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한국 뮤지컬계에 황실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일등공신이 둘 있었다. 하나는 <엘리자벳>이요 다른 하나는 <황태자 루돌프>로, <황태자 루돌프>는 <엘리자벳>의 스핀오프 격인 뮤지컬이다. <엘리자벳>은 루돌프 황태자의 어머니 엘리자벳의 일대기를 그린 작품으로, 2막에서 엘리자벳이 아버지와 치열한 대립각을 펼치다가 어머니보다 먼저 유명을 달리한다는 설정이 등장한다.
<황태자 루돌프>는 <엘리자벳>의 2막에서 잠깐 선보인 아들 루돌프의 사연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엘리자벳>의 스핀오프 뮤지컬이다. 어머니에 이어 아들 역시 합스부르크 황실에서 어떻게 비극적인 삶을 이어가는가 하는 대를 잇는 비극의 스토리로서 말이다. 궁정에서 살지만 황실이 감옥이 되는 딜레마를 <엘리자벳>과 <황태자 루돌프> 두 뮤지컬은 보여주고 있다.
황태자가 다른 여인에게 눈 돌리게 만드는 일등 공신은 다름 아닌 그의 아내다. 하지만 인생은 아이러니라고, 숨 막히는 아내를 만나기 전에 만났으면 좋았을 인생 최고의 인연을 결혼하고 나서야 만나니 아무리 불륜이라 해도 관객에게 용서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정죄당하고 손가락질 받는 불륜이 아니라 충분히 납득 가능하고 관객에게 동정표를 받을 수 있는 합리화된 불륜으로서 말이다.
<황태자 루돌프>는 첨예한 보-혁 갈등 가운데서 진보가 보수에게 힘을 잃는 합스부르크 황실의 역사를 재현한다. 변화를 싫어하는 보수적인 아버지에게 아무리 개혁의 중요성을 역설해 보아봤자 아버지와 아들 사이만 틀어진다. 꿈쩍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완고함을 바라볼 때 관객은 황태자 루돌프의 죽음이 단순히 마리와의 불륜이 다가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좌절에서 연유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점을 납득할 수 있다.
그럼에도 <황태자 루돌프>는 유럽 역사에 정통하지 않은 한 불편한 점이 있다. 이는 루돌프 황태자가 헝가리의 수장이 되는 것이 왜 개혁의 아이콘이 되는 것인가에 대한, 왜 아버지 요제프 황제에게 엄청난 반기를 드는 것인가에 대해 우리와 같은 외국인이 납득 가능한 디테일한 설명이 상당히 부족하다. 일본에서야 사의 찬미, 타나토스에 대한 경외심으로 이 뮤지컬이 성공했다고는 하지만 오스트리아 문화권이 아닌 관객이 충분한 역사적 맥락을 이해하고 보기에는 역사적인 설명이 불친절한 뮤지컬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