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이란 만화가 있다. 일본의 유명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인데,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었고 영화로도 제작되어 곧 개봉 예정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1960년대 후반, 동네 어린 아이들이 모여 ‘예언의 서’라는 지구 멸망 이야기를 장난스럽게 꾸몄는데, 그것이 세기말에 실제로 실현되어 지구가 멸망한다는 이야기다. ‘예언의 서’를 만든 아이들은 이제 어른이 되어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외로운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예언의 서’가 대한민국에서도 논픽션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난 2006년 늦가을, 일군의 어른들(강동순 전 방송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국회위원, 신현덕 전 경인방송 대표, 윤명식 KBS 공정방송노조 위원장, 모 프로덕션의 J 대표)이 한 일식집에 모여, 대선에서 정권을 쟁취한 후 해야 할 것들을 논의하였다. 오고가는 대화는 초등학생 뺨치게 원초적이고 말초적이다. 이른바 강동순 녹취록으로 전해지는 이 ‘예언의 서’는 오늘의 우울한 대한민국 방송가를 정확하게 예언했고, 더욱 무서운 것은 아직 예언 중 일부는 실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 예언의 서’라고 부를 만한 강동순 녹취록을 다시금 살펴보는 작업은 그들 블록의 놀라운 주도면밀함에 경탄하기 위함이며, 더 나아가서는 숨 가쁘게 진행되고 있는 방송 새 판 짜기에 대한 적절한 대응책을 구하기 위함이다. 그들의 녹취록에서 얻을 수 있는 10대 예언을 꼽아 세 차례 나눠 살펴본다.

1. 시사 보도 프로그램 기자/PD에 대한 대대적 압박

“걔네들이 안 해. 눈치 보느라고. 왜냐하면 추적 60분에 갖다 박은 PD들이 전부다 ‘정(연주)빠’거든. 시사보도, 시사보도 프로그램에 전부다 ‘정빠’들 잡혀있어. 그래서 관리자 1직급이상 부장급 노조가 필요하다는 게 뭐냐 하면 지금 선거 앞두고 무슨 드라마가 어떻게 됐든 무슨 쇼가 코미디가 어떻게 됐든 그런 거 다 필요 없고 시사보도 교양 프로그램,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PD가 누구냐가 제일 중요하다고. 시사보도 프로그램의 PD가 전부다 정빠란 말이야. 걔네들을 갖다가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은 부장급 이상밖에 없어요. 걔들이 어떻게 사악한 짓을 하는지 부장급 이상은 다 알거든. 그거 밖에는 방법이 없어.”

지난 9월 17일 늦은 밤, 정연주 사장을 대신한 신임 KBS 이병순 사장은 피의 보복 인사를 단행했다. 주요 내용은 그동안 진보적 목소리를 내며 자신의 취임을 저지했던 KBS의 인력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인사였다. 그 구체적 내용은 한국 PD 연합회가 다음날 발표한 성명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KBS PD협회장이자 본회의 회장과 방송인총연합회 회장으로서 ‘공영방송 사수’를 위해 그 누구보다 최선을 다했던 양승동 PD는 심의실로 인사 조치됐다. <KBS스페셜>과 <환경스페셜>을 통해 한미FTA, 유전자 조작식품 등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대변하고 알권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이강택 PD는 KBS 수원센터로 보내졌다. KBS 노조위원장을 지내고 최근의 ‘공영방송 사수 투쟁’에도 제 한 몸 사리지 않고 나섰던 현상윤 PD는 시청자센터로 발령받았다. KBS의 최우선 당면과제인 ‘수신료 현실화’를 위해 밤낮없이 일했고, KBS를 지키기 위해 촛불을 들었던 시민들과 그 누구보다 함께 했던 최용수 PD는 난데없이 부산으로 내쫓겼다.

PD들뿐만이 아니다. 공영방송 KBS의 위신을 세우는 데 탁월한 공을 세우며 KBS의 자랑으로 자리 잡은 ‘탐사보도팀’은 해체에 직면할 정도의 ‘숙청’을 당했다. 외국에서 선진탐사보도 기법을 배워 KBS에 도입함으로써 ‘탐사보도팀’의 산파 역할을 한 전 탐사보도팀장은 별안간 부산으로 보내졌고, 탐사보도팀의 주축 역할을 하던 기자들이 스포츠 중계 팀으로, 뉴스 네트워크 팀으로 하나둘 뿔뿔이 흩어졌다.

수신료프로젝트팀, DTV프로젝트팀 등에서 더 나은 공영방송 KBS를 위해 일했던 기술직 직원들은 양주로, 김제로 줄줄이 지방과 벽지로 내몰렸다. 높아진 KBS의 위상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해 일했던 홍보팀 직원들 또한 모두 어딘가로 내쫓겼다.”

2. 드라마/예능 프로그램 PD들에 대한 대대적 압력

윤명식: 지금 저기 어제 들었는데, 저기 저 드라마 PD들 지금 내사 들어갔답니다. 검찰에서.
강동순: 뭐 돈 먹은 거 있다고?
윤명식: 작가, 작가들이 돈을 그렇게 많이 먹는답니다. 드라마 작가들이.
J 대표: 걔들이 캐스팅을 하니까.
윤명식: 드라마 작가들이 탤런트들한테 돈 무진장 받아들여. 그래가지고 지금 검찰에서 내사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 드라마 작가들이 탤런트한테만 받겠어? 정권한테도 받아요. 일일연속극 보십니까? <열 아홉 순정>. 거기에 연변에서 온 아가씨 이름이 뭡니까?
강동순: 양국화.
윤명식: 양국화 아닙니까? 양극화라고 하는 정치적 레토릭을 그렇게 해서 작가한테 요청하는 거에요. 이거 한나라당에서 진짜 심각하게 보셔야 됩니다, 이거.
강동순: 그건...
윤명식: 예. 그래서 한나라당한테는 정말 아까 말씀하신 것처럼 방송에 관심을 무진장 가지셔야 돼.

최근 예능/드라마 PD 들에 대한 검찰의 대대적 수사가 이루어졌다. 9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연예기획사들로부터 로비를 받은 의혹으로 검찰 수사를 받아온 방송사 예능 부문 전ㆍ현직 프로듀서(PD) 9명이 사법처리 대상에 올랐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문무일 부장검사)는 22일 이 사건에 대한 중간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연예기획사로부터 소속 연예인들의 출연 청탁 명목으로 금품을 받은 이용우 전 KBS 책임프로듀서(CP)와 고재형 MBC CP를 배임수재 혐의 등으로 구속기소하고, 달아난 박해선 전 KBS 예능팀장을 지명 수배했다. 검찰은 또 경명철 전 KBS TV 제작본부장과 김시규 KBS CP 및 SBS 배철호 라디오국장 등 4명의 전ㆍ현직 PD들을 같은 혐의 등으로 불구속 기소하고 비교적 수수액이 적은 PD 2명은 약식 기소했다.” (경향신문, “검찰, ‘연예비리’ 방송사 PD 9명 사법처리”, 2008년 9월 22일)

PD들과 연예 기획사 간의 유착은 연예 산업의 고질적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고, 이에 대한 대대적인 시정은 마땅히 요구되는 바다. 허나, 문제는 그 수사의 시점과 수사의 목적이다. 위 녹취록은 이번 검찰의 수사에 대한 신뢰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그들의 손길은 예능/드라마에도 뻗어 있는 것은 아닐까?

3. KBS 노조의 무력화

강동순: 나는 그 동네 움직이는 것도 계속 모니터링 하고 있거든. 지금 정연주가 되는 거는 정해진 거지만 마지막 마지노선이라는 거는 노조를, 노조를 잡아와야 돼.
윤명식: 노조를 잡아놔야 된다구.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되거든.
강동순: 노조가 막강합니다. 내년 대선 때 노조가 제대로 들어서면 반은 정연주를 견제할 수 있어. 그러니까 이게.
유승민: OO한테 내가 그 이야기 했어. OOO한테 골프 치는데 “형, 나 노조위원장 나갈지도 몰라.” “야, 이 새끼야. 기자가 기사나 똑바로 써라. 무슨 노조위원장 나가노?” 이랬더니 “형, 나 할 수 없이 나간다.” 이카더라구. 어제 전화가 왔더라고. 내가 “야, 나갔으면 돼야 된다.” 무조건 되어야 되지.
강동순: 내가 박승규를 한번 만나볼까 하다가 안 만난 게.
윤명식: 만나지 마세요.
강동순: 만나면 괜히 쓸데없이 오해를 받아.
윤명식: 절대 만나지 마세요.
유승민: 우리끼리 만날게요.
윤명식: 제가 만나기로 했어요. 다음 주에 만나기로 했는데..
강동순: 지금 KBS 노조 매우 중요합니다. 국회의원 몇 분 당선되는 것보다 KBS 노조가요. 걔네들이 쌍권총이거든요. 채널이 두 개고 그러면 뉴스가 두 개에요.

정권이 KBS 정연주 사장을 몰아내고 방송을 장악하기 위해 전 방위적 압력을 펼칠 때 KBS 노조(위원장: 박승규)는 별다른 저항을 펼치지 않았다. 그들의 논리는 정연주 사장 역시 이전 정권의 낙하산 인사였기 때문에, 공영방송 KBS에서 물러나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었다. 다만, 정연주 사장의 후임 인사가 또 다시 정권의 낙하산 인사가 될 경우 그 때에는 공영방송 수호를 위해 총 파업을 벌이는 등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사실상 제스처에 불과했다는 것은 이후 이병순 사장이 취임 뒤 KBS 노조의 행보를 살펴보면 명확해진다. 그들은 “총파업투표에서 85.5%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했지만 그것은 낙하산 저지 총파업투표였다. 정치적으로 독립성을 지녔고 방송 전문인에다 도덕성에 문제가 없다면 낙하산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사실 김은구씨도 밀실 인사 논란만 없었으면 낙하산으로 규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병순씨는 이 범주에도 들어가지 않았으므로 낙하산으로 볼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를 펼치며 파업포기 선언을 했다.(노컷뉴스, “낙하산은 과학이 아닙니다. 정치입니다.” 2008년 8월 26일) 더욱이 이들은 신임 이병순 사장의 피의 보복 인사에 대해서도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그들은 동료 조합원들이 좌천되고 뿔뿔이 흩어진 그 이튿날, ‘정연주 사장 퇴진, 낙하산 사장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해단식을 치르기 위해 1박2일로 선유도로 떠났다.(미디어스, “선유도 회맛은 좋습디까?” 2008년 9월 19일) 현재 KBS 노조의 게시판은 무력화된 KBS 노조를 비판하는 누리꾼들의 댓글로 가득하다. 하지만 또한 온갖 성인광고로 도배된 KBS 노조 게시판은 얼마나 이들이 외부의 목소리에 둔감하고 자기 최면적인지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처럼 보인다.

4. 비판적 언론/언로를 옥죄기 위한 권력+검·경찰+사법부와의 블록 구성하기

윤명식: 아니 의원님. 정말 여러 가지로 바쁘시고 머리도 아프시겠지만 요게 저는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유승민: 잘 알아듣겠습니다.
윤명식: 내일이라도 손을 쓸 수 있으면…
유승민: 판사 이름이 뭐라고 해요?
윤명식: 판사는 아직 배정 안 된 것 같습니다.
신현덕: 내일 가서 좀 확인을 하셔가지고.
윤명식: 빨리 돼야 돼.
신현덕: 그럼 내일.
유의원: 요즘은 판사들이 하도 바뀌어 가지고 또 안 통하는 판사도 많고.
강동순: 돌아이들이 많아.
유승민: 젊은 판사는 좀 그런 게 있습니다. 판사들 요새 인사가 옛날하고 달라져가지고 좀 어떻게 잘 보여야 올라가는 그런 식으로 돼버려 가지고 판사들이.
강동순: 문제가 있구먼.
윤명식: 이거 반드시 해야 돼. 안 그러면 내년에. 이거 되면 정권을 찾아오는 데 일조할 수 있어.

광우병 관련 보도를 한 <PD수첩>에 대한 유래없는 검찰 조사는 현재진행형이다. 서울남부지법은 <PD수첩>에 정정 반론 보도 판결을 내렸다. 조중동 광고 중단 운동을 벌인 누리꾼에 대한 검찰 조사 역시 계속되고 있다. 정권의 취향에 반하는 언론/언로에 대한 검찰·사법권의 공안 정국이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홍성일: 서강대학교 신문방송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현 문화연대 미디어문화센터 운영위원. 같이 쓴 책으로 <글로벌 시대 미디어 문화의 다양성>, <PD 저널리즘>, <mbc, mb氏를 부탁해>가 있고 같이 번역한 책으로 <비디오 게임>이 있다. 논문으로는 <화폐 읽기>(공저), <일본 역사 만화의 문화정치>가 있다. 2008 한국 방송대상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몇몇 배짱이 맞는 곳에 고정, 비고정으로 대중문화 관련 생계형 글쓰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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