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왔다! 장보리’가 총52부작으로 종영됐다. 이 아쉬움과 먹먹함을 어찌하리오. 드라마 불모지나 다름없었던 2014년의 황폐화된 안방극장에서 ‘왔다! 장보리’는 한 그루의 상쾌한 소나무였다. 초반 스퍼트가 중요한 통속극에서 뜻밖에 미흡한 반응의 초창기였지만, 선구안 대단한 일부 시청자의 입소문이 알음알음 퍼져 지금의 결과를 이룩했다.

무엇보다 놀랐던 것은 역시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속설이 안방극장 등지에서도 진리로 통한다는 사실이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으로 누구도 깨뜨릴 수 없었던 임성한 월드의 아성을 위협한 김순옥 작가의 차진 필력은 숨 막히는 스피드, 개성 넘치는 캐릭터로 시청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 한동안 ‘아내의 유혹’은 막장 드라마는커녕 명드로 불려야 한다는 찬사를 받으며 막장에도 급이 있다는 증거로 제출되기도 했다.

하지만 첫판에 운을 다 몰아 썼던 것일까. 이후 김순옥 작가의 성적은 그리 신통치 않았다. 천사의 유혹, 웃어요, 엄마, 다섯 손가락 등 줄기차게 집필을 이어왔지만 ‘아내의 유혹’만큼의 흡입력을 인정받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2014년, 방송사를 바꾸고 무려 5년 만에 찾은 명성이 바로 ‘왔다! 장보리’의 위엄이다.

드라마 ‘왔다! 장보리’는 동화 ‘왕자와 거지’의 세계관에 ‘콩쥐 팥쥐’의 인물이 뛰어 노는 이야기다. 기본적으로 선악 구도의 전형을 따르고 있지만 일 잘하는 악당보다는 선량한 무능력자가 더 질타 받는 21세기에, 오연서가 연기한 주인공 ‘장보리’는 환영 받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분명 연민정은 역할을 맡은 배우 이유리가 길거리에서 행인에게 욕을 들어 먹을 만큼 악인의 극치였지만, 그럼에도 대중에게 꽤 사랑 받은 시청률 상승 요인의 일등공신이자 이 드라마의 최고 인기 캐릭터였다.

연민정이 가지고 싶어 모성애마저 내려놓고 아등바등했던 모든 것을, 쉽사리 다 누릴 수 있음에도 별반 주장하지 않는 장보리의 우둔함은 현 시대의 시청자에게 오만과 무능으로 읽혔다. 재력가인 부모와 부유한 환경, 금 숟가락 물고 나온 배경을 도둑맞은 처지에서도 악당과 ‘페어플레이’를 하겠다는 장보리의 고집은 급기야 시청자를 뒤로 넘어가게 했다. 드라마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이에 입을 연 김순옥 작가의 ‘장보리를 위한 변명’은 배우 오연서 뿐만 아니라 부조리에 지친 시청자 또한 드라마 이상의 위로가 되었다.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순옥 작가는 작품이 잘 돼서 좋다는 기쁨 이상으로 ‘우리 배우들이 이 작품 후 여기저기서 찾는 데가 많다고 해서 기분 좋다’는 따뜻한 소감을 남겼다. 배우를 각별히 아끼는 김순옥 작가의 마음 씀씀이가 드러나는 부분이었다. 이런 그녀였기에 주인공 장보리 논란은 주연 배우를 향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동반했다.

'왔다! 장보리'는 복수드라마가 아니다. 주인공이 그렇게 당하고도 복수를 안 해서, 너무 착해서 뒷부분에 가서는 이런저런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주인공 손에 피를 안 묻히겠다는 내 생각은 처음부터 분명했다. 그런 면에서 오연서는 타이틀 롤에 부족함 하나 없이 너무 잘해줬다. 기대 이상으로 몇 배 더 잘해줬다. (김순옥 작가의 인터뷰 중에서)

악을 응징하지 않고 줄곧 참고 있는 장보리의 ‘페어플레이’ 정신을 질겁했던 반응에 대해 김순옥 작가는 단호히 “왔다! 장보리는 복수 드라마가 아니다.”라고 밝힌다. 그녀는 처음부터 주인공 손에 피를 안 묻히겠다는 결심을 했었고 그것이 바로 미련하리만큼 선량한 장보리 탄생의 핵이었던 것이다.

▲ MBC 주말드라마 '왔다! 장보리' 김순옥 작가 ⓒ연합뉴스
그녀는 시청자가 줄곧 보리를 향해 “저리 착해 빠져서 어째.”라고 혀를 차는 것 또한 감정이입의 결과물이었다며, 서러운 말을 들어야만 했던 주인공 오연서를 향한 미안함과 대견함 또한 동시에 전했다. 화제의 연민정 역을 연기한 이유리의 열연에 대해서도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특히 지난 5일 비빔밥을 먹는 장면은 너무나 잘 연기해줘서 작가 또한 몇 번씩이나 돌려봤을 정도였다고. 모든 장면을 철저히 연구해준 이유리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그녀의 배우 인생이 진심으로 잘 되기를 빌어줬다.

김순옥 작가의 출연 배우에 대한 애착은 상상 이상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커리어를 깎아내리면서까지 배우의 안위를 걱정하기까지 했으니까. 그녀는 항간의 ‘막장 드라마’라는 수식어에서 드라마에 막장 요소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런 호칭이 혹시 출연 배우의 필모그래피에 누가 될 것을 우려했다.

“내가 이 드라마를 썼다는 것 때문에 으레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 것도 있지 않나 싶은데, 딴 게 아니고 날 믿고 출연한 배우들에게 미안해서 그런다. 그들이 막장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되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이름 때문에 이 드라마가 막장 드라마로 통칭되는 것은 아닌가. 날 믿고 출연해준 배우들을 ‘막장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가 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김순옥 작가의 통 큰 배려에 새삼 놀랄 수밖에 없었다. 장보리 논란에 입을 연 김순옥 작가의 첨언은 오연서를 위한 변명을 넘어 고단한 대중에게 바치는 위로로 읽혔다.

"보리라는 인물이 어떻게 성공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게 옳은 것인지를 보여주려고 했다. 굳이 보리가 연민정을 응징하지 않아도 벌 받을 사람은 받게 돼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다. 물론 보리처럼 극선(極善)으로 살기는 어렵다. 보리가 '비단이가 사실은 연민정의 아이'라는 사실만 자기 입으로 말해버리면 모든 게 그냥 끝나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보리가 비단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그러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드라마가 이어진 것이다."

굳이 보리가 연민정을 응징하지 않아도 벌 받을 사람은 받게 되어 있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싶어 주인공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김순옥 작가의 메시지. 어쩜 우리는 장보리에게 우리 자신을 투영해서 바라봤는지도 모르겠다. 세상의 부조리에 항거하지 못하는 우리 스스로의 미련을 자학한 것이 일명 장보리 논란이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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