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은 이해하기 어려운 장르라는 인식이 강한 게 사실이다. 연극이나 뮤지컬이라면 넘버나 대사로 전달해야 할 몫을 몸으로 표현해야 하는 장르가 발레 혹은 무용이기에 그렇다. 하지만 무용의 의사전달 방식은 해석의 여지도 그만큼 넓어질 수 있다는 점을 내포한다. 넘버나 대사는 중의성을 내포하지 않는 한 관객이 해석할 여지가 줄어듦에 비해, 몸짓 언어는 관객이 무용수의 몸짓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폭넓게 해석될 여지가 있다.

필자가 분석하는 <블랙 다이아몬드> 역시 절대적인 해석이 아니라는 의미다. 필자의 옆에 앉은 관객은 필자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무용수의 다른 몸짓을 보고 얼마든지 다른 해석을 내릴 수 있다. 필자는 <블랙 다이아몬드>를 ‘인간 소외’를 피력하는 무용으로 바라보았다. 2막에서 한 남자 무용수는 야광 끈에 포획당해 옴짝달싹 움직이지 못하고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하고 구속당한다.

▲ 덴마크 댄스 시어터의 ‘블랙 다이아몬드’ ⓒ서울세계무용축제
다른 남자 무용수의 뒤에는 전후진을 반복하는 무용수들이 포진해 있다. 하지만 남자 무용수는 똑같이 움직이는 무용수들에게 포함되지 않은 개별적인 존재다. 남자 무용수는 독창성, 개별성, 독립성을 추구하고자 애쓰지만 전후진을 반복하는 집단에 굴복되어 균형 감각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다. 야광 끈에 꽁꽁 묶이고 바닥에 쓰러지는 남자는 기계화라는 현대 메커니즘 혹은 획일화된 사회 체계에서 인간성을 상실하는 개인을 보여준다. 개별성은 존재하지 못하고 획일화된 집단에게 포획당하는 인간 소외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블랙 다이아몬드>에 인간 소외만 있는 건 아니다. 신화도 엿볼 수 있었다. 인터미션이 끝난 다음 2막 초반부에 들어서면 흰 타이즈를 입은 남녀 무용수가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하지만 두 무용수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다. 마치 두 사람이 한 몸이 된 듯 찰싹 붙어서 행동한다. 그러다가 둘은 서서히 분리되고 독립적인 개체가 된다.

이는 플라톤의 <향연> 중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를 떠올리기에 충분해 보인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신화는 뮤지컬 <헤드윅>의 팬이라면 누구나 아는 신화 아니던가. 본래 남자와 여자는 각기 독립된 존재가 아닌 한 몸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등을 맞대고 붙어있는 ‘달의 아이들’이다. 하지만 남자와 여자는 한 몸으로 영원히 살지 못한다. 제우스가 번개로 하나였던 몸뚱아리를 둘로 갈라놓은 탓이다.

▲ 덴마크 댄스 시어터의 ‘블랙 다이아몬드’ ⓒ서울세계무용축제
<블랙 다이아몬드> 역시 남녀 무용수는 처음에는 한 몸으로 붙어 있다가 서서히 독립된 두 인격체로 분리된다. 하지만 남녀 무용수는 분리된 개체로 이별하지 않는다. 한 몸이었다가 강제로 분리된 아리스토파네스의 ‘달의 아이들’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것처럼 <블랙 다이아몬드>에서 둘로 갈라진 남녀 무용수는 잃어버린 반쪽과 헤어지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친다.

그럼에도 둘은 강제로 분리되고 원래의 하나 된 상태로 되돌아가지 못한다. 실낙원이다. 한 몸이었던 남녀가 다시 합쳐지지 못하고 분리된 개별자로 남고 마는 실낙원 말이다. 덴마크 댄스시어터의 <블랙 다이아몬드>는 인간 소외와 잃어버린 낙원 가운데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되돌아보게 만든 무용이라 할 수 있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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