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해. 이게 무슨 엄마야. 너 내말 안 들어?! 조용히 안 해!!” “입 닥쳐. 성진우!!” 삐약 삐약 자지러지게 울음을 터뜨리는 아기의 목소리가 거의 절규 수준이라서 자리에서 튀어 올라 거실로 뛰어나왔다. 울음소리의 원인은 KBS 일일 드라마 ‘뻐꾸기 둥지’에서 친모에게 잡도리 당하는 아기 준우가 겁에 질려 내는 비명이었다.
“엄마, 이제 진우랑 같이 살 거죠?” 손이 귀한 정씨 일가의 살 떨리는 손주 진우가 커다란 봉제 인형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에서 사건은 시작된다. 보통 그 나이 또래의 남자 아이가 흥미를 가질 로봇 장난감이 아닌 분홍색 드레스 입은 공주 인형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뽀뽀를 하는 아이. 분명 평범한 풍경은 아니다. 하지만 아이의 입에서 나온 ‘엄마’라는 한 마디에 인형에 투영한 존재가 누구인가가 밝혀진 순간 소년의 인형놀이는 신파가 된다.
그러나 백연희의 아이를 낳게 해주겠다고 다가온 대리모 역할의 이화영(이채영 분)은 비뚤어진 울분으로 백연희 콤플렉스를 가진 중증의 피해망상 환자였으며 의뢰인의 난자를 자신의 것과 바꿔치기 하는 엽기적 범죄 행각으로 복수를 달성한다. 이를테면 진우의 존재는 불행의 씨앗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르는 백연희의 품은 뻐꾸기의 알을 품어주는 개똥지빠귀 둥지와도 같았다. 일체의 계산 없는 무한정의 사랑에 진우는 유독 엄마앓이가 심했다. 이런 진우에게 느닷없이 나타난 친엄마 화영의 존재는 혼란일 수밖에 없었다. 화영의 계략으로 연희 엄마를 잃게 된 진우는 이후 거의 매일을 소리 내어 울먹였다. 그저 연기일 뿐이고 화면 속의 아이일 뿐이지만 어쩐지 모르게 묘한 죄책감이 스몄다.
“엄만 이 세상에서 우리 진우가 제일 예뻐. 나도 우리 엄마가 제일 좋아. 우리 엄마 최고! 자. 그럼 엄마랑 뽀뽀. 그럼 나도 뽀뽀!” 공주 인형을 연희 엄마로 투영하여 아들과 엄마의 역할극 놀이를 하고 있는 진우의 모습은 제3자가 보기에도 측은하기 짝이 없거늘, 복수와 야욕으로 검게 물든 이화영의 심장은 측은지심 따위 느낄 여력이 없었나보다. “너 지금 뭐하는 짓이야.”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화영의 차디찬 목소리.
거칠게 인형을 잡아 빼들고 “우리 엄마야!”라고 악을 쓰는 아이를 “조용히 해. 이게 무슨 엄마야.”라며 으름장을 놓는데 아무리 함께 보낸 시간이 없다한들 둘 사이의 모자의 애틋함이란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너 내 말 안 들어?! 조용히 안 해!!” 아이가 아닌 신병을 잡도리하는 조교 같은 모양으로 고함을 질러대는 이화영. 눈의 여왕에게 잡혀온 카이의 모습이 이러했을까.
충격적인 전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위로 인형을 찢는 것도 모자랐는지 아이를 침대 위로 집어 던지고 그 작은 팔을 거칠게 잡아채 짓누르며 협박을 가하는 이화영. “성진우! 너 아줌마가 언제까지 봐줄 거라고 생각했어!” 이게 몸살 나게 아이가 애달픈 엄마라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이건 악역도 무엇도 아니다. 그저 정신이상자일 뿐이다.
“아이고, 저러다 애 잡겠다.” 같이 TV를 보던 부모님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며 혀를 찼다. 아니나 다를까. 진우역을 맡은 아이가 윽박지르는 이채영의 얼굴을 바라보며 새빨간 얼굴로 통곡을 하고 있는데 그게 연기인지, 아니면 실제 아역이 겁에 질려있는 것인지가 구분이 가지 않을 지경이었다. 성인이 보기에도 이토록 불편한데 같은 장면을 몇 시간이나 수차례 찍어야 했을 어린아이가 받았을 정신적 충격이 오죽했을까.
유사 엄마 아이템으로 그리움을 달래고 있을 때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또 다른 엄마. 폭군으로 돌변한 그녀가 과거의 엄마는 잊어버리라며 윽박지르고 아이템을 찢거나 밟아서 망가뜨리곤 아이에게 폭행을 가하는 모습 또한 오마주가 아닌가 싶을 만큼 똑같기 그지없다.
다만 ‘세 번 결혼하는 여자’의 채린(손여은 분)은 올곧은 정신 상태를 가진 사람이 아니었으며 아이에게마저 질투를 느끼는 영원의 미성년이라는 설정이 충분히 설득력 있게 전개되었기에 이 장면이 그저 자극을 위한 군더더기 설정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직접적으로 아이에게 폭행을 가하는 장면은 시청자의 상상력을 활용했을 뿐, 화면에서는 거의 비추어지지 않아 캐릭터가 아닌 그 아역의 심신을 걱정하게 하는 불편한 감정 따위 생기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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