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대선에서 <안철수의 힘>이란 제목의 책으로 안철수를 지지한 바 있는 강준만 전북대 교수가 이번에는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을 들고 나왔다.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이란 부제가 달려 있는 책이다. 책 제목이 들리자마자 호불호의 반응이 쏟아졌다. 책 내용과 상관없이 ‘싸가지’란 제목에서부터 긁히고 불편해 하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정반대의 여론도 있었다. 추석 연휴 직전, 서울시내 한 대형서점에서 그 책을 구입했을 때 바로 앞에서 한 중년 남성이 그 책을 구매하고 있었다. 이 책 제목은 ‘정권 교체를 열망하지만 현재의 야당에서 그 희망을 볼 수 없는’ 심리 상태에 빠져 있는 누군가들의 심정에 불을 질러 버린 측면도 있는 듯했다. 제목의 선정성에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겠지만, 긁히고 불이 나는 광경 자체는 지금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적인 반응들에 대해 대신 해명해 보면...
‘싸가지 없는 진보’란 조어에 이끌려 나오는 즉자적인 반응들에 맞서 이 책의 취지를 해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먼저 여기에서 언급되는 ‘진보’의 범위는 진보정당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왼쪽 세력을 포괄하는 의미가 아니다. 현재의 새정치민주연합에서부터 그 왼쪽을 포괄하는 범야권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용어를 잘못 썼다는 비판도 가능하겠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담론 지형도의 변화를 생각하면 충분하게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여겨진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 민주당 세력은 일정 부분 신자유주의 노선을 걸었다고 비평할 수 있으나, 보수정부 출범과 2009년 금융위기를 경험한 이후 상당 부분 그 노선을 왼편으로 옮긴 것이 현실이다.
그에 따라 야권 전체를 ‘진보’로 지칭하는 어법도 많았다. 여전히 ‘진보’를 ‘진보정당으로부터 그 왼쪽 세력’을 포괄하는 말로 한정하는 어법도 있겠지만, 그 어법만이 올바른 용례라고 말할 수는 없게 된 측면이 있다. 강준만 교수는 이 책에서 자신의 용례를 투명하게 드러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강준만은 책의 머리말에서 “민주당과 그 지지자들을 진보로 간주하는 것에 대해 자칭 ‘진짜 진보주의자’들은 펄펄 뛰겠지만, 상대적 관점에서 생각하기로 하자. ‘진쪼 진보주의자들’보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그들을 ‘가짜’라고 할 게 아닌가 말이다. 이젠 ‘좌파’라는 말이 널리 쓰이는 세상이 되었으니, 여기선 혼동을 피하기 위해 그런 ‘진짜 진보주의자들’은 ‘좌파 진보주의자들’로 부르도록 하자”(p10)라고 제안한다.
또한 강준만 교수가 ‘싸가지’라는 말을 끌어들였다 하여 그것만으로 ‘고루한 도덕관념을 고수하는 꼰대’로 몰아가는 것도 그의 문제의식을 무시하는 처사로 보인다. 강준만은 자신이 ‘싸가지 없음’ 일반을 비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잘못되었거나 낙후된 관행을 고수하면서 그걸 바꿀 뜻이 전혀 없는 집단이나 공동체에서 싸가지 있게 행동한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그 문화에 편입된다는 걸 의미한다. 싸가지가 없어야만 기존 문화에 도전해 변화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걸 ‘생산적 싸가지’로 부르기로 하자.

(...) ‘파괴적 싸가지’란 무엇인가? 이는 ‘생산적 싸가지’와 다른 종류의 것은 아니다. ‘생산적 싸가지’ 중에서 어떤 점이 지나친 나머지 자신은 물론 모두를 파괴로 몰아가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면 되겠다. 바로 이 ‘지나친 정도’를 판별하는 데에서 혼란이 생긴다“ (p24)
물론 ‘그걸 어떻게 구별하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강준만의 의도를 왜곡해서 무리한 비판을 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싸가지’는 이미 폭넓게 논의되고 있었다
정치 영역, 공적인 영역의 문제를 ‘싸가지’란 표현으로 분석하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비판도 책 내용을 훑어보면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책의 앞부분(p26~36)을 보면 그렇게 많은 논자들이 이미 야권의 문제에 관해 ‘싸가지’를 논했던가 싶어 놀라게 된다.
▲ 1일자 한겨레 21면 기사
2003년에 있었던 김영춘의 유시민에 대한 ‘싸가지’ 발언 이후에도, 2005년 열린우리당 회의에서 김성곤이 자성적으로 한 ‘싸가지’ 발언, 2006년 열린우리당 회의에서 양승조가 한 ‘싸가지’ 발언, 2007년 9월 고종석이 <한국일보> 칼럼으로 쓴 <‘싸가지 있는’ 정치를 위하여>란 글이 있었다. 그후에도 2007년 대선 평가 토론회에 나온 한양대학교 정상호 교수의 ‘싸가지’ 발언, 2007년 12월 <한국일보> 주필 임철순이 <‘겸손한 소통’의 시대로>란 칼럼에서 나온 ‘싸가지’ 발언 등이 있다. 열린우리당 출신들인 김부겸, 정성호 전 의원 등이 ‘싸가지’ 문제가 참여정부와 열린우리당의 문제 중 하나였다는 얘기를 했다는 보도도 있다.
대선 이후에도 시민사회 활동가 출신인 민주통합당 초선 의원 최원식이 2013년 1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과거 학생운동을 한 친구들조차 ‘민주당은 싸가지가 없다’고 한다”라고 했다는 발언이 있고, 2013년 12월에 출간된 대선 회고록 <1219 끝이 시작이다>에선 문재인 의원이 “우리가 이른바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것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적었다. 강준만은 심지어 “2014년 6월 16일 좌파 진보정당 미디어인 <레디앙>에 게재된 <‘싸가지’ 없는 야권, 새누리당 읍소 전략에 밀려: 진보정당 청년당원들의 6.4 지방선거 평가>엔 다음과 같은 진단들이 나왔다”라고 인용하고 있을 정도니, 이쯤 되면 강준만이 ‘싸가지’를 말한 것이 ‘싸가지가 없다’라고 되받아칠 근거는 전혀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새누리당은 싸가지가 있단 말인가?”라고 따져 묻는 시선이 있다. “우리가 적들보다 나쁘냐”라고 묻는,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에 만연한 되치기 방법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의 ‘싸가지’와 새정치민주연합의 ‘싸가지’의 문제는 전혀 다르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령 새누리당이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그토록 ‘인면수심’의 모습을 보이는데 어떻게 그들이 ‘싸가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느냐고 묻고 싶은 야권 지지자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권력을 지향하는 이권연합으로서, 여론이 나빠지면 납작 엎드리고 중도층이 그들에게 돌아온다 싶으면 고립된 이들에게 ‘막말’을 퍼붓는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새누리당의 ‘막말’을 부지런히 나열하면 이쪽의 ‘싸가지’가 더 좋아 보이겠지만, 강준만이 ‘싸가지 없는 진보’를 통해 지적하려 했던 문제는 그 부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동의를 하든 하지 않든, 새누리당과 같은 이권연합이 아닌 일종의 가치연합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야권이 자신들이 생각하는 도덕성에 동의하지 않는 집단에게 보이는 ‘싸가지’가 집권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 강준만의 문제의식이란 점은 인지를 하고 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진중권의 반론과 그에 대한 해명
책이 출간되고 보도되자 미처 내용이 알려지지 않은 책에 대한 것 치고는 지식인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는 2일 트위터에서 “상황을 좀 안이하게 보는 듯. 진보의 가장 큰 문제는 사회에 던질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라면서, “즉 진보든 개혁이든 김대중-노무현 이후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 진정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진 교수는 “즉 진보든 개혁이든 김대중-노무현 이후 ‘시대정신’을 읽어내는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이라면서 “싸가지 환원론은 비과학적이며, 심지어 보수적”이라고 논평했다.
▲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미학 오디세이'(전 3권) 20주년 기념판 발간에 맞춰 지난 1월 13일 서교동 휴머니스트 출판그룹에서 간담회를 열었다. (연합뉴스)
그러나 같은 날 CBS 라디오 <시사자키>에 출연한 강준만 교수는 진중권 교수의 주장에 대해 "저도 올린 글 전문을 봤는데 저하고 생각이 98% 같다.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감사를 표했다. 강 교수는 "다른 2%는 문제는 왜 여태까지 새정치민주연합이 메시지 중심의 진보적인 정책, 진보적인 이슈를 개발해서 유권자들에게 다가가지 못했는가, 그 원인이 뭐냐 하는 것"이라며 "그 원인이 바로 싸가지"라고 강조했다.
강 교수는 “새정치연합에서 응징과 심판 위주로 모든 것을 가져가다 보면 의원들, 또 거기 고급 인력들이 관심을 갖는 게 상대편의 흠집을 잡아내기 위한 네거티브 공세에 모든 열과 성을 다 바칠 것 아니냐"며 "응징·심판만 하느라고 대안 모색을 하겠냐? 자기들의 정책 개발에 열심히 하겠냐? 분노가 앞선 나머지 보수 응징하고 심판하느라 자기들의 콘텐츠가 약해져 버리는 문제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강준만 교수는 해당 책 4장 <왜 ‘심판’이 진보를 골병들게 만드는가?>와 5장 <왜 진보의 최대 약점은 도덕인가?>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의 전가의 보도인 정권 심판론, 증오 상업주의, 민주 대 반민주 구도 등을 비판하고 있다. 그렇기에 실제로 진중권의 지적은 강준만의 주장 속에 무리 없이 수용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싸가지 환원론은 비과학적”이란 진중권의 단언이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측면마저 있다. 정말로 강준만이 ‘싸가지’로 모든 문제를 환원한다면 우리는 그에 동의하기 어렵겠지만, 애초 이 문제에서 우리가 ‘과학’과 ‘비과학’을 따질 수 있을지가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정치 영역에서 유권자의 투표심리는 당연히 한 두 가지 원인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볼 때 ‘싸가지’로의 환원이 문제라면 ‘메시지’로의 환원도 문제인 건 마찬가지가 된다.
이처럼 애초에 ‘과학’을 말하기 어려운 영역에서 ‘비과학’을 들고 나온 것은 진중권 교수가 본인도 ‘시대에 낡았다’고 비판하는 마르크스주의의 어법의 잔재를 여전히 고수하고 있거나, 이성적인 논거만을 ‘과학’으로 추인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을거란 추정을 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람들은 비합리적인 이유로 정치세력이나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하기도 하고 신뢰를 거두기도 한다. 실제로 강준만 교수는 CBS 라디오 <시사자키>에서 "제가 새정치연합의 문제가 뭐냐고 물어보니 대부분 싸가지의 문제를 들었다"며 "진보적이라서 싫다, 진보적이지 않아서 싫다, 그 이념 이야기 안 한다. 정책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이슈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우선 싸가지의 문제를 든다"고 말한 바 있다.
물론 공정하게 말한다면 유권자들이 이렇게 발언했다 해도 그 속내는 다른 곳에 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유권자의 투표심리를 평가할 때 ‘싸가지’와 ‘메시지’는 질적으로 구별되지 않고 동등한 수준에 놓인다고 말할 수 있다. 합리적 근거로 정치세력을 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은 ‘당위’가 될 수 있을 뿐 문자 그대로의 ‘현실’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진중권 교수의 반응은 강준만 교수가 해당 책의 제 3장인 <왜 진보는 ‘감정’에 무능한가?>에서 비판한 “유권자들을 향해서도 논리와 이성 일변도”인 ‘과잉지식인화의 오류’(이는 노명우의 <세상물정의 사회학>에 나오는 논의의 재인용이다)에 해당하는 부분마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택광의 반박과 그에 대한 해명
문화평론가인 경희대 이택광 교수는 강준만의 ‘싸가지’론과 진중권의 ‘메세지’론을 둘다 비판하는 길을 택했다. 이택광 교수는 3일자 <한겨레>에 실린 인터뷰에서 “강 교수의 진단은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이에게 또 독을 먹이는 처방”이라고 지적했다.
이택광 교수의 논지는, ‘한국 사회 기존의 진보는 민주화를 도덕성의 문제로 봤고, 진보가 도덕성을 자신들의 역량으로 강조하며 저항을 미학화했기에, 진보가 조금만 잘못해도 보수보다 더 강하게 도덕적 비난을 받게 된 구도를 만든 것이 바로 진보’라는 것이다. 즉 강준만 교수가 문제 삼는 구도 자체가 ‘기존 진보’가 ‘도덕성’을 추구했기에 생긴 것이기에, 이에 대해 ‘진보의 규범을 재정립’하자는 것은 ‘독이 든 사과를 먹은 이에게 또 독을 먹이는 처방’이란 것이 이택광의 논지다.
▲ 지난 2011년 11월의 이택광 교수의 강연 사진 (오마이뉴스 윤지원)
그러나 이러한 지적은 강준만 교수의 논지에 대한 오해에 기반해 있다. 강준만이 말하는 ‘싸가지’는 ‘진보의 규범을 재정립’하자는 것이라기 보다는 그간 진보가 신경 쓰지 않던 규범에도 신경을 쓰자는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강준만은 기존 진보가 도덕적 우월감에 근거하여 유권자에게 호통치는 전략을 구사해온 것이 중도층 유권자 뿐만 아니라 기존 진보의 지지자에게도 피로감을 주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를테면 기존 진보가 자기 내적인 도덕성을 드높이지 않아서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도덕윤리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을 함부로 대했다는 것이 문제다. 또 강준만은 이처럼 자신의 견해에 반대하는 이들을 ‘절대악’으로 모는 지지자들을 먼저 확보하는 이가 정당 내부의 정치투쟁에선 유리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제가 구조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p47~52).
그리고 이것이 ‘진보진영’의 가장 큰 문제라는 점엔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런 문제들이 각종 인터뷰나 여론조사나 사람들의 반응을 통해 감지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 볼 때 강준만 교수의 주문이 애초 기존 진보의 문제를 배태한 그 ‘독사과’의 재투입이라는 이택광의 진단에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또한 이택광은 이어서 “진보는 다시 일상으로 가야하고, 일상에서 조직되고 있는 새로운 움직임들을 포착해야 한다. 일단 의회 민주주의 바깥의 정치들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논의하고 확장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라고 대안을 제시했는데, 이는 세부적인 관점에선 차이가 있을 지라도 강준만 교수가 해당 책 맺음말로 쓴 <‘풀부리 건설’만이 살길이다>의 논의와 포개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다만 이택광의 진단을 통해 다시 한번 드러나게 된 ‘싸가지’란 용법의 애매함이 있다. ‘싸가지’는 각자가 공유하고 있는 윤리의식이나 코드 등에 따라 다양하게 판단되게 된다. 당장 강준만의 <싸가지 없는 진보>란 책 제목이 ‘싸가지가 없다’고 느끼는 이들도 있다. 모든 이에게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는 이를 상상하기도 어렵다. ‘동지들에 대한 싸가지’가 있고, ‘같은 정당활동을 하는 이에 대한 싸가지’도 있으며, ‘중도층에 대한 싸가지’와 ‘적대세력에 대한 싸가지’를 모두 늘어놓을 수 있다.
강준만의 논의에서도 사실상 이 모든 것들이 다 등장한다. 그러나 이 경우 ‘모든 이에게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는 이’를 상상하기도 어렵듯이, ‘모든 이에게 일관되게 싸가지가 있는 이’를 상상하는 것은 쉽냐는 반론이 나올 법도 하다. 말하자면 그저 ‘싸가지’가 아니라 ‘누구를 향한 싸가지’를 물을 때는 ‘싸가지’의 덕목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는 결국 강준만의 문제의식과 주장의 취지에 소박한 수준에서 동의할 수 있을지라도, 그 ‘싸가지’의 문제들을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측면에서 점검하려고 할 때는 필요한 논의가 단지 ‘싸가지’의 차원에 국한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말하도록 하자.
박권일의 비판과 이에 대한 해명
칼럼니스트 박권일 역시 언론에 소개된 강준만 교수의 논의에 대해 비판적 논평을 했다. 2일자 <한겨레> 기사에 따르면, 박권일은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새누리와 새정치연합 사이의 소위 ‘중도층’에게 강준만이나 김규항이 다 진보인데, 결론적으로 ‘싸가지 없다’는 저 고급스럽기 짝이 없는 비판이 중도층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을 것 같지 않다. 되레 ‘저 자식들 정신 못 차리고 또 싸우네 어휴’라는 욕이나 안 들으면 다행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권일은 또 “바로 그 순간 강준만의 ‘싸가지’ 논변은 진보의 분열에 혁혁히 기여하며 자가당착에 빠진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박권일은 “강 교수의 정치적 세계관의 가장 치명적인 문제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인데,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 소비자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라며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수사는 평범한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렇지 않고, 시민들을 철저히 정치상품의 소비자로, 정치라는 장의 호객대상으로 고정해버린다”고 논평했다.
▲ 지난 2011년 7월 청년문제 심포지엄에서 발제를 하고 있는 칼럼니스트 박권일의 모습(오른쪽). 왼쪽은 1부 청년문제 심포지엄의 사회를 맡은 김재광 노무사다. (오마이뉴스 김세환)
박권일은 ‘싸가지’ 문제를 ‘생산자’인 정치인의 문제로 한정한 듯하다. 물론 강준만의 문제제기는 일종의 수권전략으로 봐야 하기에 충분히 그렇게 볼 소지도 있다. 그러나 강준만의 책에선 단지 정치인이나 지식인 뿐 아니라 극렬 지지자들의 문제도 지적되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강준만 교수는 박권일의 비판에 대해 억울한 면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한 그룹의 정치인과 지지자를 모두 비판하려 할 때에, 단지 ‘싸가지’의 문제를 말할 게 아니라 그들을 관통하는 의식체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
또 강준만이 이 논의를 통해 반드시 ‘시민을 정치의 주체가 아니라 정치 소비자로만 바라보는 민주주의에 대한 보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는지에 대해선 의문이 든다. 가령 강준만은 “우리가 여전히 신봉하는 민주주의가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날이 갈수록 ‘소비자 민주주의’로 변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p132)라고 소개한다. 그는 “인터넷과 SNS의 시대엔 이른바 ‘친근한 세상 신드롬’이 문제가 된다”(p132)면서, 민주당이 ‘세월호 심판’을 내세운 것에 대해 “민주당은 그런 문명사적 변화까지 몸소 막아보겠다는 야심을 품었던 걸까?”(p133)라고 개탄한다.
즉 강준만은 박권일의 생각처럼 ‘시민을 정치 소비자로만 바라보는 보수주의’를 견지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 정치 소비자가 되는 시대에 정치세력이 적응해야 한다는 현실주의’를 피력한 것일 수 있다. 아마도 강준만은 시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야 한다는 박권일의 주장에 흔쾌히 동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가 책의 부제를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로 잡고 그 문제에 천착하는 이상, 다음 대선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당면 과제는 시간이 오래 걸릴 ‘시민의 정치적 주체화’가 아니라 다른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가 전면에 내세운 ‘싸가지’론이 얼마나 ‘현실적인 대응’인지는 별도로 평가하더라도 말이다.
강준만이 문제제기된 것들에 대해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앞서 우리는 이택광의 반박에 대한 강준만의 입장을 해명하다가 “모든 이에게 일관되게 싸가지가 없는 이를 상상하기도 어렵다”라고 지적했다. 이는 단순한 ‘싸가지’가 아닌 ‘싸가지의 정치성’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박권일의 비판에 대한 강준만의 입장을 해명하다가 “그러나 한 그룹의 정치인과 지지자를 모두 비판하려 할 경우, 단지 ‘싸가지’의 문제를 말할 게 아니라 그들을 관통하는 의식체계의 문제를 지적해야 하지 않았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는 만약 특정한 정치세력의 의식체계에 대해 비판하려 한다면 ‘싸가지’와 같은 두루뭉술한 어휘보다 훨씬 정치한 분석이 필요하지 않겠느냐는 의문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한 번 강준만의 주장을 해명한다면, 그의 논의에 이러한 문제제기들에 대한 답변이 전혀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강준만의 ‘싸가지’는 ‘동료들 간의 싸가지’보다는 ‘같은 정당의 다른 계파에 대한 싸가지’와 ‘중도층에 대한 싸가지’, 그리고 ‘적대세력에 대한 싸가지’에 중점을 두고 있다. 애초 그가 “진보의 최후 집권 전략”으로 ‘싸가지’를 내세운 것이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라 봐야 할 것이다.
▲ 지난 2008년 11월에 강준만 교수가 연세대학교 연희관에서 <한국 근현대사 산책> 완간을 기념하여 특별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김영균)
또한 ‘특정한 정치세력의 의식체계’에 대해서도 그는 다양한 측면에서 비평을 했다. 이를테면 제 4장 <왜 ‘심판’이 진보를 골병들게 만드는가?>에서 특히 그런 논의들이 많다. <언제까지 선악 이분법 타령인가?>(p143~145), <운동권 출신의 ‘심판 아비투스’>(p146~147>, <삿대질만 하는 ‘울타리 안의 진보’>(p148~151), <운동권 체질의 자폐성이 심해지는 이유>(p152~153),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원하는 세상’>(p154~156), <진보의 언어는 ‘모욕’과 ‘쌍욕’인가?>(p157~160), <‘증오 마케팅’은 진보에 불리하다>(p161~163) 등 소제목만 봐도 논의의 내용을 짐작하게 할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선정적인 언어로 포장되었기에 이번에 널리 회자되었을 뿐 이는 강준만의 오래된 문제의식의 결과물로 보인다. 가령 강준만이 2007년 <한겨레 21>에 기고한 <‘고종석’식 진보주의를 위하여>란 글에서 고종석을 “가장 효과적인 민노당 지지자”라고 상찬했을 때, 그가 염두에 두었던 것도 이와 비슷한 얘기였을 것이라고 추정될 수 있다.
당내 계파문제를 피해 간 강준만?
‘운동권’ 의식에 대한 비판 역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많다.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기자는 윤여준의 책에 대한 서평을 쓰던 중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 독자들이 기자의 판단에 동의할 필요는 없다. ‘윤여준의 도덕성’이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어야 할 이유는, 이 땅의 야권세력이 대체로 7~80년대부터 ‘제도권’에서 벗어난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이며, 그 점이 너무 고착화되어 이 땅의 ‘통치담론’과 ‘피치담론’이 너무 멀리 있고, 그 덕에 간신히 승리하고 십 년이나 집권할 때에도 책 잡힐 일을 했고 지금은 마치 수권능력이 없는 이들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관료’ 출신을 쓰면 보수적인데, ‘관료’ 출신이 아닌 이를 쓰면 관료들을 몰라 관료에게 당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독재정권은 정당성이 없었다.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내란’ 세력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도 국가기구를 통해 발현된 공공성이 전무했던 것은 아니다. 권력을 사유화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권력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떠한 공적인 일을 했다. 경제성장이 이루어졌고 과실이 제대로 분배되지는 못했지만 가끔은 개혁을 하기도 했다.
아마도 윤여준 뿐 아니라 꽤 많은 사람들이 그 시절에도 정권의 부조리한 부분에는 눈을 감고, 자기 영역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공적인 가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자기 정당화를 했을 것이다. 기자는 그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어찌 어찌 평가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운동권들이 흔히 ‘민중’이라 부르는 그 사람들이, 민주화운동에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들보다 이런 사람들에게 더 감정이입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운동가보다는 관료나 경제인이 자신들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 줬고 그것을 잘 안다고 느끼곤 한다.
왜냐하면 생활인들 역시 대체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운동권들에겐 ‘80년 5월’과 ‘87년 6월’ 사이가 한 호흡이었고 7년 전 함께 봉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제야 일어선 것이 안타깝고 한스러웠겠지만, 그 7년 사이에도 사람들은 하루하루 먹고 일하고 살아가야 했다.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면 정권교체는 없다. ‘리스펙트’를 받아 마땅한 헌신적인 삶을 산 이들은, 그들끼리만 모여서 대화를 하다 보니 종종 이런 평범하고도 단순한 사실을 잊곤 한다. (...)“ (링크)
그러나 그렇다면 왜 강준만은 ‘운동권 의식’이 아닌 ‘싸가지’를 내세웠을까? 야권이 여권처럼 여론에 따라 말 바꾸기를 할 수 없는 입장에서, 문제의 본질은 단지 '싸가지'가 아니라 어떠한 '의식'일 수 있었는데 말이다. 강준만은 아마도 자신의 문제의식이 계파 간의 다툼에 함몰되지 않고 어떤 보편적인 문제제기로 받아들여지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박권일이 비슷하게 지적했듯이, 그래봤자 (그의 책에 시원해할 많은 독자들과는 별도로) 적어도 새정치민주연합 구성원 사이에서 강준만의 비판은 “안철수를 지지하던 한 지식인의, ‘친노 486’에 대한 비판”으로 소비되기 십상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표제에 ‘싸가지’를 내세웠더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당내 논쟁에 개입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 부분이 빠지다 보니 이 책은 소위 ‘정치덕후’들에겐 ‘중립을 가장한 교묘한 정파적 훈수’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이 커졌다.
강준만이 ‘싸가지’를 말하고 본인의 과거 글쓰기에 대한 ‘성찰’도 말했지만 문제의 기원을 말하지 않기에 사태의 핵심에 접근하기는 했으되 정확하게 포착하지는 않은 다소 ‘하나마나한 소리’에 머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에 존재하는 계파들은 이념·정책 성향에 따라 나뉜 것은 아니며 그때그때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측면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2003년과 2007년의 분당과 통합, 그리고 2012년 통합 과정에서 생긴 감정의 골에 기인한다. 이득에 의해 움직이는 정치인이 아닌 기존 야권의 지지층의 경우는 그 분열이 더 단순하다.
가령 현재의 제1야당에서 ‘친노’와 ‘비노’의 대립을 중심적인 갈등축으로 볼 경우, 그 기원은 분명히 2003년 민주당 분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서부터 2004년 대통령 탄핵에까지 이어지는 과거의 갈등에 있다. 강준만 역시 이 시기에 정치권에 실망하고 친노성향 지지자들의 비판을 받아 현실정치에 대한 구체적인 평론에서 한발 물러서게 되었다.
▲ 지난 5월 23일 오후 경남 김해시 진영읍 본산리 봉하마을 노무현 전 대통령 묘역에서 열린 '노무현 대통령 5주기 추도식'에서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의원이 추도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준만은 이 책에서도 “2003년 민주당 분당 때 분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분당 찬성론자들에게 호된 비난을 받았던 경험”(p118~119)을 얘기한다. 강준만은 “당시 비난을 받을 때는 쓰렸지만 나는 그때의 경험을 내 인생의 축복으로 여긴다”라고 설명한다. 그는 “어제까지도 나를 같은 편이라고 찬양하던ㄷ 그들이 민주당 분당에 반대한다는 이유만으로(물론 그 반대엔 당연히 노무현 비판이 포함되었다). 나를 수구꼴통으로 만들다니! 나는 그제서야 그간 내가 방관하고 외면했던 우리 편의 언어폭력에 대해 눈을 뜰 수 있었다”(p119)라고 회고한다.
강준만의 고백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는 이 지점에서부터 얘기를 했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야권 내 지지자간의 정치세력이 분화한 시점으로부터 양 측의 정치인식의 공과를 평가하는 것은, 비록 현재 정치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이들에겐 ‘흘러간 옛 노래’로 비칠지라도, 보편적인 담론에 의거한 자성적 정치평론보다 더 중요했던 것이 아닐까? 물론 '싸가지'는 그 자체만으로도 연습이 가능한 부분이 있겠지만, 진심으로 '싸가지'를 개선하고 싶었다면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의 우월함을 강변하는 그 각각의 정치의식들의 허점들을 파고 들어야 했던 것이 아닐까? 이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토록 많은 논자들이 ‘진보의 태도’에 관해 이미 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우리는 ‘관성적 성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말이다.
각 정파마다 ‘선악 이분법’은 있다
이 지점에서, 의도한 바는 아니라 여겨지지만 ‘강준만이 말하는 선악이분법’과 ‘강준만이 말하지 않는 선악이분법’의 차이가 중요해진다. 강준만이 ‘싸가지’의 문제로 포괄하는 야권 정치인과 지식인, 그리고 지지자들의 어법의 문제는 그들이 대체로 세상을 선악이분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이들의 세계관이 상당 부분 겹치면서도 일정 부분에선 차이를 보이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도 각 정파는 ‘선악이분법’을 고수하여 상대방을 악으로 몬다는 것이다.
가령 강준만은 자신이 분당에 찬성했단 이유로 받게 된 고난을 얘기한다. 그러나 ‘친노’와 ‘전통적 민주당 지지층’이 분화할 때 반대편에선 어떤 일이 펼쳐졌던가. 노무현 등 참여정부 세력은 그들에 의해서 ‘영남패권주의자’로 규탄당했다.
물론 그런 말이 쓰일 수 있는 맥락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참여정부의 어떤 측면이 호남차별 문제를 기반으로 정치의식을 형성한 이들에게 폭력적인 측면이 있었을지라도, 그들이 똑같이 ‘영남패권정부’라 칭한 독재세력과는 구분되는 점이 엄연히 있을 텐데도 비슷하게 취급당했다. 그들이 보기에 한국 사회의 중심적인 문제는 ‘영남패권’ 문제이므로, 이 문제에 투항한 이상 참여정부는 ‘TK냐 PK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전의 보수정부와 동일했던 것이다.
한편 ‘친노’와 ‘비노’가 분화하기 전 ‘민주당 지지자’와 ‘민노당 지지자’가 경쟁하던 2천년대 초반의 인터넷 공간의 상황은 어땠나. ‘민노당 지지자’ 중 상당수가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차이를 매우 좁게 셈한 것의 반대편에, ‘민노당’ 역시 ‘영남패권 정당’으로 부르는 민주당 지지자들의 어법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선 영남인 중 차마 한나라당을 찍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민주당을 지지할 용기도 없는 위선자들이 노동조합을 매개로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이 민주노동당의 본질이었으므로, 그들에겐 ‘민노당은 한나라당의 2중대’란 어법이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피해자 서사’에 의해 구성된 진보정치의 문제
좁게는 왼쪽에서 시작해 NL이든, PD든, 비노든, 친노든, 한국 사회의 진보진영의 제 정치세력은 대체로 자신들을 ‘피해자’의 위치에 전유했다. 국가권력에 의한 폭력이 만연했던 불행한 역사의 반영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자신들은 피해자이기 때문에 정당하며 자신들의 견해를 1mg이라도 거부한다면 이는 가해자의 논리에 합류하는 것이란 식의 어법이 횡행하게 되었다. 그 피해자의 범주엔 ‘운동권’을 넣을 수도 있고, ‘북한’을 넣을 수도 있고, ‘호남’을 넣을 수도 있고, ‘노무현이라는 아웃사이더의 기표’를 넣을 수도 있다. 한국의 진보가 유난히 민족주의적인 시선에서 일본 정부를 까칠하게 보는 이유도 그들의 의식체계에선 한국 진보는 일본 (제국주의)와 한국 보수에 의한 이중의 피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강준만은 과거 분화하기 전의 민주당 지지자(비노+친노)와 NL운동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이였다. 그러나 이들이 제각각 분화하면서 강준만은 진영주의의 미망에서 벗어났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진영 내부의 증오는 보지 못하는 것 같다. 심지어 그도 일정 부분 인지하듯, 자신과 일부라도 다른 의견을 고집스럽게 배격하는 그 논변들의 상당수가 그의 노력을 통해 파생된 안티조선 운동의 몇몇 논변의 단순화한 버전에 가까운데도 그렇다.
강준만은 2012년에 안철수를 지지하면서 ‘증오의 시대’를 종식하는 것이 시대정신이라 말했다. 물론 중도파가 지지한 안철수라는 인물은 산업화세대와 민주화세대의 분열을 극복할 수 있는 도구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안철수의 지지율을 지탱한 것이 그 중도파 뿐만 아니라 ‘친노’를 증오하는 그 ‘비노성향 야권지지자’이기도 했다는 것을 강준만은 못 본 것일까, 외면한 것일까?
비록 강준만은 2003년에서 2004년의 분화 이후에도 극단적인 견해로 나아가지 않았지만, 그 후 어떤 이들은 ‘친노’를 새누리당보다도 미워하게 되었으며 2012년 대선의 문재인 지지자와 안철수 지지자의 극한 갈등 뒤에 깔린 맥락도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기가 그렇게도 힘들까?
“싸가지 없는 진보는 상대편을 업신여기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새누리당과 보수를 숭배하거나 존경할 필요는 없지만, 그들을 존중해야 한다. 그런 마음과 자세의 터전 위에 서야만 민심을 제대로 읽는 눈이 트여 집권이 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집권 후에도 성공할 수 있다”(p245)는 책의 결론에 동의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강준만의 ‘싸가지’론은 결국 ‘중도층’을 넘어 ‘새누리당 지지층’으로까지 향한다.
그의 말은 원론적으로 볼 때 옳다. 하지만 세계관의 8할 이상을 동의하는 야권 내부의 정치지형도에서도 ‘선악 이분법’을 고수하는 이들이 세계관의 8할 이상이 차이가 나는 이들을 존중하는 것을 상상하기는 매우 어려운 노릇이다. 강준만도 그 사실을 알았다면, 보편적인 ‘싸가지’를 말하기 전에 야권 내부의 정치지형도와 그들 사이의 증오의 문제를 좀더 적극적으로 긁어냈어야 했던 게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든다.
그와 별개로, 강준만은 이 책을 주로 새정치민주연합을 대상으로 썼다지만, 그가 지적하는 문제는 전체 진보좌파 진영에 해당하는 만큼 진보정당 및 좌파운동 세력들도 참조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국회의원 자리를 둘러싼 이권이 개입하지 않았다 뿐 정당과 운동진영의 헤게모니를 둘러싼 제 정파들의 관성적인 투쟁이 무엇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해 이 논의들을 참조로 하여 성찰해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많을 지라도, ‘싸가지 없는 진보’란 수사가 우리 시대 진보진영의 문제를 곧이 곧대로 드러낸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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