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일가가 없는 삼성이 가능할까. 그 동안 장하준 캠브리지대 교수와 함께 ‘삼성 사회화’를 주장해 온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기획위원장이 국가지주회사를 만들어 이곳에서 ‘이건희 주식’을 소유, 관리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재용 부회장은 최소 6~7조에 이르는 상속세를 국세청에 납부해야 하는데 이중 일부를 에버랜드와 삼성전자 주식을 팔아야 할 상황인데, 이를 계기로 ‘사회적 통제’를 해보자는 이야기다.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은 지난 28일 투기자본감시센터와 사민저널, 좌파노동자회가 주최한 <삼성그룹 전망 토론회 ‘이건희 일가 없는 삼성그룹을 상상하라!’>에서 “삼성그룹이나 현대차그룹 같은 대기업집단의 상속과정에서 지배권이 투기꾼에게 넘어갈 경우, 한국경제 전체에 미칠 악영향은 가늠하기 힘들다. 재벌의 상속은 결코 ‘시장 논리’, 즉 ‘자본의 논리’에 그냥 맡겨놓아선 안 된다”며 국가지주회사, 공익재단, 국민연금을 활용한 ‘재벌개혁’을 주장했다.

삼성 사회화의 핵심고리는 총수 일가가 부담해야 할 ‘지배권 주식’ 상속세다. 한국의 재벌은 1~4%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데, 이 지배권 주식을 자식에게 넘길 경우 60% 이상을 상속세를 내야 한다.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은 “이론적으로 총수 후손들이 자기 돈을 들여 계열사 주식을 추가로 사들이지 않는 한, 상속증여에 의한 가족경영은 3세대가 마지막”이라고 설명했다. 1세대 주식 100%는 2세대에서 35%로, 3세대에서 10% 안팎이 된다. 이론 상 4세대에서는 한 자릿수 소액주주가 된다.

▲ 28일 토론회에서 정승일 사민저널 편집기획위원장이 삼성 사회화 방안을 발제하고 있다. (사진=미디어스)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은 총수 일가의 지배력이 줄어들면 다른 소액주주들의 입김이 강해지고, 특히 2003년 SK그룹 상속과정에서 소버린 펀드의 공격처럼 투기자본이 삼성그룹의 지배구조를 흔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삼성은 국민경제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주주자본주의’ 대신 국가가 삼성의 주식을 소유해 삼성에 개입해 ‘사회화’하자는 것이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 주장의 핵심이다. ‘재벌해체’가 아닌 국가 소유지분을 점차 늘려 이건희 일가를 조금씩 밀어내자는 이야기다.

“나와 장하준은 재벌일가와 재벌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대우그룹 해체를 보자. 과연 대우 해체가 진보적이었나. 노동운동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노동자 권력이 나타난 것도 아니고 대량 정리해고와 명예퇴직이 있었다. GM 같은 회사를 보라. 어떤 회사들은 투기펀드에 넘어갔다. 대우전자는 간신히 살아나왔다. 재벌 해체 이후는 경제민주화도 결코 아니었고. 자본주의를 뒤집는 것도 아니었다. 신자유주의 월가의 자본주의가 관통됐다. 착각을 해도 엄청난 착각을 했다. 진보와 언론도 마찬가지다.”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이 “재벌들의 탈법, 편법적인 경영권 상속”을 막자며 제안한 방법은 3가지다. △30대 재벌의 후계자가 국가에 상속세를 현물(주식)로 납부하면 이를 시장에 매각하지 않고 국가지주회사를 만들어 이곳에 이전한 뒤 경영권을 일단 인정해주며 개입하는 방법 △스웨덴 바렌베리 그룹과 독일 보쉬, 폴크스바겐 같이 공익재단을 재벌의 1대 주주로 만드는 방법 △지금도 이건희 일가보다 더 많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국민연금에 특별계정을 만들어 재벌에 개입하는 방법 등이다.

그는 재벌 의존도가 높은 한국경제에서 ‘재벌해체’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이 많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오히려 국가지주회사 등 ‘사회적 통제 장치’를 삼성에 투입해 그룹 체제를 계속 유지하면서 하청기업에 대한 착취와 노동조합 탄압 등을 저지하고, 장기 투자를 촉진하며 여러 가지 사회적 의무를 준수하도록 삼성그룹을 압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재용 등 재벌 3세가 무능하다면 ‘사회적 통제 장치’가 주주권을 행사해 이건희 일가를 조기 강판시킬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삼성그룹의 최대 대주주 역할을 이건희 일가가 아니라 공익재단으로 넘기자. 그리고 같은 공익재단이 삼성그룹 등 30대 재벌그룹의 2대 주주, 1대 주주가 되게 만들자. 지난 수십 년 간 국민들의 세금과 피땀으로 키워낸 30대 재벌그룹은 초수 일가 또는 주식투자자들의 사유재산이기에 앞서 우리 국민 모두를 위해 봉사하는 공익적 기업그룹이어야 한다.”

▲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사옥 출입구 중 하나. (사진=미디어스)

기존 진보진영 일부에서 제기하는 ‘재벌해체론’은 실현 불가능한 ‘구호’ 취급을 받았다. 정승일 편집기획위원장의 ‘사회화’ 역시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토론자로 참여한 김봉수 성신여대 교수(법학과)는 “(국가지주회사 방안은) 대기업 총수가 사망해 상속이 이루어질 경우 국가가 대주주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데, 그러한 제도를 운영하면 향후 거의 모든 대기업이 국유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고 본다.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것 같다”고 지적했다.

김봉수 교수는 ‘공익재단’의 경우도 상속세 면제가 핵심 쟁점이 될 것이라며 “한편 현재 설립된 각종 재단법인들의 운영실태를 볼 때 재단을 마치 사유재산처럼 인식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그럴 경우 오히려 재벌의 상속에 대해 상속세만 감면해주고 총수 일가는 재단 경영권을 장악해 마치 지주회사처럼 운영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국민연금 특별계정 방안에 대해서도 그는 “국민연금의 수익성 악화를 가져올 경우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국가가 재벌에게 경영권 주식을 담보로 현금을 빌려주고,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보호하자는 ‘보수적 방안’을 제안했다.

허영구 좌파노동자회 대표는 ‘국공유화’를 주장했다. 그는 스웨덴과 독일에서 공익재단 지배구조가 가능한 것은 ‘정권을 교체할 정도의 진보정당, 좌파적 시민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한국적 상황에서 이 같은 대안은 적절하지 않고, 오히려 탈세나 부의 세습을 위한 편법으로 활용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00대 경제 주체 중 다국적기업이 51개, 30년 간 상위 20대 대기업 중 5개만 존속하고 있는 점을 들어 “신자유주의에서 시장논리는 허구적이고 공정경쟁은 불가능하다. 재벌의 국·공유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투기자본감시센터 이대순 대표(변호사)는 “의학적으로 볼 때 다시 경영에 복귀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빈 공간’에 있는 삼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건희라는 중요한 변수 중의 하나가 발생했는데 삼성은 물론이고 정부, 여당 보수언론 그 누구 하나 이 문제를 얘기하고 있지 않다”며 “방안 한 가운데 거대한 바위돌이 있는데 그들 모두는 바위돌이 없는 듯 행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다. 위험한 징조일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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