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에 스키 부대가 있을 턱이 없다. 연중 내내 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덥고 습한 나라가 베트남 아니던가. 하지만 필자의 대학생 시절 다섯 학번 위 선배는 월남 스키부대 이야기를 선배 누나들의 배꼽을 또르르 굴러 떨어뜨릴 만큼 천연덕스럽게 해대곤 했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필자의 대학생 시절을 되돌아보게, 아니 다섯 학번 위 선배를 생각나게 하는 연극이 대학로에 찾아왔다. 연극 <월남스키부대>다.

이한위가 연기하는 김노인은 ‘뻥생뻥사’, 뻥에 살고 뻥에 죽을 만큼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사는 남자다. 베트남에는 스쿨버스가 아니라 15미터짜리 ‘스쿨 구렁이’가 있다고 한다. 이 구렁이를 타고 어린이 15명이 등교한다고 김노인은 이야기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김노인은 월남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서 새참도 해결하고 군장도 정리했다고 한다. “페브리즈 똥” 같은 대사를 나열할 때에는 관객의 배꼽이 공연장 바닥을 굴러다닌다. 이한위는 <월남스키부대>에서 웃음의 4/5 이상을 책임지는데, 정작 배우 본인은 하나도 웃지 않으면서 관객의 배꼽을 공략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 연극 ‘월남스키부대’ ⓒSHOW & NEW
하지만 <월남스키부대>는 작정하고 웃기려고만 하는 여느 공연과는 다르다. 어딘가 모르게 삶의 비애가 묻어있다. 김노인의 뻥은 월남으로 파병되지 않았으면 생기지 않았을 전쟁 트라우마에서 비롯한다. 월남 파병 트라우마를 잊기 위한, 혹은 죄책감으로 말미암은 심리학적 ‘방어 기제’가 거짓말로 표현되는 셈이다. 지뢰를 찾는답시고 여기저기 똥을 싸고 다니는 바람에 아들 내외에게 김노인은 민폐덩어리가 된다.

동네에서 손가락질 당하는 시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자는 며느리의 제안은 부모 모시기를 꺼려하는 요즘의 세태를 보여준다. 부모 세대는 자식을 위해 보든 걸 희생하며 키웠지만 정작 부모에게 돌아오는 건 효도나 공경이 아니다. 요양원에 부모를 보냈으면 보냈지 모시기를 꺼려하는 암울한 요즘 세태, 극 중 며느리의 제안을 통해 현 세태를 은유적으로 비판하는 게다.

▲ 연극 ‘월남스키부대’ ⓒSHOW & NEW
하지만 시아버지를 바라보는 불편한 시선은 의외로 도둑이라는 낯선 ‘타자’에 의해 깨진다. 도둑이라는 타자는 우리가 일상에서 접하는 보통의 다른 타자와는 구분되는, 만나기 꺼려지고 어떻게든 회피하고 싶어지는 두려운 존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월남스키부대> 속 도둑은 <서툰 사람들>에 등장하는 도둑처럼 경계의 타자, 두려움의 타자가 아니다.

아들 내외에게 짐이 되는 시아버지 김노인의 다른 면을 일깨워주는, 레비나스가 명명한 에피파니(l'épiphanie)로서의 타자성을 수행한다. 김노인이 왜 고엽제 후유증에 시달려야 하는가, 왜 몇 십 년 동안이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에 대한 마음의 부채가 도둑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타자에 의해 밝혀지고 규명된다.

▲ 연극 ‘월남스키부대’ ⓒSHOW & NEW
도둑은 김노인과 아들 내외의 영향력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새로운 타자다. 김노인과 아들 내외의 바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새로운 타자인 도둑을 통해 아들과 며느리, 시아버지 김노인이라는 삼자의 관계는 이전의 관계와는 달리 새롭게 규정되고 직조된다. 타자를 통해 김노인과 아들 내외가 전에는 알 수 없던 새로운 가능성의 문이 생기는 것이다. 타자의 긍정적인 기능 수행이다. 만일 <월남스키부대> 가운데서 도둑이라는 타자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김노인과 그를 둘러싼 가족과의 관계는 새롭게 정립되지 못하고 불화로 얼룩지고 말았을 것이다.

시아버지를 요양원에 보내고자 하는 며느리의 바람은 철저하게 무력화되고 김노인의 다른 얼굴을 아들 내외가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은 일찍이 레비나스가 명명한 타자성, 도둑이라는 타자성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관객의 배꼽이 공연장 바닥을 굴러다니게 만드는 코믹 연극 <월남스키부대>에서 프랑스의 유대계 철학자 레비나스의 타자성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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