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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한글날마다 세종대왕을 진부하게 괴롭히는가?[기자수첩]568돌 한글날, 세종할아버지는 웃고 계신대
한윤형 기자 | 승인 2014.10.09 13:30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 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 살피는 깨우친 임금, 세종이오.”

유명한 턴제 시뮬레이션 게임인 <문명 5>에 등장한 세종대왕의 대사다. 물론 세종대왕의 사후에 붙여진 그의 묘호를 읊는다는 것은 (유저에게 그가 누구인지를 전달하기 위한 의도된) 고증오류일 테지만, 이 게임에 등장한 세종대왕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인물의 이미지를 나름 충실히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문명 5>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의 모습
 
그러나 정작 한국에서는 매년 한글날이 올 때마다 전혀 다른 성격의 세종대왕을 조형해놓고 그걸 근거로 시민들을 질타한다. 이른바 ‘한국어 파괴’ 현상을 질타하면서 ‘세종의 눈물’, ‘세종대왕 울상’ 운운하는 것이다. 올해는 <동아일보>가 7일자 14면 기사의 제목을 <“세종의 눈물, 한국인은 모르는지…”>로 달고 외국인 학생까지 끌어들여 그런 논의를 펼쳤다. 
 
   
▲ 7일자 동아일보 14면 기사
이와 같은 얘기는 전제부터 잘못되어 있다. ‘한글’은 문자이며, ‘한국어’는 언어다. 가령 “캔유스픽 잉글리시?”라고 쓴다면 ‘영어’ 문장 하나를 ‘한글’로 표기한 것이다. 또 “Zani?”라고 적으면 한국 사회에서 구남친들이 새벽 2시에 보낸다는 ‘한국어’ 문장 하나를 ‘로마자’로 표기한 것이다. 이렇듯 둘은 명료하게 구별될 수 있다. 세종대왕의 업적을 문자 창제라 본다면, ‘한국어 파괴’와 ‘한글 파괴’를 헷갈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대다수 언론들이 ‘한국어 파괴’ 현상을 말하면서 ‘세종의 눈물’ 운운하는 것이 현실이다. 
 
딱히 한국어를 기념하는 날이 없으니 한글날 ‘한국어 파괴’ 현상을 말한다고 쳐도, 세종대왕을 끌어 들여서는 안 된다. 언론에서 논하는 ‘한국어 파괴’는 대체로 인터넷 세대 혹은 청소년 세대의 은어, 줄임말, 외래어 남용 등이다. 주로 신문의 주요 구독자인 기성세대의 시선에서 청소년·청년들의 언어생활을 규탄하는 것이다. 
 
그러나 600년 전의 인물인 세종대왕이 벌떡 일어났을 때, 1950년대생과의 의사소통이 1990년대생과의 의사소통보다 특별히 더 쉬울 이유는 없다. 물론 한자로 필담을 나눈다면 또 다른 문제지만, 구어의 차원에선 그렇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해왔으며 그중 언중 다수에게 받아들여진 말이 새로운 언어를 구성해왔다. 세종대왕은 우리 사회 모든 세대와의 의사소통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하지만 그 현상을 ‘한국어 파괴’라고 부르는 건 부당할 것이고, 이는 그가 눈물을 흘려야 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 우리가 ‘중국’을 여전히 ‘듕국’이라 적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사어가 된 훈민정음의 네 글자를 다시 쓰자고 주장할 게 아닌 다음에야 말이다.   
 
세종대왕을 끌어들여 기성세대의 언어습관을 표준으로 삼는다던가, 순우리말 표현을 절대시하는 것은 모두 부적절한 일이다. 외래어도 한자어도 우리말 축약어도 한국어의 일부다. 한자어는 축약이 쉬운 장점이 있다면서 우리말 축약어는 적대시하는 것도 이상하다. <동아일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문단이 나온다.
 
중국인 류양 씨(25)는 “언어의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지만 그 와중에도 중국은 스마트폰을 ‘즈넝서우지(智能手机)’라고 하는 등 고유의 표현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몽 씨는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표현하는 북한의 자세가 차라리 나은 것 같다”며 “언어는 (소통의 도구인) 언어일 뿐, 멋을 부리는 패션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일침을 가했다. 
 
하지만 중국과 북한이 극단적인 상황일 뿐 옆 나라 일본은 우리 같으면 ‘복수전’이라고 적을 것도 굳이 ‘리밴지 매치’라고 표기한다. 만약 그런 이유로 ‘한국어 파괴’를 논한다면 일본어는 이미 가루가 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무엇보다 ‘한글’과 ‘한국어’를 헷갈리고 ‘한국어’를 ‘우리 세대 표준어’나 ‘순우리말’과 헷갈리는 이 모든 행태가 한글날이 마땅히 기려야 할 세종대왕의 문자창제의 위업의 의미에 대한 이해부족을 보여준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또 매년 한글날 즈음에 누군가는 인터넷에 이러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구별하자고 쓰고 있음에도 언론 보도에 개선점이 없는 것 역시 큰 문제다. 
 
만약에 세종대왕이 자신의 생전 기억을 모두 가지고 이 시대에 나타난다면, 그는 어떤 느낌을 가지게 될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추측할 수는 있다.
 
그는 일단 당황할 것이다. 그가 알고 믿었던 하나의 거대한 세계가 신기루 속으로 사라진지 오래이므로. 훈민정음 창제조차 중화 문명권의 맥락 속에서 계획된 일이었다. 훈민정음에 성조를 표기하는 기호가 있는 것에 대해, 중세 한국어에 성조가 있었다는 사실의 근거로 받아들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훈민정음이 당대의 한자에 대한 중국 발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발음기호’와 같은 문자였기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훈민정음은 ‘백성이 쉽게 익힐 수 있는 말’이기도 했지만, ‘사대부와 백성에게 한자에 대한 중국어 발음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는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시대의 다른 많은 사대부와는 달리 교조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언어학자로서의 그는 희열에 차오를 것이다. 세상의 질서는 뒤집혔고, 그가 모르던 수많은 이민족들의 개념어가 후손들의 지식체계에 들어왔다. 그는 표음문자를 만들었지만 표음문자가 지식전달의 기본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본 적이 없을 것이다. 
 
   
▲ 국보 제 70호로 지정된 훈민정음 해례본. (출처: 위키피디아 한국어판)
 
하지만 훈민정음, 한글은 살아남았다. 붓으로 문자를 쓰는 것이 기본이던 시대에, 백성이 나뭇가지로 땅 위에 적을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한 모양의 문자를 만들어낸 그의 애민사상은 그가 만들어낸 문자의 수명을 무한히 연장했다. 세로쓰기가 가로쓰기로 바뀌어도 살아남았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든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쓰든 상관이 없었기에 살아남았다. 
 
20세기에 들어 타자기가 잠깐 문자 생성방식의 대세였을 때 한글의 ‘모아쓰기’ 방식이 잠깐 문제가 되어 ‘풀어쓰기’에 대한 실험이 논의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컴퓨터가 발명되면서 모아쓰기 형태가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오늘날의 한글은 세종대왕 본인이 보더라도 자신이 만든 바로 그 문자임을 바로 확신할 정도로 첫 발명품에 거의 흡사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어떤 휴대폰 자판에선 심지어 그의 모음 창제원리인 ‘천지인’을 활용하여 모음을 생성한다. 
 
이보다 성공한 언어학자를 상상할 수 있을까? 톨키니스트들은 톨킨이 만든 높은요정어를 공부한다지만, 그들이 언어를 공부하는 이유는 실용적인 목적 때문은 아니다. 그러나 세종이 만든 문자는 그가 원했던 역할을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탁월하게 수행하는 중이다. 그렇기에 만일 세종대왕이 부활한다면, 그리고 이 시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그가 입이 귀에 걸린 채로 세종대로를 거니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명민한 그는 다른 나라의 사례까지 검토한 후, 현대 한국 사회가 상류층과 서민이 같은 문자를 사용하며 의사소통을 하게 된 것엔 자신의 공로가 크며, 그런 의미에서 자신은 결코 민주주의자였던 적이 없지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공로를 주장할 것이다.
 
   
▲ 8일자 조선일보 16면 기사
 
세종대왕은 틀림없이 웃을 것이다. 웃고 또 웃은 후에, 그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명절을 맞이하여 산타클로스에게 선물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웃다가 이 시대에 적응된 그가 자신의 문자 너머의 사회문제를 바라본다면, 어린 아해들이 한국어 낱말을 줄여 쓰는 행위 정도에 개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일단 사회 구성원의 절대다수가 자신이 만들어낸 문자를 알고 문자문화를 향유하는 이 세계에 경탄할 것이다. 좀 더 적응된다 하더라도, 그가 개탄할 일은 청소년들의 ‘언어 파괴(?)’ 현상이 아니라 관아의 사람들이 관아가 아닌 척 백성들 틈에 끼어들어 이상한 낙서를 끼적인 행위(국정원·사이버사 댓글 사건)일 것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최만리 등을 향해 너희들이 언어학을 아느냐고 질타했다. 그런 지성인이 이 시대에 태어나서, 현재 한국 사회의 신문들이 꼴에 언론이랍시고 제 주요 독자층에 아부하기 위해 연소자들의 언어습관이나 질타하는 꼴을 본다면, 다음과 같은 분노의 일갈을 터트리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네놈의 성가신 행패를 집현전은 더는 용인하지 않는다! 우리는 무력으로라도 너의 탄압받은 백성들을 자유롭게 하고 깨우치게 해주리라!” (<문명5>, 세종의 선전포고 대사. 역시 집현전을 집행기관으로 생각하는 고증오류가 있다.)
     

한윤형 기자  a_hrima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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