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면 매번 열리지만 아무 일도 해결되지 않는 판도라의 상자가 또 한 번 열렸다. 이 상자의 역할은 원래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도 되지 않게 하는 것이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발언으로 촉발된 개헌 논의가 그것이다. 이런 걸 어떤 유식한 체 하는 자들은 ‘맥거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만이 개헌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여당 의원도 바라고 야당 의원도 바라며 상당수 국민들도 바란다. 1987년 만들어진 헌법이 한국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발휘하는 문제에 있어 한계에 봉착해 있다는 느낌은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다만 시민의 입장에선 개헌론의 기저에 깔려 있는 제도결정론의 폐해와 개헌론으로부터 파생될 무한한 논의의 공전이 신경이 쓰일 뿐이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국감대책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연합뉴스)
개헌에 큰 생각이 없는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막연하게 대통령 임기를 ‘4년중임제’로 바꾸는 정도를 원할 공산이 크다. 원래 대통령이란 자리가 그렇다. 국회의원들이 말로 오랫동안 싸움을 하는 것이 보기 싫은 것이다. 그리하여 참여정부 말기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 임기만 ‘4년 중임제’로 바꾸는 ‘원포인트 개헌’을 제안하신 바 있다. 현 대통령께선 그때 “참 나쁜 대통령이다. 선거만 생각하느냐”라고 말씀하셨기에 이 시점에 반성을 해야 마땅하지만 본인도 지지자들도 이미 그 사건을 기억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김무성 대표가 “이원집정부제가 바람직하지 않을까”라고 운을 뗀 것은 이러한 정황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는 노림수였을 가능성이 있다. 생각해보자. 대통령과 그 핵심지지자들은 망각했을 사건이라도, 야권이 잊은 것은 아니다. 박 대통령이 공약으로 말했던 개헌을 내세우면서 ‘원포인트 개헌’ 비슷한 걸 내민다면 야당은 당연히 큰소리로 “참 나쁜 대통령!!!”이라고 되받아칠 공산이 크다. 개헌은 야당의 협조가 없으면 안 된다. 그렇기에 좀 더 폼을 잡을 수 있는 제안을 하는 것이 여당대표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하고 과시하는 전략이었을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확장해왔다. 이명박 정부 시절 ‘친이 실세’인 이재오가 ‘분권형 개헌’을 띄우는데 이에 협조를 하지 않았다. 차기 대통령의 권력을 줄이는 건 당연히 자신에게 손해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미래권력임을 과시했다. 김무성 대표 역시 대통령이 개헌을 나중에 말하자니까 지금 말하는 것처럼 해서 그 비슷한 일이라도 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크다. 박근혜는 다음 대선후보가 될 것이 거의 확실했고 대선에 나가면 이길 확률이 높았지만 김무성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종류의 주판알을 튕겨본 것일 게다.
▲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가 17일 국회에서 열린 국감대책회의에서 김무성 대표의 '개헌 논의 불가피론'을 철회하고 사과한 것과 관련해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기를) 언론인에게도 당에서 부탁드린다"고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문제는 개헌에 반대하는 것보다 개헌에 찬성하는 것이 훨씬 더 복잡한 행위라는 것이다. 특히 김무성 대표가 ‘이원집정부제’란 여섯 글자를 말하는 순간 뭔가 다른 차원의 거대한 공간을 소환한 셈이 되었다. 이원집정부제란 것은 굉장히 단순무식하게 요약하면 ‘짜장면’과 ‘짬뽕’을 선택하지 못한 이들이 내놓은 ‘짬짜면’이다. 이원집정부제는 여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 대통령제 비슷하게 운영되고 야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엔 내각책임제 비슷하게 운영된다. 그래서 내각책임제 요소를 도입하고 싶지만 대통령제의 전통이 강력한 나라에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프랑스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김무성 대표는 오스트리아식을 말했는데, 프랑스식에 비해서도 내각책임제 요소가 더 가미되어 있어서 연정이 가능하다고 한다. 중도파를 대변할 수 있는, 연정이 가능한, ‘통큰 정치’를 펼치자는 의사일 것으로 판단된다. 취지를 본다면 당연히 나쁠 것은 없다.
문제는 이원집정부제를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그냥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제도 개혁 및 선거구제 개편까지 얘기해야 겨우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선거구제 개편 얘기가 나오면 당연히 행정구역 개편 얘기가 따라 나온다. 현재 국회 개헌모임은 이미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의사를 천명했고, 이에 덧붙여 국회 헌법개정 자문위는 양원제를 제시했다.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오지 않는가? 국회의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들의 두뇌용량은 우리의 것과 같다.
▲ 1일 오전 국회에서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 주관으로 열린 최태욱 교수 초청 개헌 강연에서 의원들이 최교수의 발언을 듣고 있다. (연합뉴스)
이뿐만이 아니다. 논의의 장이 펼쳐지면 이상하게 꼭 충청도 출신 정치인이 펼쳐내는 연방제론도 나올 것이다. 과거에 이회창이 그랬고 지금의 안희정이 그러듯이 말이다. 또 진보정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일부 세력은 당연히 독일식 정당명부제와 결선투표제도 들고 나올 것이다. 분권을 하겠다면 마땅히 지방자치제의 강화를 위한 조치들도 필요하다.
물론 취지는 다 좋다. 하지만 아수라장이 펼쳐질 것이란 예측도 어렵지 않다. 원래 그랬다. 적어도 1987년 이후부터는 말이다. 1994년과 2004년의 선거법 개정이 혼돈의 도가니탕에 빠져 잡탕 부대찌개를 끓여대다 개혁이 아니라 ‘개악’으로 귀결되지 않았느냐는 학계의 지적에 귀기울일 필요가 있다.
군소진보정당들은 그들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선거제도 개혁에 관심이 많다. 현재 대통령 임기나 대통령 권한에 쏠린 개헌논의의 지형도에서 다당제를 보장할 수 있는 선거제도 개혁에 관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은 물론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것이 실제로 처리될 것이라고 믿기는 어렵다. 군소진보정당들은 선거제도 개혁의 수혜를 입을 수 없을 거라고 전제하고 행동하는 것이 차라리 이롭다. 2004년의 ‘오세훈 선거법’이 애먼 지구당을 폐지하여 성장해나가던 민주노동당에 타격을 줬듯 손해나 안 보면 다행이라 생각해야 한다.
▲ 16일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열린 IT민주화 염원 전단지 살포 퍼포먼스에서 정의당 천호선 대표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정의당은 "정부가 국민의 안전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전단지 살포는 묵인하고 사이버상에서의 자유로운 표현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법 집행을 하고 있다"며 사이버 공간에서의 표현의 자유와 개인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 보장을 촉구했다. (연합뉴스)
그렇다면 논의의 장이 펼쳐졌고 단지 발언권만 있는 상황에서 야권과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진보진영은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좋을까. 특정 제도에 대한 찬반논의에 성급하게 끼어들지 말고, 개헌의 올바른 방향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며, 이 가치가 실현되는 개헌일 때에만 찬성한다는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이롭다.
그 방향은 분권화, 다양한 유권자의 대의, 헌법에 제시된 공화주의적인 가치에 대한 훼손 반대 정도로 제시할 수도 있고, 논의에 따라 다른 사안을 덧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의 큰 틀에서의 방향을 잡아놔야 막상 개헌논의가 실제로 진행이 되고 각 정치세력이 협상에 들어갔을 때 ‘살을 내주고 뼈를 잃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분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구체적인 대책의 제시보단, 개헌이 진행되든 진행되지 않든 고수해야 하는 가치판단의 합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훨씬 더 시급하게 요구된다. 그러면서 설령 개헌논의가 진행되더라도 거기에 한발만 담그고 나머지 한발은 조직역량을 확충하는 데 진력하는 자세가 지금의 야권과 진보세력에게 필요하다고 하겠다. 남들이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무언가를 하면, 당연히 그것은 행동한 자에게 이득으로 돌아올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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