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새벽 빗길을 질주하던 한 승합차가 갓길 방호벽을 들이박았다. 그 차엔 이제 막 활동을 시작한 데뷔 1년차 걸그룹이 타고 있었다. 지방 공연을 마치고 올라오던 20대 초반의 그녀들은 사고를 당했고 한 명의 사망자와 두 명의 중상자를 남겼다. 숨진 멤버 고은비씨와 중상자라는 권리세씨와 이소정씨는 어제 오늘 내내 검색어에서 상위권이다.

4일 아침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의 인터뷰에 응한 익명의 국내 연예기획사 대표는 이렇게 말한다. “그날 새벽 1시 반 정도면 웬만한 행사 스케줄이나 이런 게 다 끝나고 복귀를 하다가 사고가 난 걸로 보인다. 다음 날 분명히 스케줄도 있을 거고, 피로도 누적이 된다. 그러다 보니까 빨리 들어와서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는 시간을 갖기 위해서 (빨리 달린다). 그런데 또 회사 입장에서는 운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계속 로테이션을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니다. 늘 이렇게 바쁜 게 아니니까…” 그는 “언제든지 어느 곳에서 누군가는 분명히 또 당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라고 많이들 생각하고 있다”라고 연예계 분위기를 전한다.
4일자 <한겨레> 9면 기사도 그러한 구조적 문제를 지적한다. <‘스타’냐 ‘무명’이냐, 걸그룹 무한경쟁의 비극>란 제목의 기사에서 <한겨레>는 “한 해 가요시장에 쏟아지는 걸그룹은 50~60개에 이른다. 기존 걸그룹과의 경쟁까지 고려하면 무한경쟁에 가깝다. 신인 걸그룹은 지방의 작은 무대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가 없다. 한 방송사 예능 프로듀서는 ‘성인가수나 보이그룹은 나이트클럽이나 유흥업소에도 설 수 있지만 걸그룹은 소녀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 아무 행사나 뛸 수가 없다. 지역에 있는 대학 축제나 방송사의 작은 무대라도 부르면 가야 한다‘고 했다”라며 사건의 맥락을 설명한다.
▲ 4일자 한겨레 9면 기사
레이디스코드의 교통사고를 둘러싼 이러한 분석들은 세월호 참사가 ‘단순교통사고’라며 진상규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새누리당의 궤변을 생각하게 만든다. 세월호 참사를 어떤 의미에서 교통사고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새누리당이 말하는 ‘단순교통사고’의 의미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뿐 다른 주체의 책임은 없는 우연적 사건’에 가깝다.
그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뿐 다른 주체의 책임은 없는 우연적 사건’이란 시선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했던 한 걸그룹의 교통사고에서조차도 진실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와 레이디스코드의 교통사고의 차이가 있다면 후자의 경우 특별한 진상규명 없이도 그 사건을 둘러싼 구조적 원인이 드러나 있다는 것 정도다. 인프라가 잘 구축된 육지에서의 사고이기 때문에 정부 책임을 물을 소지는 없어 보이고, 자본주의 체제의 한국적 변용과 문화시장의 규모의 문제에서 파생된 문제라 뾰족한 대책을 마련하기가 어렵다는 지점도 있다.
굳이 육상에서의 교통사고를 세월호 참사에 가깝게 재구성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싱크홀’로 인해 생긴 백중 추돌사고 정도를 상상해볼 수 있겠다. 많은 자동차에서 웬일인지 에어백이 펼쳐지지 않았고, 관광버스의 운전수는 졸음운전으로 사망자를 키운다. 수백 명의 사망자들이 길바닥에 누워 있지만 구조활동은 펼쳐지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방치된 채 사망한다. 정부는 구조활동을 통제하지 못했고, 운송회사는 무슨 이유에선지 국정원에 보고서를 제출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육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볼 수는 없다. 또한 이렇게 상상해본들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맥락의 복잡성을 충분히 담아내지도 못한다. 우리는 아직 이 참사가 어떻게 발생했고 그들은 어찌하여 구조되지 못했는지를 명확하게 알지 못한다. 또 우리가 짐작하는 구조적 원인들에 대해서도 충분한 조사가 벌어질지를 확신하지 못한다.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를 원하는 이유, 그들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이 주어지기를 바라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상설특검으로 충분치 않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청와대와 관료조직을 제대로 수사할 수 없을 거란 우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왜 죽었는지를 아는 것’은 ‘사법적 책임이 있는 누군가를 처벌하는 것’보다 훨씬 포괄적인 조사가 필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대한민국은 새벽 빗길을 질주한 그 승합차처럼 빠른 템포로 질주하는 사회다. 그런 나라에서 수학여행의 짧은 여유를 즐기려던 아이들이 ‘흘러가는 시간’, 혹은 ‘살아가는 세상’을 뜻하는 이름의 배 속에서 죽어갔다. 그 후 제 삶의 시간이 멈춰버린 유가족들이 제발 함께 멈추고 돌아봐달라고 애원하지만, 자신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며 눈물을 흘리던 대통령은 입을 씻고 전폭적인 규제완화를 명령한다. 속도에 거추장스러운 것들은 모두 지우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달려가고 있고, 뒤쳐져서 죽은 이들은 ‘단순교통사고’에 의해 죽었다고 간주된다. ‘싱크홀’의 관리감독, 건축 인허가, 구조활동의 존재 여부, 구조활동에 대한 정부의 통제 등의 문제제기를 내놔도 정부는 운전사 몇을 살인자로 몰고 운송회사 하나를 박살낸 후 귀를 씻는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있을 뿐 다른 주체의 책임은 없는 우연적 사건’.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한 교통사고는 보여준다. 우리는 모두 이 사회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고은비씨의 명복을, 권리세씨와 이소정씨의 쾌차를 빈다. 안전한 사회를 꿈꾸는 건 우연히 아직까지 다치지 않은 남은 이들의 몫이다. 여기에 ‘진보’와 ‘보수’가 왜 필요할까. 일단은 ‘삶’이 있어야 ‘보수’할 것도 ‘진보’할 것도 생기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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