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도, 명량, 해무. 그 사이에서 문 열기 전부터 쏟아지는 혹평에 숨 돌릴 틈도 없이 최저의 성적을 기록하리라 예상되었던 해적이 뜻밖의 선전으로 충무로를 놀라게 하고 있다. 25일 오후 4시 700만을 돌파한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의 흥행 속도는 날이 갈수록 힘이 빠지기는커녕 도리어 가속도가 붙어 1600만 관객의 명량의 기세에도 파죽지세로 치솟고 있는 중이다.

해적의 선전에 놀랄 수밖에 없는 것은 여름 방학 특수로 쏟아진 국내 영화들 가운데서 가장 모진 혹평에 시달렸던 작품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한판 붙어보기도 전에 쏟아지는 비판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모진 매를 맞아야만 했던 해적. 나는 충무로판 여름 방학 블록버스터의 첫 테이프를 이 작품으로 끊었었다.

해적에 쏟아졌던 비난은 150억을 쓰고 고작 코미디 영화를 만들었냐는 조소와 배우 유해진의 개인기 외엔 볼 것이 없는 작품이라는 두 개의 논조였다. 이미 일찌감치 이 영화를 보고 온 내게 사실 위의 비난들은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해적은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인 것도 맞고 배우 유해진의 장기가 빛나는 영화인 것도 맞다. 이 영화를 호평과 혹평의 두 가지 갈림길로 나뉘게 하는 것은 저 두 가지 사례를 단점으로 받아들이느냐 장점으로 받아들이느냐, 즉 온전히 관객의 가치관이 결정할 몫이다.

고려조의 옥새를 명나라에 반납한 이후 1392년부터 1403년까지, 무려 10년간 옥새를 갖지 못했던 1392년 이성계의 조선 건국 초기. ‘만약에 말이야. 그 옥새를 명나라에서 가져오느라 바다를 건너던 신하들이 거대한 고래를 만나 사투를 벌이던 도중 떨어진 옥새를 고래가 삼켜버렸다면?’ 영화 해적은 ‘만약에…’로 시작한 귀여운 상상을 역사적 사실에 버무린 판타지 어드벤처 퓨전 사극이다.

배신과 반목. 역사의 돌이킴에 사회 비판적인 요소까지 묵직한 소재를 싣고 가는 해적이지만 극을 아우르는 기본적인 정서는 코미디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니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라는 비판은 틀린 말이 아니지만, 극에 거는 기대를 하드보일드한 블록버스터 무비가 아닌 신명나는 모험 영화에 바로 맞추어 본다면 150억이라는 쓰임새에 의문을 품게 되진 않을 것이다.

옥새를 실어 명나라에서 조선으로 향하는 배는 그저 숨 쉬기 위해 물 위에 떠있을 뿐인 짐승이 나랏일 하는 사람의 심기를 거슬리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새끼 고래에게까지 무자비한 발포를 해대는 무식한 책임자를 운반하고 있었다. 고래 또한 조선에 속한 생명이라면, 땅에 발을 딛기도 전에 살육을 일으킨 피 묻은 옥새가 탐탁지 않은 것은 당연지사.

비록 바다의 도적일지언정 다친 고래의 상처를 쓰다듬을 줄 아는 해적선의 대단장 여월과 고래조차 삼켜버린 주권 잃은 옥새의 존재 가치를 상기하게 하는 산적 패거리의 두령 장사정의 산과 바다를 넘나드는 모험과 액션 그리고 사랑이 한편의 흥겨운 뮤지컬이나 극장판 애니메이션처럼 장대하게 펼쳐진다.

그러니 극장을 나서면 영화적 재미 이상의 선명한 즐거움이 있다. 만약 이 영화를 놀이 기구에 비유한다면 자이로드롭이나 바이킹의 짜릿함이 아닌 신밧드의 모험 (커다란 배를 타고 동굴을 탐험하는 이야기 형식의 놀이기구)이 주는 동화 같은 잔재미랄까.

해적은 분명 유해진의 개인기가 빛나는 영화인 것도 맞다. 가문의 재담꾼인 사촌형처럼 쉴 새 없이 입을 놀려 꿍얼꿍얼하는 그의 입담을 듣고 있노라면 도대체 어디까지가 대본이고 어디까지가 애드립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화 해적을 ‘유해진이 다한 영화’라고 평하기엔 다소 억울하다. 유해진이 아닌 다른 배우들 또한 제몫을 단단히 해주고 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 포니테일이 가장 잘 어울리는 것 같은 남자, 배우 김남길의 미래 소년 코난과 안장을 채울 수 없는 야생마 같은 매력.

거대 선단으로 바다를 호령하는 해적선의 대단장이라는 임무에 맞지 않게 다소 무겁고 둔탁해보이지만, 그럼에도 영화 클래식 이후 오랜만에 손예진스러운 미모를 자랑하는 그녀. 이젠 그가 안 나와도 기시감이 느껴질 만큼 21세기 이후 모든 영화에 출연하는 것 같은 이경영이지만, 타락한 수장 역할은 이 사람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되는 배우 이경영의 악역 변신.

어느 샌가 슬그머니 악역 전문 배우로 자리 잡은 김태우의 선량한 얼굴이라 더 서슬 퍼런 악의. 해적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캐릭터가 크고 작은 코믹 연기의 담당자지만 양대 산맥으로 웃음의 줄기를 이어가는 박철민의 웃음보 또한 유해진에 못지않다. 유해진이 만담하듯 주저리주저리 긴 설을 풀어놓으며 웃음을 유도하는 타입이라면 이 분은 끄트머리에 치고 빠지며 깔끔하게 폭소를 이끌어내는 타입이랄까.

제대로 문을 열기 전부터 쏟아진 영화 해적을 향한 잔인한 혹평. 논지 자체는 헛다리를 짚은 것은 아니었지만, 관점을 달리해서 본다면 150억을 들인 코미디 영화라는 수식어는 오히려 이 영화의 장점으로 와 닿을 수 있는 작품이다. 그다지 덥지 않았던 올해 여름 태양을 등지고 산과 바다를 누비며 모험을 떠나는 이들이 선사하는 대리 체험은 충분히 관객을 즐겁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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