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좋은 남자를 구별하는 법을 묻는 여자 후배들에게 종종 이런 말을 해왔다. “남자는 다 늑대야. 순한 늑대와 나쁜 늑대가 있을 뿐이지. 양을 찾으려 해서는 안돼. 오히려 양이라 믿은 그게 ‘양의 탈을 쓴 늑대’일 확률이 높아.” 그 여자 후배들이 오랜 싱글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선배의 충고를 어떻게 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한국 남성사회를 통찰한 바에 따라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으니 잘 참고했을 것이라 믿는다.

남자를 부정적 의미로 늑대에 비유하는 것은 아마도 과거 다른 산짐승들에 비해 빈번히 목격되었고, 무리 사냥에서 비롯된 공포심으로 인해 부정적 인식이 쌓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전래동화에서는 호랑이가 떡을 준 어머니를 잡아먹는 비열한 짐승으로 등장하지만 때로는 영물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서양의 늑대들은 부정적 묘사에만 이용되는 경향이 강한데, 난폭한데다가 간교하기까지 하다. 빨간 모자의 할머니를 잡아먹고는 빨간 모자까지 삼켰던 늑대는 그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런 이미지를 차용한 때문인지 요즘 텔레비전에 등장하는 늑대들 역시 간교하고, 위협적이다.

▲ 지난 8월 여성가족부는‘성범죄자 알림e’앱을 개발해 보급했다. 앱에 접속하면 성범죄자의 신상 정보와 거주지 등을 검색할 수 있다.

여성가족부는 지난해 11월부터 이솝우화의 빨간 모자 이야기를 각색하여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를 홍보하고 있다. 이 홍보 영상에서 주인공인 빨간 모자는 성범죄자 알림e를 통해서 거주지 주변의 성범죄자가 누구인지 얼굴을 확인하고, 길거리에서 마주치자 주변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위기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도망간 성범죄자 늑대는 어린이가 많은 곳에는 취업할 수 없게 된다. 이 홍보 동영상은 여성가족부 직원대상 아이디어 공모전에서 최우수작으로 꼽힌 내용으로 여성가족부의 공익 서비스와 관련 정책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 홍보 영상은 여러모로 문제를 안고 있다. 이것은 광고 표현의 문제점과 제도의 문제점 두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 우선 표현에 있어서 문제점을 살펴보자. 광고에서 성범죄 전과자였던 늑대 남성은 어떤 물리적인 행동이나 신체적 접촉도 하지 않는다. 단지 “어디가는 중이니? 내가 데려다줄까?” 라는 말을 건낼 뿐이다. 물론 영상에서는 늑대의 모습을 그림자로 보여줌으로써 그 의도가 음험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지만, 빨간 모자 여아는 단순히 ‘말 건냄’이라는 행위로부터 위험을 감지할 뿐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성범죄 전과자들을 잠재적 범죄자 이상의 상존하는 위협으로 전제하는 것이다.

한편 정책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문제는 더 심각하다. 이 홍보 광고에 따르면 한 번 죄를 지은 사람은 평생 그 죄로 인해 낙인찍히고, 기본적 차원의 대인 커뮤니케이션으로서 대화 자체도 거부당할 수 있으며, 그것이 정부에 의해서 주도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성범죄 전과자가 당할 수 있는 피해들은 완전히 간과되고 있으며, 어떤 측면에서는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여성가족부의 홍보 영상이 성범죄의 예방 효과로 이어질 수는 있겠지만, 그에 앞서 이미 처벌을 받은 전과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의 측면이 강하다. 전과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폭력적 시선을 감내하는 것은 과연 당연한가?

▲ 이솝우화의 빨간 모자 이야기를 각색하여 만든 성범죄자 알림e 서비스 홍보 광고는 그 공익적 의도와는 별개로 성범죄자들을 모두 잠재적 범죄자로 치부해버리는 우를 범한다. 이 공포감의 조장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이와 관련해 우리 헌법의 이중처벌금지의 원칙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과거 성범죄자의 전자발찌 착용이 논란이 되었을 때, 헌재는 형사상의 ‘형’이 부과되는 것만을 처벌로 보는 형식설을 따랐다. 이에 전자발찌 착용 명령을 처벌이 아니라고 해석했으며, 나아가 전자발찌 착용의 대상의 소급적용까지 합헌으로 판결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전자발찌 착용은 자유권의 제약이라는 측면에서 처벌의 성격을 띤다. 또한 성범죄자 알림e와 같은 정부 서비스는 낙인효과 등의 심리적 처벌을 가져오기도 한다. 법대로 따지고 원칙대로 따져서, 전자발찌나 성범죄자 알림e가 형벌을 주는 ‘처벌’이 아닐 수는 있겠지만, 당사자는 벌을 받고 있는 셈이다.

독자께서 만일 “그렇다면 당신은 성범죄자의 인권이 중요하다는 말이냐?”라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습니다”라고 답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성범죄자뿐만 아니라 전과자 전체에 해당하는 말이다. 우리나라의 형벌 체계는 교화보다는 징벌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재범률도 높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 높은 재범률을 타계하기 위해 또 다시 신체의 자유권을 침해하고, 개인정보를 공개하며, 나아가 사회적인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의 기본권은 막대한 공적인 피해를 예방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제한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성범죄 전과자들의 전과를 알리고 그들을 경고하는 제도가 없어졌을 때, 아이들이 겪을지 모를 고통에 대해서 걱정을 한다. 이는 여성이 아닌 사람이라도, 자녀가 없는 사람이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죗값을 받은 사람을 상존하는 위협으로 상정하고 예방적 차원에서 사회로부터 배제시키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이며, 나아가 약자에 대한 공격이다. 이러한 공격들이 감정적 동감이라는 이유로 우리 사회에서 당연시될 때, 우리는 파시즘에 직면할 수도 있다.

이경락 _ 공공미디어연구소 연구원. YTN사이언스의 사이어스투데이에서 '미디어 앤 사이언스'라는 이름으로 과학저널리즘을 비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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