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라토리움의 청춘

하릴없이 빈둥거리고 천하태평인 사람을 가리킬 때 흔히 "먹고 자고 싼다"는 표현을 합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대학을 갓 졸업한 다마코가 자고 먹고 싸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이 짧은 시간에 어떤 인물인지 보인 다마코는, 아닌 게 아니라 취업을 하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와서 아버지와 지내고 있는 의욕상실인 상태입니다. 백수 주제(!?)에 감히 스포츠 용품점을 운영하는 아버지를 돕기는커녕 집안일도 전혀 하지 않습니다. 하다못해 요리까지 아버지가 직접 해서 다 큰 딸을 말 그대로 먹여 살리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도 다마코는 취업에 대한 의욕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모를 정도로 여유만만합니다. 인간의 기본욕구를 제외하고 하는 일이라곤 만화책 읽기가 전부입니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이상할 만큼 이런 다마코를 쭉 평정심을 유지한 채 관망합니다. 상영시간이 짧긴 하지만 거의 대부분 별다른 굴곡 없이 잔잔한 일상만으로​ 가득합니다. ​왜 취업을 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딱 한번 역정을 내는 것마저 "언젠가 하겠지만 지금은 아니야"라는 대답으로 매듭을 짓습니다. 텔레비전 뉴스를 보며 "일본은 글렀어"라고 막무가내로 비판하는 다마코를 바라보는 시선도 그 어떤 잣대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를 보는 관객으로서는 "노력 따윈 전혀 하지 않는 쟤가 비판할 자격이나 있어?"라고 불편한 심경을 가져도 무방한데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라는 제목을 살펴봐야 합니다. '모리토리움'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경제가 곤궁에 처한 국가에게 채무의 상환을 유예할 수 있도록 허용한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모라토리움을 선언한다면 경제가 파산에 이를 위기라는 걸 공인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 상환이 완전히 불가능한 지경이면 '디폴트'가 됩니다.

이와 같은 정의에 입각해 보자면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라는 제목에서 모라토리움은 두 가지의 대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전 세계적인 경제불황에 따른 일본이고, 다른 하나는 그 안에 속한 개인으로서의 다마코입니다. 물론 영화가 더 집중하고 있는 것은 후자입니다. 고로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기성세대의 입장에서 제목 그대로 다마코가 현재 모라토리움 상태라는 걸 기꺼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취업을 요구하자 "지금은 아니야"라고 했던 건 모라토리움을 선언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것으로 다마코는 아버지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도리와 빚을 갚을 수 있는 기간에 대한 유예를 요청한 것입니다. 실제로 아버지는 뒤로 갈수록 딸에게 따뜻한 다음을 갖고 있습니다.

족구 좀 하게 내버려둬!

저는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를 보면서 <족구왕>이 절로 떠올랐습니다. 두 영화는 지극히 어두운 현실을 바탕에 깔았는데도 불구하고 낙천성과 이상적인 기성세대의 입장으로 쌓아올린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의 아버지는 <족구왕>의 총장과 같습니다. 두 인물 모두 청춘을 응원하거나, 다분히 현실을 외면하는 행동을 하더라도 결코 강요와 압박과 설교를 하지 않습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마냥 속 편하게만 보이던 다마코도 실은 불안하고 난처한 인물이라는 걸 간간이 드러내면서 인자하고 관용적인 시선을 유지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는 말로 격려하는 것도 잊지 않습니다. 이런 '어른의 자세'에 부합하듯 다마코는 꼬박 1년을 인내해준 아버지에게 "합격!"을 통보합니다. 이제 다마코의 모라토리움은 자연히 소멸하고 조금은 성장한 어른이 될 것입니다.

마치 다마코의 일상처럼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시종일관 평이합니다. 그 와중에 종종 작고 엉뚱한 웃음을 유발하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다마코를 응시하는 시선을 놓지 않게 합니다. 이것으로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조용히 가르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진중하고 깊이 있게 현실을 파악하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으나,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는 그것을 비판하거나 조명하는 대신 청춘을 위해 기성세대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는 것이 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족구왕>의 리뷰에서 말했다시피 현실을 직시하고 변화시켜야 하는 것은 우선 기성세대의 몫이고, 다마코처럼 뭘 하지 않(못하)거나 뭘 해야 좋을지 몰라서 무기력한 청춘도 결국 기성세대가 쌓은 사회의 부산물이라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청춘도 청춘대로 노력해야겠지만 그들을 기다려주고 격려해주는 것 역시 우리 사회의 책무입니다.

★★★☆​

덧 1) 다마코를 연기한 마에다 아츠코는 빼어난 미모를 가진 건 아니지만 참 귀엽고 매력적이었습니다. 연기도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절로 반할 수밖에 없어 과거를 좀 캤습니다. 알고 보니 무려 그 유명한 'AKB48' 출신이더군요. 그것도 팀 내에서 넘버 1을 다투던 핵심이었습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신작이 초대됐다고 하니 방한했으면 좋겠네요.

덧 2) <에반게리온>을 보신 분이라면 저녁노을이 질 무렵에 공허한 하늘을 울리는 새의 지저귐을 아실 것 같습니다. <모라토리움기의 다마코>에도 동일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엔 없는 것 같은 이 새의 이름은 뭘까요?

덧 3) 밥 먹는 장면이 유독 자주 나옵니다. 이때만큼은 아버지와 다마코가 늘 한데 자리합니다. 반면 이혼한 어머니아는 한 번의 통화가 전부고, 집에 방문했던 언니 부부는 화면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가족'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습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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