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도 죄가 되는 시대가 됐다. 검찰이 일본 <산케이신문>에 실린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 관련 기사를 번역한 기자를 압수수색한 것으로 드러나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 한다’는 비난이 거세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수사팀은 19일 낮 <산케이 신문>의 <박근혜 대통령이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 누구와 만났을까?>(8월 2일 기사)를 번역한 민성철 씨를 추적하던 과정에서 <뉴스프로> 번역기자로 활동하고 있는 전모씨의 집을 압수수색했다. 민씨의 기사가 명예훼손 소지가 있다고 판단, 수사에 착수한 상황에서 민씨의 소재를 파악하기 위해 압수수색을 벌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프로>는 자사 기자의 압수수색 소식을 전하며 “검찰이 전 기자에게 집중적으로 <뉴스프로>의 민성철 번역기자의 소재와 연락처, 생년월일 등을 물은 것으로 보아,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 발언에서 ‘자신에 대한 모독이 지나치다’는 발언 이후 검찰이 잰걸음을 한 듯하다”며 “제왕적 말 한마디로 여당과 검찰이 알아서 기는 세상, 박근혜 정권이 지배하는 세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일갈했다.

미국에 소재지를 둔 <뉴스프로>는 ‘정의와 상식을 추구하는 시민네트워크’(이하 정상추)가 더 넓은 소통을 위해 올해 3월 창간한 매체로 그간 한국의 각종 이슈와 관련된 외신을 번역, 홍보해 온 바 있다.

이 같은 소식은 세계 주요 시위를 보도하는 전문 매체인 <레볼루션 뉴스>와 일본의 3대 신문으로 꼽히는 <요미우리신문> 등 여러 외신에서도 다뤄졌다. <뉴스프로>는 <레볼루션 뉴스>가 20일 <뉴스프로>의 임옥 기자가 작성한 <South Korean President Park Abuses Power in Attempt to Stifle Unfavorable News Reports>(한국의 박 대통령, 비우호적인 뉴스 보도를 억압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하다) 기사를 인용 보도했다고 설명했다.

▲ 21일 요미우리신문은 연합뉴스를 인용해 박근혜 대통령의 사라진 7시간을 다룬 산케이신문의 기사를 번역한 기자가 압수수색당했다는 보도를 내보냈다. (사진=요미우리신문 온라인 캡처)

<요미우리신문>도 <연합뉴스>를 인용,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인 가토 씨가 쓴 <박근혜 대통령이 여객선 침몰 당일, 행방불명 … 누구와 만났을까?>를 번역해 논평을 한 사이트 관련자를 가택조사했다고 21일 보도했다.

“눈엣가시인 뉴스프로와 정상추를 손보려 한다는 지적 피하기 어려워”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 대통령의 7시간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풀려야 할 대표적인 의혹 중 하나로, 여전히 실체는 밝혀지지 않고 무수한 풍문만이 돌고 있다. 그런데 검찰이 이에 대한 무리한 수사를 벌여 언론계와 정치권 등에서 반발이 크다.

검찰은 지난 7월 18일 <조선일보> 최보식 기자의 칼럼 <대통령을 둘러싼 풍문>에 대해서는 서면 조사만을 벌인 반면, 가토 다쓰야 <산케이신문> 서울 지국장에게는 출국금지 조치를 내리고 검찰 출두를 통보하면서 이전부터 비판 목소리가 높았다. 그런데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에 대한 모독적인 발언도 그 도를 넘고 있다. 이것은 국민에 대한 모독”이라고 밝힌 후 ‘대통령의 7시간’을 공론화한 이들에 대한 압박 수위가 올라가고 있는 것.

▲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6일 오전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는 모습 (사진=연합뉴스)

<한국일보>는 23일 사설 <산케이보도 번역자까지 압수수색은 과잉 수사>에서 “검찰이 뉴스의 생산자가 아닌 번역자를 대상으로 수사에 나서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라며 “번역가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지난 3월 문을 연 <뉴스프로>는 그동안 박근혜 정부를 비판하는 외신기사를 꾸준히 번역해 왔다. 이런 점에서 검찰이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인 뉴스프로와 정상추를 손보려 한다는 지적을 피하기 어렵다”고 꼬집었다.

<한국일보>는 “기본적인 사실을 확인하지 않은 <산케이신문> 보도가 언론의 정도를 넘어선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면서도 “검찰이 처벌을 전제로 수사의 칼날을 들이대면 언론의 권력비판 기능이 위축된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고 말했다.

이어, “악의적인 보도라 해도 모든 국민이 관심을 갖고 있는 중요 사안이라면 정부는 설득과 해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게 옳은 방법”이라며 “검찰은 국가적 망신을 사는 무리한 수사를 자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향신문>도 같은 날 사설 <외신기사 번역한 것까지 문제 삼는 검찰>을 통해 “압수수색을 당한 전모 기자는 기사를 번역한 당사자도 아니다. 검찰이 ‘대통령에 대한 모독이 도를 넘었다’는 박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무리수를 두고 있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질타했다.

<경향신문>은 “외신 보도는 비단 인터넷언론뿐 아니라 국내 모든 언론사들이 매일같이 다루는 내용이다.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인 보도 내용을 통제하는 것은 5공 시절에나 가능했던 얘기”라며 “행여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진보언론을 겁박해 재갈을 물리겠다는 뜻이라면 더욱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명예훼손은 설사 보도 내용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믿을 만한 근거가 있거나 고의성이 없다면 처벌할 수 없다는 게 대법원 판례”라며 “대통령을 의식한 기소권 남용은 두고두고 검찰 조직에 짐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외신 번역이 국가이익에 반하는 것인가”

정치권도 들썩이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3일 논평을 내어 “검찰의 과잉 조사는 대한민국의 언론자유 문제라는 또 다른 국제적 논란에 불을 지른 형국”이라며 “이미 박근혜정권 출범 후 우리나라의 언론자유 지수는 수직 하락한 것이 사실인데 아마도 이 사건을 계기로 더 추락할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21세기 글로벌시대에 외신을 번역했다고 해서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나라는 찾아보기 힘들며 마치 조선 말기 대원군 시절 쇄국정책을 연상시킬 따름”이라며 “정부 관계자들은 진정한 국가이익을 위해 과잉충성을 자제하고 보다 성숙한 국제적 감각과 언론관을 갖추기를 촉구한다”고 밝혔다.

노동당 역시 같은 날 논평에서 “이번 사건은 대통령이 기침을 하면 몸살을 앓는 전형적인 검찰의 권력지향성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권력자의 기분을 상하게 했다는 이유로 언론이 탄압받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파괴에 다름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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