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험한 동거 - 강요된 핵발전과 위험경관의 탄생, 2014.06.30, 이상헌, 이보아, 이정필, 박배균 공저, 알트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어디서 무슨 일이 터질지, 하루하루 마음을 졸여가며 살아가는 것도 이제 지쳤다. 핵발전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탈핵뿐이다. 하지만 질기디 질긴 생명력이다. 후쿠시마의 재앙이 아직도 진행 중이지만, 탈핵운동이 곳곳에서 확산되고 있지만, 핵발전과의 위험한 동거를 유지시키는 힘은 여전히 강하다.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핵발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책, "위험한 동거: 강요된 핵발전과 위험경관의 탄생"은 핵발전이 일상의 시공간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우회적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 있다.

지역사회의 포섭과 분할, 그리고 불안의 일상화·내면화

후쿠시마 사고 이후 핵발전소 인근 지역주민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했을까? 이 책은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핵발전에 대해 떠들썩하지만 정작 핵발전소를 바로 앞에 둔 주민들의 목소리는 비교적 잠잠한 상황에 의문을 던진다. 20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국도점거와 등교거부를 불사하며 핵폐기장 건설을 막아내고 영광 5-6호기 건축 허가를 일시적으로 취소시키기도 한 반대운동의 주역들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저자들은 발로 뛰며 만난 주민들의 목소리를 토대로 불안하고 위험한 동거의 기원과 과정, 그리고 동거의 이면을 파헤친다. 삶의 고통이 응축된 생생한 목소리를 단순화시키는 잘못을 무릅쓰고 정리하자면, 위험한 동거의 메커니즘은 크게 두가지이다.

첫째, 지역경제를 핵발전에 의존적인 형태로 변화시킴으로써 핵발전의 추진력을 강화한다. 핵발전소 공사는 공사비만 수조원에 이르는 대규모 건설사업이다. 따라서 핵발전소의 착공과 함께 지역의 건설경기는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고 건설인력을 상대로 한 상업과 임대업으로 이익을 얻는 이들이 생긴다. 그러나 공사가 끝나면 왁자지껄하던 그곳에 적막이 흐르기 시작한다. 핵발전소 예방정비가 이뤄지기 때문에 숨통이 끊기는 것은 아니지만 공사가 진행 중일 때와 비할 바가 아니다. 핵발전소가 위치한 지역이라는 낙인효과와 온배수 등으로 농업과 어업은 이전의 명성을 잃고 핵발전소 이외의 다른 일자리가 들어서지도 않는다. 오히려 핵발전소가 가동되면 지방세가 늘고 지원금도 들어오기 때문에 재정자립도가 낮은 지방자치단체는 핵발전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렇게 핵발전소 건설이 한두차례 반복되면서 핵발전소 건설에 따른 경기순환을 몸소 체험한 이들 중 '화려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며 새로운 핵발전소 건설에 동조하는 세력이 형성된다. 안타깝게도 신규 건설까지의 공백기가 길어질수록, 개발 제약이 큰 곳일수록 추가 건설의 압력이 거세진다.

둘째, 지역사회를 분열시킴으로써 핵발전에 대한 저항을 약화시킨다. 건설업과 농·어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 핵발전소가 지역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차별적이기 때문에 핵발전소의 건설은 지역사회의 내부 균열을 확대시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다. 핵발전을 추진하는 이들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지역사회를 분열시킬 보다 직접적인 수단을 사용하기도 한다. 5km를 기준으로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을 차별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5km라는, 별다른 근거없이 인위적으로 설정된 경계는 지원금의 사용 대상과 범위를 둘러싸고 주민들이 서로 다투는 전선이 된지 오래다. 지원금이 지역사회발전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정부사업을 대체하는 용도로 사용되면서 생긴 허탈감과 자치단체장 당선 등을 위해 지원금의 사용 범위를 확대하려는 정략적 이해관계가 더해지면서 지원금은 갈등의 씨앗으로 변했다. 말이 좋아 지원이지 발전소 주변지역 지원은 분할통치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핵발전소 건설을 위해 한수원이 직접 주민들을 회유하고 개발정보를 흘리면서 일부 주민들을 포섭해온 것도 뿌리가 깊다. 여기에 핵발전소 건설로 인한 이주 문제와 이주지에서의 원주민과의 갈등, 한수원 직원과 주민 사이의 공간적·계층적 분할 등 분열의 소지는 지뢰밭처럼 곳곳에 존재한다. 지역사회의 내부 분열이 확대되면서 자연스레 저항의 힘도 약해졌다.

이처럼 핵발전소에 의존적이면서 동시에 핵발전소로 인해 반목이 끊이지 않게 된 곳이 핵발전소 주변지역이다. 그리고 주민들이 수십년간 삶을 일구어온 생활의 터전이 바로 이곳이다. 떠나고 싶지만 떠나기 힘든, 외면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삶의 터전, 핵발전소라는 위험 경관이 그곳에 있다. 위험을 계속 증폭시키는 쳇마퀴를 굴리며…

경계선에서의 말걸기

위험의 쳇바퀴를 멈추기 위해 이 책은 무엇보다 일상화된 불안과 고통을 안고 사는 핵발전소 인접 주민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을 요청한다. 더불어 사회적으로 배제되어온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것이 탈핵의 첫걸음을 내딛는 것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우리는 지역주민들이 외쳤던 저항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이들의 숨죽인 고통과 불안에 공감하기는 커녕 그 존재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후쿠시마 사고 이후에야 떠들썩해진 이들을 보며 핵발전소를 마을의 일부 삼아 살았던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핵발전이 진정으로 '우리'의 문제가 되길 바란다면 다소 껄끄러울수도 있는 질문과 대면하며 지역주민과 그 외부라는 암묵적인 경계부터 허물어야할지 모른다. "위험한 동거"는 이러한 경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경계선에서의 경청이자 말걸기이다. 탈핵을 바란다면 이 책이 건넨 말걸기에 무슨 말로든 답해야하며 그것이 이 책을 읽어야할 가장 큰 이유이다.

말걸기의 측면에서 "위험한 동거"는 분명 성공적이다. 책을 읽는 내내 밀양과 청도, 삼척 등지가 아른 거리고 어떻게든 고리 1호기의 수명재연장은 막아야한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조금 욕심을 낸다면, 핵발전이 공고화되는 과정이나 공감 이후 탈핵의 전략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곁들여지지 않은 것은 아쉽다. 사실 이것은 이 책의 문제라기보단 탈핵진영이 안고 있는 한계라고 하는 게 정당한 평가일 것이다. 핵발전의 경제성이나 안전성, 윤리성 등을 비판하는 일반론적인 연구나 도서는 많이 늘었으나 한국사회의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핵발전이 뿌리를 내리고 사회를 변형시킨 과정을 세밀하게 추적한 것은 아직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 학술서와 전문 르포의 경계를, 연구자와 운동의 참여자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려 하는 이 책의 시도는 참신하고 시의적절하지만 다소 위태롭다. 경계를 넘고자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할 경계가 딱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위험경관을 탄생시킨 국가의 전략과 반핵운동과의 상호작용, 그것의 역사적 변화 등에 대한 서술이 제한적이라 핵발전이라는 위험경관의 탄생이 다소 평면적으로 그려진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러 퍼즐 조각들이 아직 읽는 자들이 채워야할 몫으로 남아있다. 이 책을 시작으로 한국사회에서의 핵발전의 역사와 문제를 밀도있게 파헤친 후속작들이 이어지길 기대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 시리즈가 하루 속히 한국 탈핵의 역사로 종결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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