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석규의 3년만의 복귀, 그것만으로도 ‘비밀의 문’은 드라마 마니아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지난 ‘뿌리 깊은 나무’에서 성군 세종의 면모를 한석규 특유의 꿀성대를 십분 활용하여 완성시켰던 것과 달리, 이번에는 문제적 임금 영조로 그 이미지의 역전을 시도한다. 영조는 조선왕들 중에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일반에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바로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끔찍한 사실이다. 그 괴팍하고도 냉정한 사건의 주인공 영조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한석규의 영조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조건이 있다. 그것은 소위 정설이 아닌 가설의 채용여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경종독살설과 혜경궁 홍씨를 어떻게 그려낼 것인가에 대한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이미 국사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큰 문제들이다. 또한 여전히 어느 한쪽이 옳다고 확정되지 않은 내용들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왠지 이번 드라마에서는 가설에 무게를 두지 않을까 싶었는데, 22일 방영된 첫 방송을 보니 그런 짐작이 어느 정도는 맞아떨어지는 분위기였다.

먼저 경종독살설에 대한 영조의 뿌리 깊은 콤플렉스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첫 방송된 ‘비밀의 문’은 영조의 선위파동을 길게 다뤘다. 실제로 영조는 여러 번 선위 해프닝을 벌였다. 물론 신하들의 충성심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세자의 15번째 생일 다음날의 선위파동은 좀 더 심각했다. 그것은 바로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기 위한 의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때에도 경종독살설에 대한 영조의 콤플렉스는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한밤중에 내려진 전교에는 세 가지의 취지가 적혀 있었다. 하나는 영조가 죽어 황형(경종)을 보기 위함이고, 둘은 본래 남면(임금노릇)하기를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셋은 흔한 선위의 이유인 칭병이었다. 한마디로 경종독살설을 우회적으로 부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연히 세자와 신하들은 피눈물을 쏟아가며 선위를 거둬달라고 빌 수밖에는 없었고, 마침내 영조는 대신 대리청정으로 한 발 물러서게 된다. 아니 그것이 목적이었다.

세자에게 대리청정을 시키겠다는 것은 두 가지 목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아들에게 확실한 임금교육을 시키겠다는 따뜻한 의도이며, 다른 하나는 또 역시 경종 재위 시 자신이 대리청정했던 것에 대한 정당화 목적 또한 읽어낼 수 있다. 어쩌면 후자가 더 큰 동기로 작용했을지도 모를 정도로 영조의 경종 콤플렉스는 너무도 거대했다.

그러나 드라마 속에서 선위 파동의 이유는 달랐다. 작가가 이런 내용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지만 처음부터 전면에 내세우기는 위험하다는 판단을 했을 것 같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영의정 김택과의 힘싸움이다. 세자를 찾아와 맹의에 서명하기를 강요했던 이는 노론의 수장 김택(김창완)이었다. 그 맹의라는 것이 드라마 속에서 자세히 설명되지는 않았지만 영조의 아킬레스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영조가 노론의 왕이라는 사실을 맹세하는 정도의 내용일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작가는 영조의 경종독살설에 대한 콤플렉스를 노론과의 맹의로 바꾼 것이다. 사실 경종독살설은 대하드라마가 아닌 이상 자세히 설명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대신 맹의로 바꿔 놓으니 그럴싸한 상징성을 갖는 동시에 미스터리 소재로도 훌륭하게 변신할 수 있었다. 아무나 작가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하게 되는 부분이었고, 이 드라마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증폭되는 지점이었다. 또한 사도세자의 빈, 후일 혜경궁 홍씨에 대한 시선이 기존 사극들과 다른 것도 이 드라마에 대한 신뢰와 흥분을 자극하는 부분이었다. 다만 박은빈의 연기가 아직 만족스럽지 못한 것이 숙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드라마는 사도세자의 죽음 직전까지를 그린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영조가 주인공이다. 그 영조에 대한 밑그림으로 선위파동은 매우 드라마틱하면서도 상징적으로 잘 그려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아무리 한석규라 할지라도 대본의 방향이 잘못된다면 명연기는 기대할 수 없지 않은가. 대왕 세종, 불멸의 이순신, 황진이 등 사극 전문작가라 할 수 있는 윤선주 작가에 대한 기대는 그래서 중요하고도 또한 유효하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또 한동안 사극에 깊이 빠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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