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팅을 나갔다. 나이 서른 하나가 되어서 난생 처음 하는 ‘미팅’이라니. 화장을 하고 구두를 신는 나 자신에게 내가 생경하여 코웃음이 날 판이었다. 언제 종지부를 찍을지 모를 백수라는 타이틀을 안고서, 가진 건 시간뿐이라 뭐라도 약속이 잡히면 반가울 타이밍이었다.

사적인 고백이지만 다들 수차례는 하고 지나간다는 왕 게임을 이날 처음 해보았다. 게임 같은 건 약체인 인간이라고 자평하던 나는 이날 최다 득표의 왕이 되었고, 왕의 군림 밑으로 들어갔을 때에도 가장 용맹한 군신이었음을 밝힐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왕이 됐다가 군신이 되어버리는 서른 근방의 여덟 사람이 마주 앉아 시간이 제법 쌓였다 싶을 때, 한쪽에서 이상형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냥 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이 좋은 것 같은데.”

아주 평범한 이야기였다. 흔히 들을 법한 말이었고, 아마 말을 던진 사람도 가장 무난하다 생각하여 밝힌 이상형이었으리라. 혹은 자신이 그렇지 않다고 여겨 던진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말은 꽤 큰 파장력을 갖고 돌아왔다.

나 역시도 최근에는 두루뭉술하게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지 싶다. ‘건강하게 사랑 받아서, 건강하게 사랑 할 줄 아는 사람이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분명히 안고 있었다. 그런데 그 근원지가 ‘집’ 혹은 ‘가족’으로 좁혀져 요구된다는 것은 뭐랄까, 더 치열했을 개인의 의지나 역사가 강등 당하는 것 같다.

최근 [프란시스 하]를 연출했던 노아 바움벡 감독의 2007년 작품 [마고 앳 더 웨딩]은 가족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다. 이 영화는 제목 그대로 주인공 마고(니콜키드먼)가 여동생 폴린의 웨딩 준비에 가서 어떤 자태를 보여주다 오는가를 보여준다.

결혼을 앞둔 동생을 만나러 간 언니에게 기대되는 면모는 어떤 것 일까. 자상하고 세심한 손길로 여동생이 미처 보지 못하는 구석까지 챙겨주는 것이 대개의 기대일지는 모르겠지만, 여기 마고 언니의 태도는 그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먼 길을 거슬러 가듯 기차를 타고 이동 중인 마고와 그녀의 아들. 기차에 자리한 마고가 아들을 대하는 태도는 눈에 크게 띄지는 않을 정도의 기묘함을 안고 있다. 물론 [정상적이고 성숙한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기차 여행을 할 때에 지켜야 하는 101가지] 같은 책이 있다면 굳이 예로 꼽지는 않을 정도의 이상함이다. 마고의 태도는 이를테면 새침한 학원 친구, 혹은 성격 있는 동네 녀석의 기운을 풍긴다. 허나 우리는 ‘그런 엄마’ 마고 옆에서 잠자코 앉아 있던 10대 소년이 열차 뒷 칸으로 이동하여, 아무도 모르게 (그러나 익숙한 듯) 고래고래 악을 쓰며 분을 삭이는 풍경을 목도하게 된다.

영화는 어떤 연유인지 제법 오랫동안 연락을 끊었던 자매가 이야기의 중심에 선다. 결혼을 매개로 오랜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이 감동의 재회를 이루는가 싶지만, 본식이 예정된 그날까지 촘촘히 드러나는 두 자매의 인물상은 주워 담기 힘들 역사를 첩첩산중으로 다시 쌓는 듯 흘러 가며 그녀들의 유년 시절엔 대체 어떤 가족사가 쓰여졌던가 상상하게 만든다.

사유 재산이라던가, 학벌, 나이 같이 마음 먹고 조사하기에 이르면 똑 떨어질 법한 분류들 말고, 성숙도라던가 인격에 대한 절대적인 평균치가 간혹 궁금하다. 물론 이제는 굳이 그런 좌표가 정해져 있지 않다 하더라도, 어떤 일이나 사람을 마주하게 될 때, 크게 동요하지 않을 정도의 자기 기준을 갖췄다는 (오만한 혹은 합리화 된) 생각이 들지만 어릴 때에는 꽤나 이런 것들이 제발 좀 있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평균 학벌이나, 평균 연봉의 좌표가 아니라, 세상 모든 인구의 성숙도 측정 좌표가 주워진다면 ‘아 나는 아직 많이 미숙한 인간이구나, 돈도 돈이지만 나의 성숙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다’는 신풍경도 생길 수 있겠다는 상상도 더러 했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생각에는 확신이 안 서고, 남이 하는 생각은 일단 미덥던 시절이었다.

어찌 보면 영화 [마고 앳 더 웨딩] 속의 나오는 인물들의 주요 쟁점은 다 그 자기 확신이 너무 과해서 일어나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일단 주인공 마고는 본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이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판단이 부족한 것 처럼 보이는데, 동생 폴린 눈에 역시 언니가 그렇게 다 마음에 들 리 없다.

대개의 이야기 안에서 그래도 누군가는 인물들 중 보다 성숙하거나 하다 못해 평범한 태도를 갖추고 있기 마련인데, 이 영화 속 주요인물들은 모두 어딘가가 과하거나 부족해 보이는 면모가 드러난다. 그나마 가장 평이하다 할 수 있을 인물이 10대 소년인 마고의 아들이니, 이들이 한데 모인 가족의 자리가 말도 많고 탈도 많을 수밖에.

그런데 사실, 2시간이 채 안 되는 길이의 영화이기 때문에 인물들이 과해 보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친구가 된 지 10년이 지나서야 상대의 특이성을 확인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남동생의 분노 같은 걸 마주 하기도 한다.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직장 동료가 알고 보니 대단히 나에게 맞춰 줬을 수도 있고, 배려 돋던 남자친구가 어느 날 폭발하여 헤어지자는 이별 통보를 해올 수도 있는 것처럼 늘 평이하고 안정적인 관계나 인물은 사실 보기가 드물지 않나 싶다.

[마고 앳 더 웨딩]은 의외의 순간의 삐끗한 한마디가 서로를 긴장시키고, 본인에겐 너무나 확고한 세계가 타인에겐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이기에 가능해진 영화이다. ‘세상 모두가 고르고 성숙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이야기’라고 까지는 감히 붙이진 못 하겠지만, 도드라지는 인물들의 특색 덕에 더 긴밀해지는 영화임엔 틀림 없다. 때문에 기이하게도 [마고 앳 더 웨딩]은 모든 인물들이 자신의 특이성을 폭발시킨 이후에도 그 개인의 특이성 덕에 나름의 해피엔딩 아닌 해피엔딩을 구현해 보이는 결말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결국 이 가족이 다다른 결과는 무엇인가 하는 더 깊은 질문의 결말은 직접 확인한다면 좋겠다.

‘나는 이만큼 아픈 일이 있었고, 이만큼 다쳐서 이만큼이나 아파’ 라고 매번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는 사람을 마주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누군가를 위로해 주거나 덜어주기에 개인이 갖고 있는 여유나 역량이 넉넉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도 하다. 모두가 고르게 사랑을 받고, 해피하게 자랄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 못 했다고 해서 하자가 있는 상태일 수도 없다. 오히려 내 경우에는 별 수 없이 갖게 되었던 상처를 개인의 노력과 성찰로 잘 만져 온 사람이 훨씬 더 매력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당신이 어떤 상처를 안았든지 간에, 언젠가는 그 아픔과 그 열등감들을 유머로 승화시킬 수 있는 자리로 갈 수 있길 응원하고 싶다. 물론 나부터가 대단히 노력해야 한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