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45일간 단식농성을 진행하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 김영오씨가 단식을 중단한 다음날인 29일 일간지들은 이를 계기로 세월호특별법 관련 정국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을 가졌다. 그러나 일부 상식을 벗어난 보수언론은 사실상의 색깔론을 제기하는 등 몰상식한 보도행태를 이어갔다.

▲ 경향신문 29일자 1면.

<경향신문>은 이날 1면에서 김영오씨의 단식이 세월호특별법 제정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면서 정치가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일부 보수언론과 극우단체가 극단적 행위를 통해 김영오씨와 유가족을 모욕한 사례를 들며 한국사회의 문제가 그대로 드러났다고 진단했다.

▲ 한국일보 29일자 1면.

<한국일보> 역시 이날 1면에서 세월호 참사의 아픔에 국민들이 공감하는 집단적 정서가 표출됐음에도 이를 사회발전의 동력으로 이끌어 낼 리더십을 찾아볼 수 없었다면서 세월호특별법이 정쟁거리로 전락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평가했다. 다시 집단적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면 국가 개조와 적폐 해소는 불가능하다는 진단이다.

▲ 동아일보 29일자 3면.

하지만 <동아일보>는 같은 날 위의 신문들이 지적하고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를 그대로 반복하는 시대착오적 행태를 보였다. <동아일보>는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에 참여한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이 한미FTA나 제주해군기지 등의 한국 사회 주요 갈등 상황마다 나타나서 극단적 투쟁을 일삼았다고 보도했다.

▲ 동아일보 29일자 사설.

<동아일보>는 같은 날 <야권, 세월호 빙자한 ‘정치투쟁 좌판’ 그만 치우라>는 사설을 게재해 문재인 의원의 단식과 ‘야당 강경파’, 위의 시민사회단체를 연결시켜 “민심이 몽둥이로 변하기 전에 세월호를 빙자한 정치 투쟁의 좌판을 거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쯤되면 거의 협박이다.

보수언론과 이들이 운영하는 ‘종편’들은 김영오씨의 고향과 금속노조 가입 사실 등을 들먹이며 ‘불순한 의도’라는 말도 안 되는 프레임을 계속해서 제기해왔다. <동아일보>의 오늘자 지면 보도는 이러한 프레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겨운 얘기지만 정치적 지향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 ‘순수한 시민’은 민주주의 사회에 있을 수가 없다. 그는 그러한 지향을 투표를 비롯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지속적으로 드러낼 것을 제도적으로 요구받고 있기 때문이다. 특정인의 정치적 지향과 이와 연관된 활동을 그의 ‘존재’ 자체와 연관지어 문제삼는 것은 근대 계몽주의의 상식과도 충돌한다. 순수하지 않은 음험한 의도를 갖고 매사에 접근해 여론을 호도하는 것은 <동아일보>가 지목한 일군의 ‘운동권’들이 아니라 오히려 언론권력이다.

▲ 동아일보 29일자 기사.

<동아일보>가 같은 날 지면에서 애국가를 3도 낮춰 부르자는 서울시교육청의 방침을 ‘전교조의 음모’로 규정한 한 바이올리니스트의 주장을 기사화 한 것은 앞의 맥락과 연결지어 볼 때 거의 상식이 없는 수준의 행위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동아일보>는 해당 기사에서 서울시교육청의 반론을 전하면서도 애국가 음역의 조정이 애국심 고취에 영향을 준다는 주장이 있는 만큼 음역을 어떻게 조정할지 심층적 논의가 필요하다는 등의 주장을 인용하고 있는데, 애국가의 시작음을 미로 하거나 도로 하거나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전문 가수의 독창이라면 조옮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성별이 다르고 목소리도 제각각인 사람들이 여럿 모여 합창을 하는 용도의 악곡을 조옮김 하는 것이 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그야말로 천박한 의도의 기사라고 밖에는 평가할 수 없다.

이 날은 <조선일보>도 비슷한 수준의 천박함을 내보였다. <조선일보>는 김영오씨의 주치의인 서울동부병원 내과과장 이보라씨가 통합진보당 소속 대의원 경력이 있다고 보도했다. 노골적으로 주장하고 있지는 않지만 앞서 <동아일보>와 비슷한 관점에서 이들이 무슨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식의 여론을 유도한 것으로 보여진다. 차라리 솔직하게 ‘빨갱이’라는 단어를 꺼내는 게 이들 신문에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 조선일보 29일자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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