라는 식의, 문제해결엔 굼뜨고 사익추구에 있어선 대단히 기민한 극단적인 발언을 ‘안전사회’에 관한 특집기사에 버젓이 실어놓은 것이다.   
 
인물에 대한 호기심이 생겨 조원철 명예교수에 대해 좀더 추적해보았다. 그의 전공은 방재공학과이지만, 2007년 대선 당시 한반도 대운하 건설을 위한 이명박 후보의 ‘운하정책 환경자문연구단’에 포함됐던 인물이라 한다. 조 교수는 4대강 사업은 김대중 정부 때부터 구상한 일이라며 “DJ가 하면 로맨스고 MB가 하면 불륜이냐”라고 반문하기도 했고 각종 방송에 출연하여 4대강 수업이 수해에 대비하는 방재시스템이며 물이 보 속에 갇혀 썩는 일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그가 남긴 유명한 명언으론 “물 보고 기분 나쁜 적 있어요? 없잖아요”가 있다.  
 
   
▲ 2008년 4월 대운하 찬반논란을 다룬 <그것이 알고 싶다>에 등장한 조원철 명예 교수. 방송 화면 캡쳐 사진
 
이쯤 되면 재해를 방지한 것이 아니라 재해를 만들어낸 이다. ‘방재 전문가’가 아니라 ‘창재’, ‘성재’, ‘작재’ 전문가라 해야 옳다. ‘방재 전문가’가 ‘방재’ 대신 ‘창재’, ‘성재’, ‘작재’하여 ‘축재’나 하신 게 아닌지 안부를 묻고 싶을 정도다. 하지만 조원철 명예교수 역시 2011년 우면산 산사태 물난리 이후 사는 동네가 주기적으로 홍수의 피해를 입고 있다니, 가방에 ‘검은 비닐봉지’를 넣고 다닐만큼 각성된 그도 한국 사회의 재난재해를 피해갈 수는 없는게 이 땅의 현실이겠다.   
 
다시 <조선일보>의 특집기사로 돌아가면, 22일자 특집기사엔 수많은 사례가 등장한다. 폭죽 발사대 근처까지 잠입했다 소방관에게 붙들린 행인, 한강 둔치서 술판을 벌이다 발을 헛디뎌 소방관에게 구조된 노인, 성수대교 사고, 환풍구 붕괴, 삼풍백화점 붕괴, 씨랜드 화제, 대구 지하철 방화 참사, 세월호 참사, 경주 마우나리조트 체육관 붕괴, 고양 종합터미널 화제 사고 등의 상황이 병렬적으로 나열된다. 
 
기사 초반에 나온 두 사례는 분명히 시민의 안전의식과 관련이 있지만 뒤로 가면 그렇게만은 볼 수 없는 구조의 문제가 많은데도 처음에 제시된 사례의 논조로 그야말로 ‘끝까지 간다’. 기사는 이렇게 마무리된다.
 
   
▲ 22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대형사고 때마다 안전 점검을 소홀히 한 혐의로 처벌받는 사람들이 나온다. 그들은 한결같이 "관행이었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 뿌리는 '설마 사고(事故)가 나겠어?'라는 사고(思考)다. 침몰한 세월호 이준석 선장은 "세월호의 복원성이 좋지 않다는 사실은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관행이었다"고 재판에서 진술했다. 붕괴 사고 당시 마우나리조트는 보도자료를 통해 "사고 당일보다 눈이 많이 온 (사고) 전주 주말에도 아무 일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남는 인력도 없어 지붕 제설을 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 문제로 오면 분명히 시민 개개인의 안전의식 문제는 아닌데도 <조선일보>는 이를 개인의 윤리성의 문제로 가져간다. 물론 체계를 만드는 것도 결국 개인이고 문화를 구성하는 것도 개인이다. 그러나 개인에게 그러한 선택을 강요한 체계와 문화와 가치관은 ‘시민의 안전의식’을 소리높여 외친다고 해도 바꿀 수가 없다.
 
다양한 사례를 하나의 키워드에 복속시키는 '조선일보'의 체질
 
<조선일보>는 과거에도 집중력 있는 기획기사를 그릇된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왜곡된 방식으로 풀어놓곤 했다. 대표적인 것으로 그들이 2012년에 띄웠던 “주폭 척결”을 들 수 있다. 당시 <미디어스>는 ‘주폭’ 특집을 상세하게 분석한 이후 다음과 같이 비평했다.
 
   
▲ 22일자 조선일보 3면 중단 기사
(...) 조선일보가 지난 석달 간 파헤친 ‘주폭’ 시리즈 기사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가감없이 드러낸다. 자영업자 서민들에게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이들의 상당수는 노숙자나 일용직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노숙하는 곳 가까이에 얼마든지 있는 24시간 편의점에 가서 단돈 천원이면 소주 한 병을 구입할 수 있다. 몽골인이나 베트남인 신부를 맞이한 한국인 남편들 중 상당수는 술에 취해 들어와 폭행을 행사한다. 중국인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이주노동자들도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린다. 가정 내에서 폭행이 행사되어도 대부분의 경우 신고되지 않고 신고 받고 경찰이 달려가더라도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OECD 국가에서 최고의 노동시간을 자랑하는  노동자들은 퇴근하면서 술을 걸치는 게 일상사이고 (이는 조선일보 기자들이라고 다르지 않을 것이다) 법원은 술에 취한 이들의 범죄에 관대하여 ‘주취감경’을 일삼는다. 그러나 이렇게 일별한 문제들이 과연 ‘술’의 문제들인가? (...) (링크)
 
그러나 이번의 경우는 ‘주폭’에 비해서도 저질이다. ‘악질’도 아니고 ‘저질’이다. 이미 개개인들은 어떻게 할 수 없어 좌절하는 문제를 개개인의 책임으로 되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시사in> 369호에 실린 정신분석가 이승욱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도 느끼는 것이 없을까?
 
세월호 참사 이후 고향 친구들과 모임을 갖는데, “우리가 공범이다”라는 얘기들을 해서 놀란 일이 있다. 대구에 사는 평범한 50대 가장들이었는데, “우리라고 선장이랑 달랐겠냐” “우리라고 배에 과적하는 것 막고 불법 증축하는 걸 막을 수 있었겠냐”라고 너나없이 한탄하는 거다. 이걸 보면서 세월호가 엄마들한테는 ‘굉장한 슬픔’으로 다가왔지만 아빠들한테는 ‘굉장한 죄책감’으로 다가왔구나, 싶기도 했다. 그렇게 부정과 비리에 눈감은 게 자기 한 몸 때문이었나? 아니다. 다 자식들을 위해 참은 거라 생각하며 살았을 텐데 그 자식이 죽어버렸으니, 가장 핵심적인 알리바이가 처참하게 사라져버렸으니….
<시사in>369호, <바로 그 '남들처럼'이 문제라니까> 중에서
 
좌절한 시민들에게 의무를 부과하는 '조선일보'
 
걸그룹 ‘레이디스코드’가 교통사고에 휘말려 안타까운 사상자를 냈을 때 <미디어스>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 대한민국은 새벽 빗길을 질주한 그 승합차처럼 빠른 템포로 질주하는 사회다. 그런 나라에서 수학여행의 짧은 여유를 즐기려던 아이들이 ‘흘러가는 시간’, 혹은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이름의 배 속에서 죽어갔다. 그 후 제 삶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이 제발 함께 멈추고 돌아봐달라고 애원하지만, 자신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며 눈물을 흘리던 대통령은 입을 씻고 전폭적인 규제완화를 명령한다. 속도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지우라는 것이다. (...) (링크)
 
   
▲ 지난 9월 4일자 한겨레 9면 기사
 
<조선일보>가 지난 8월 21일 1면 기사 제목을 <'세월호'에 멈춰선 한국정치>로 가져갈 때 <미디어스>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 <'세월호'에 멈춰선 한국정치>란 제목의 2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를 보고 영화 <설국열차>가 떠올랐다. 영화에서 설국열차의 엔진은 신성하고 영원하다고 선전된다. 그것은 계속 달려야 하며 멈출 수가 없다. 그래야 외부의 맹렬한 추위로부터 내부 구성원들을 보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권력의 입장에선 세월호 참사도 천안함처럼 북한 어뢰에 피격되서 발생한 것이라고 우길 수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일부 단체들이 싱크홀을 북한이 판 땅굴이라고 상상하듯이 말이다. 북한 위협이나, 무한경쟁의 국제정세에서 우리는 뒤를 안 보고 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 왜 이런 정도 사건이 났는데, 잠깐이라도 멈추면 안 되는가? 왜 엔진을 세우면 안 될까? 영화에서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결론이 나긴 했지만, 지금 대한민국을 둘러싼 위협이 인류를 멸종시킬 수 있는 강추위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영화에서 그 ‘신성하고 영원한 엔진’은 멸종된 부품을 보완하기 위해 아이들의 노동을 보충하면서 지탱되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가 사는 세상의 풍경도 그러하다. 아이들의 모습이 바닥으로 가려져야 하듯, 그들에겐 세월호 참사도 온 국민에게 중계되지 말았어야 했다. 
 
(...) 이런저런 위로를 하지만 결국 하고 싶은 말은 '우리 살던 대로 계속 살자'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그렇기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참사를 맞이했단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엔진은, 멈출 수 있다. 대통령이 유족을 피해 숨바꼭질이나 다니고 집권여당이 말장난이나 하는 세상에서, 못 그럴 것도 없다. (링크)
 
   
▲ 지난 8월 21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속도' 줄이지 않는 세상... '안전'은 없다
 
결국 <조선일보>는 ‘안전’보다 ‘속도’가 중요한 세상을 성찰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리의 ‘속도’를 유지하면서도 시민 각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며 안전을 챙겨야 한다고 말할 뿐이다. 저 ‘한국적 속도전’이 만들어낸, ‘아버지 박정희’가 만들어낸 ‘사람’보다 ‘건설’이 더 중요한 사회가, 민주화 이후 어느 순간 ‘사람’보다 ‘이윤’이 더 중요한 사회로 변질되었고 그 속도는 점점 더 가속화될 뿐이란 사실을 말하지 않으려 한다. ‘딸 박근혜’는 이러한 속도전의 상황에서 홀로 청와대에서 유유자적하며 ‘속도’를 높이는 ‘개혁’이나 ‘정상화’ 따위의 정책문서에 사인이나 하고 있을 뿐이란 사실을 외면한다.
 
세월호 참사 때문에 20년 만에 다시 주목받은 성수대교 참사의 위령비는 강변북로가 가로질러 달리는 성수대교 북단에 ‘섬’처럼 자리하고 있어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고 한다. 2005년에는 위령비와 주차장 사이에 도로가 새로 생겼고, 여기엔 횡단보도가 없어, 위령비를 방문한 시민이나 유족은 불가피하게 2차선 도로를 무단횡단해야 한다. 22일자 <한국일보> 기사에 나온 한 유족은 “위령비 근처 차도에 노란색 과속 방지턱이 있었는데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된다며 몇 해 전 치웠다”고 말했다. ‘속도’를 줄이지 못한 한국 사회는 성수대교의 기억을 ‘섬’으로 고립시켰고 기억에서 배제한 것들은 새로운 참사를 통해 되살아났다. 
 
   
▲ 22일자 한국일보 11면 기사
 
‘속도’를 줄이지 못한 시민이, 어찌 안전을 챙길 수 있을까. ‘가속’에 저항하지 못하는 시민이, 어떻게 체제나 자본의 도구를 벗어나 부정에 저항할 수 있을까. 그렇게 성수대교 참사 후 20년이 지난 이 디스토피아에서 일등신문의 진단은 공허하다. 마치 군부대 내에서 구타가혹행위 사망자가 발생한 이후 시행된 정신교육에서 군인 개개인의 정신무장을 강조하는 것 마냥 말이다.  대형 참사 20년 특집 기사에서도 '안전'을 '개인문제'로 고립시키는 <조선일보>의 모습야 말로 왜 "우리 모두는 결코 세월호에서 내릴 수 없는 운명임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한윤형 기자  a_hri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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