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다. 연극이나 뮤지컬이라면 넘버나 대사로 전달해야 할 몫을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장르가 발레 혹은 무용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무용의 의사전달 방식은 해석의 여지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넘버나 대사는 중의성을 내포하지 않는 한 관객이 해석할 여지가 줄어듦에 비해, 몸짓 언어는 관객이 무용수의 몸짓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폭넓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필자가 분석하는 <블랙 다이아몬드> 역시 절대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의미다. 필자의 옆에 앉은 관객은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무용수의 다른 몸짓을 보고 얼마든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필자는 <블랙 다이아몬드>를 ‘인간 소외’를 피력하는 무용으로 바라보았다. 2막에서 한 남자 무용수는 야광 끈에 포획당해 옴짝달싹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구속당한다.
<블랙 다이아몬드>에 인간 소외만 있는 건 아니다. 신화도 엿볼 수 있었다. 인터미션이 끝난 다음 2막 초반부에 들어서면 흰 타이즈를 입은 남녀 무용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하지만 두 무용수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듯 찰싹 붙어서 행동한다. 그러다가 둘은 서서히 분리되고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 중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는 뮤지컬 <헤드윅>의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신화 아니던가. 본래 남자와 여자는 각기 독립된 존재가 아닌 한 몸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등을 맞대고 붙어있는 ‘달의 아이들’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영원히 살지 못한다. 제우스가 번개로 하나였던 몸뚱아리를 둘로 갈라놓은 탓이다.
그럼에도 둘은 강제로 분리되고 원래의 하나 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실낙원이다. 한 몸이었던 남녀가 다시 합쳐지지 못하고 분리된 개별자로 남고 마는 실낙원 말이다. 덴마크 댄스시어터의 <블랙 다이아몬드>는 인간 소외와 잃어버린 낙원 가운데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되돌아보게 만든 무용이라 할 수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