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할 것도 없습니다 (...) 논할 도리가 없습니다”

이는 중국의 삼국시대를 다룬 일본의 만화 <창천항로>에서 동탁의 부장 서영이 동탁에게 “원소는 어찌 되었는가 (...) 조조는 어찌 되었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대사의 의도는 물론 이 만화의 특성대로 원소는 한없이 낮추고 조조는 한없이 올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만화의 의도와는 별개로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상황을 보면 이 대사가 떠오른다. 제1야당의 무력함에 대한 얘기가 나온 것이 언제부텨였을까. 짧게 봐도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부터, 길게 보자면 참여정부 말기부터 나온 얘기였을 것이다. 길게 잡으면 십 년은 된 얘기라고 볼 수 있다.
그간 제1야당의 문제와 위기에 대한 논의의 양을 생각해보면 얼마나 많은 나무가 베어지고 얼마나 많은 전기가 낭비되었을지 측량할 수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이들에 대한 전망을 하라고 하면, “논할 것도 없고, 논할 도리가 없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이 22일 국회 대표실에서 취임 후 첫 비대위원회를 주재한 자리에서 "오늘 이 순간부터 공식 전당대회 선거운동이 허용되는 직전까지 일체의 선거운동이나 계파 갈등을 중단할 것을 엄숙히 선언한다"고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금의 비상대책위가 그 자체론 혁신이 아니라 혁신을 준비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더 논하기가 어렵다는 지점도 있다. 최근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리멸렬의 수준은 이 당에서 기존에 비판받던 계파정치만이 문제인 게 아니라, 사실상 계파 간의 합의의 가능성조차 붕괴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낳을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각 계파의 수장 및 상징적 안물을 안배한 듯한 비대위는 구태의연해 보이기는 하지만,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었다는 맥락도 분명히 있다.
이번 비대위는 문희상 비대위원장과 박지원 비대위원 등이 언론인터뷰에서 얘기하듯, 지금의 박근혜 정부를 구성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닐 2012년 새누리당 비대위와는 전혀 성격과 맥락이 다르다.
‘문희상 비대위’는 내년 2월 전당대회까지의 한정된 시간 동안 존속할 것인데, 거대한 과제를 세 개나 가지고 있다. 첫 번째로는 세월호 특별법 협상의 교착 국면을 어떻게든 돌파해야 한다. 이 교착 상태에 대해 정부 여당의 책임이 크다고는 하지만 국회에 대한 시민의 냉소를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야당도 버티기 어렵다. 이 문제에 관해선 협상 상대인 새누리당의 입장도 있는 만큼 새누리당의 양보를 촉구하는 것과 동시에 유족들과의 의사소통에 면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만일 문희상 비대위조차 합의안을 도출한 후 유족들의 추인을 못 받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바닥의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하는 새정치민주연합은 그 아래에 또 바닥이 있음을 체험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와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이 22일 국회 새누리당 대표실에서 첫 회동을 갖고 악수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두 번째로는 내년 2월의 전당대회를 무사히 치러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민심과 여론을 잘 담아내는 방식으로의 제도 개선이 요구되는데, 모바일 투표와 오픈프라이머리 등 해묵은 논점들이 많다. 제각각 나름의 명분은 있는데 이해관계에서 문제가 생기고 여기에 계파갈등이 개입되어 있다.
전당대회 과정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이 “일단은 침몰하는 배를 건지자. 선장 싸움을 하더라도 그 다음에 해야 한다.”(문희상 비대위원장의 22일 <중앙일보> 인터뷰), “우리 새정치민주연합이 이 이상 몰락하면 안 된다”(박지원 비대위원의 22일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발언), “정당·정치 혁신에 정치생명 걸겠다. 우리 당은 더이상 추락할 데가 없다, 여기서 일어서지 못하면 차라리 당을 해체하는 게 낫다”(문재인 비대위원의 22일 비대위 회의 발언)와 같은 발언에서 드러나는 정당 생존에 대한 강한 위기의식을 보여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마지막으로 그러면서 혁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물론 구체적이고 과감한 혁신은 납득할 만한 전당대회를 통해 구성된 차기 지도부의 몫이 될 것이다. 그래서 이번 비대위를 ‘관리형 비대위’라 한다. 그러나 그렇다 쳐도 전혀 혁신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면 전당대회조차 흥행할 수 없는 것이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의 실상이다.
물론 상황은 매우 어렵다. 그러나 정당이 인물의 발목을 부여잡는 상황이며, 정당의 구축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진다면 희망은 있다. 최근 차기 대선주자 지지율에선 다시 야권의 박원순 서울시장이 앞서 나가고 있다. 그 뒤를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와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추격하는 형국이다.
▲ 새정치민주연합 문희상 비대위원장과 박영선 원내대표 등 비대위원들이 22일 국회 대표실에서 열린 비대위원회의에서 손을 잡고 있다. 왼쪽부터 문재인·정세균·문희상·박영선·박지원·인재근. (연합뉴스)
요즘 새누리당 당직자들은 정치부기자들에게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한다. “차기에 박원순이 출마한다면 인물경쟁력에서 우리가 이기기 쉽지 않을 것이다. 박원순에 이어 안희정이 나온다면 ‘잃어버린 10년’이 도래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하지만 별로 걱정하지는 않는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다시 문재인을 대선 주자로 내세우고 패배할 거라고 예측한다”
이에 대해 어떤 정치부기자들은 이렇게 부연한다. “지금의 정당구조론 친노들이 안이하게 다시 문재인을 내세울 수도 있지만, 또 설령 인물경쟁력이 나은 후보가 나오더라도 결국 새누리당의 ‘팀플레이’에 패배할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문재인 의원의 정치력에도 문제가 많지만, 문재인이란 인물만이 문제는 아니다. 그를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않고, 어떠한 상처도 없이 대선후보로 다시 내세우겠다는 친노들의 욕망이 문제다. 문재인은 지금부터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거면 대선후보 생각도 하지 말아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 사람들은 이와 같은 세간의 평가에서 강한 위기의식을 느껴야만 한다. 결국엔 혁신은 위기의식의 크기에서 도래할 것이다. ‘논할 것도 없고, 논할 도리도 없는’ 지금, 필요한 것은 위기의식 뿐이다. 자신들의 의원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정권 교체의 가망이 없어 보인다고 절망하는 유권자들의 마음에 반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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