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청전>은 아버지의 눈을 뜨게 만드는 기적 하나를 믿고 자신의 몸을 아낌없이 푸른 바다에 던진 효녀의 이야기로 포장되었지만, 아버지 심학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면 눈을 뜨고 싶은 욕망에 딸을 희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아버지의 탈을 뒤집어 쓴 옴므파탈’에 다름 아니다. 후자의 관점으로 <심청전>을 읽는다면 뺑덕어멈이 심학규에게 악행을 가하는 것을 인과응보로 읽어볼 수 있다. 딸에게 바다에 투신이라는 못할 짓을 하도록 만든 나쁜 아버지가 받는 인과응보이다.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마담 뺑덕>에서 심학규의 욕망의 희생양은 원전의 심청이 아니라 ‘뺑덕어멈’ 캐릭터 덕이(이솜 분)로 치환된다. <심청전>이 심학규의 딸 심청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면 <마담 뺑덕>은 뺑덕어멈의 관점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셈이다.

덕이는, 가르치던 여대생에게 모함을 받고 지방으로 좌천된 심학규(정우성 분)에게 사랑받는 인격체라기보다는 지방 도시의 무료함을 달래줄 심심풀이 상대일 뿐이다. 서울로 올라간 심학규가 덕이를 애써 외면하고, 덕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임신중절을 강요하는 건 쾌락은 즐기되 책임은 회피하려 드는 옴므파탈의 전형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심학규가 덕이 뱃속의 태아를 눈도 뜨기 전에 낙태로 죽여 버린 것처럼, 덕이는 심학규에게 받은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되돌려주기를 바란다. 사랑했던 남자 심학규에게 버림받은 덕이가 복수의 화신이 되는 건 당연지사, 동해보복법 혹은 탈레오의 법칙이 영화를 지배한다. 용서는 다른 영화에게 던져주라고 작정이나 한 듯 <마담 뺑덕>은 서로가 서로에게 받은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복수로 되돌려주는 데 천착하고 있다.

그럼에도 심학규의 딸 청이와 친해지는 데 성공한 덕이가 청이의 아버지 심학규와 가까워지는 과정에 대해서는 영화가 불친절하다. 정우성과 이솜의 정사신에 들인 공의 반의 반도 안 될 정도로 덕이와 심학규가 가까워지는 연결고리를 묘사함에 있어 영화는 불친절하기 짝이 없다. 복수라는 명제는 있지만 복수라는 답안을 도출하기 위한 풀이과정에는 소홀한 것과 다름없다. 영화 후반부 들어 심학규가 덕이의 정체를 알고 나서도 덕이에게 분노하기보다 어정쩡한 태도를 갖는 것 역시 납득하기에는 어려워 보인다.

이 영화가 비판받아야 할 점은 영화 후반부 들어 보여주는 패착이지만 이를 콕 짚어 비판한다면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될 수밖에 없기에 기술할 수 없음을 양해하기 바란다. <헨젤과 그레텔> 이후 동화 혹은 고전을 재해석하여 영화적으로 풀이해온 임필성의 간만의 복귀작이기는 하지만 <마담 뺑덕> 역시 이전작들처럼 반가운 복귀작은 아니다. 정우성의 노출과 이솜의 연기가 소모된 건 <심청전>의 재해석에만 천착했지 그 재해석이 관객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까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연출 때문이다. 특히 영화 후반부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듯하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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