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원이 연기하는 천재 작가 에드워드 담슨이 세상에서 사라진 후 그의 배다른 아들 필립은 아버지의 전기를 완성하기 위해 생전의 아버지가 마지막을 한 그리스 티라 섬을 찾는다. 아버지의 아내인 헬렌을 찾아가서 아버지의 행적을 캐묻는 가운데서 필립은 아들인 자신이 몰랐던 아버지의 행적을 퍼즐 맞추듯 짜맞춰 간다. 아들 필립이 28년 동안 살아오면서 알지 못했던 아버지의 행적을 되살리며 아들은 차츰 경악하기에 이른다. 아들은 아버지의 어떤 모습 때문에 경악하는 것일까.

<고곤의 선물>을 집필한 피터 쉐퍼의 작품 가운데에는 ‘초월자’를 표상하는 작품이 많다. <에쿠우스>에서 알런과 질의 육체가 마굿간에서 뜨겁게 접촉하려고 할 때 알런에게만 들리는 환청은 환각이자 동시에 남녀 사이의 교접을 간섭하고 통제해오던 중세 시대 신의 현현이다.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부여된 천재성을 끊임없이 신에게 질문하고 불공평하게 생각한다. 신이 직접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살리에리는 신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하고 대답을 듣기를 바란다.

▲ 사진 Ⓒ박정환
<고곤의 선물> 역시 페터 쉐퍼의 여느 작품처럼 초자연적 존재에 천착하기는 마찬가지다. 에드워드 담슨에게 희곡의 영감을 제공하는 이는 사람이 아니다. 에드워드 담슨에게 문학적인 원천을 제공하는 이는 다름 아닌 초월자다. 혹 어떤 이는 1막과 2막에서 제시되는 흰 옷을 입은 한 무리의 환영이 에드워드 담슨의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착시로 규정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초월적 존재로 말미암은 천재적인 영감을 부여잡지 못했다면 에드워드 담슨은 월세만 밀리다가 아내와 결별하고 말았을 찌질한 작가로 전락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드워드 담슨의 문학적인 천부성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초월자로부터 받은 문학적인 영감을 종이에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어쩌면 그가 종이에 옮겨놓은 희곡들은 초월자가 폭포수처럼 부어주는 문학적인 영감을 겨우 소주잔만한 에드워드 담슨의 쉐마, 이름 하여 도식의 틀에만 담았을지도 모른다. 초월자가 제공하는 천 분의 일, 아니 만 분의 일의 영감만 종이에 적었을 뿐인데도 객석과 평단의 찬사를 얻었었다.

<고곤의 선물>이 상정하는 초월자는 문학적 영감을 제공하는 초월적인 영감이 다가 아니다. 에드워드 담슨의 아내 헬렌도 초월자 역할을 한다. 에드워드 담슨이 헬렌을 만나기 전까지는 불완전한 존재, 스스로를 제어하지 못하는 초라한 남자에 불과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담슨은 헬렌이라는 구원자를 만나고서야 문학적인 재능을 빛내기 시작한다.

▲ 사진 Ⓒ박정환
보석으로 치면 원석에 불과했던 에드워드 담슨이 보석으로 빛이 날 수 있도록 만든 건 헬렌이라는 세공사를 만나고서야 가능했던 일이라는 이야기다. 에드워드 담슨을 담금질하고, 세련되게 가공하고, 원석이 보석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게 만든 힘은 에드워드 자신의 힘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인 재능을 부여해준 초월자, 헬렌이라는 구원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담슨의 파멸은 휘브리스(hybris), 초월자를 초월자로 경외하지 않은 교만 때문에 초래된 일이다. 구원자인 헬렌을 아끼고 사랑하기는커녕 젊은 여성을 집으로 초대해서 아내를 욕보이고, 문학적인 원천을 제공해준 초월자의 영감에 감사하지 않은 죄로 말미암아 에드워드 담슨은 그가 내놓은 작품 <특권>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한다.

<고곤의 선물>은 두 초월적인 힘 덕택에 ‘희곡의 왕’으로 자리매김한 작가 에드워드 담슨이 그에게 문학적인 저력을 부여해준 초월적 존재에게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휘브리스, 교만으로 치달을 때 초월적인 존재의 분노를 사서 멸망으로 치닫는 한 남자의 하마르티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피터 쉐퍼의 작품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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