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로야구 넥센히어로즈 이장석 대표(가운데), 염경엽 감독(왼쪽), 이택근 선수가 아이스버킷챌린지에 동참하고 있다.ⓒ연합뉴스

부러웠다. 아이스버킷챌린지

유명하지도, 그렇다고 유명한 사람을 알지도 못한 주제에 이런 상상을 해 봤다. 혹시 누가 나를 아이스버킷챌린지(이하 물벼락 행사)에 지목하지 않을까. 일어나지도 않을 비현실적인 쓸모없는 고민을 해봤다.

그랬었다면 난 다른 사람처럼 웃으면서 물벼락을 맞을 수 있었을까? 워낙 사교성 없는 소극적인 성격 탓에 물벼락을 맞지 않을 것 같다(혼자서 물벼락을 맞으며 동영상을 찍는 건 어려운 일일 것 같다). 그렇다면 ‘쿨하게’ 기부를 했을까. 요즘 자금 사정이 좋지 않은 편이고, 후원하는 단체도 여러 개라 한 달에 나가는 돈들이 조금 부담스런 형편이다.

그래서 아마 그냥 지정되었어도 무시했을 것 같다. 나 말고도 많이 하는 것 같으니. 유행에 조금 뒤쳐진다고 뭐 어떤가. 어렸을 적에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를 받고도 귀찮아서 찢어버렸다.

혹시 누가 왜 동참하지 않냐 굳이 묻는다면, 지금 이 세월호 시국에 어떻게 웃으면서 그럴 수 있느냐는 한 마디 정도는 했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루게릭병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게 되어서 좋은 일이라 생각한다. 물벼락 행사에 관한 나의 생각은 이 정도이다.

사실 물벼락 행사를 지켜보면서 부러운 마음이 먼저였다. 지정되는 사람들 보면 전부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아 저들 끼리는 서로 저렇게 모두 아는 사람들이구나. 유명인들의 사회적 네트워크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 지 살펴볼 수 있었다. 게다가 ALS 협회는 작년에 비한다면 엄청난 모금을 했다고 한다. 주변의 비영리기관에게 우리도 이런 거 한번 기획해보자고 말하고 싶었다. 자금난에 어려워하는 기관이 주변에 너무 많다. 가장 부러웠던 것은 세월호를 잠시 잊을 수 있거나,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았는데도 웃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날 내 타임라인에서는 물벼락행사와 일일동조단식이 동시에 올라왔다. 참 혼란스러운 대한민국의 2014년이다.

피로감은 있지만 성공한 마케팅

관심이 생겨 물벼락행사에 어떤 논의가 진행 되는 가 찾아보기도 했다. 헐리웃 배우들, 아이돌 여가수들의 섹시버전부터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한 김영웅씨의 아이스 버킷까지, 자기과시와 홍보성이라는 비판 중에서도 개념 연예인들이라 이야기하는 등 여러 사례가 많았다. 역시나 찬성과 반대(까지는 아니더라도)의 논란들 사이에 이를 중계하는 기사들을 보면서 각각의 입장을 이해하며 수긍할 수 있었다. 요약하면 기부하는 것은 좋은 것인데, 너무 요란한 건 아니냐는 불만이 있다. 세월호에 대한 피로감이 있는 사람이 생겼다는 것처럼 물벼락 행사에도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생겨지고 많아지는 것 같다.

사실 나는 물벼락행사 같은 기부 행사 혹은 행위가 어떻게 사회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이런 움직임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효과에 관해 관심이 있다. 우리 사회에서 기부는 좋은 행위이고, 이를 통해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킬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부란 행위가 수반되지 않는다면 제 비영리 등 3섹터의 운영이 어려운 구조이기도 하다. 기부의 필요성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 기부는 활발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특히 순수한 기부라는 행위가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여러 의심을 품어왔다.

마르셀 모스(Marcl Mauss)는 증여론 등에서 고대 사회에서 부터의 기부행위를 분석하면서, 기부행위가 실제로는 상응하는 대가를 항상 요구하는 경제적 교환행위의 일종이라고 생각하였다. 실제로 이번 물벼락행사에서 참여한 유명인들에게 이번 행사의 참가는 유명세를 확인하고 확대하기 위한 홍보비라 생각될 수 있다. 이번 행사에도 어떤 사람은 루게릭병 환우들에 대한 행사 취지와 달리 변질되었다고 우려하였다. 하지만 모든 기부 행위가 순수하지 않다는 모스의 입장으로 이야기한다면, 이번 행사는 상징적 교환행위가 적절하게 교환된 사례라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러한 행사가 치러질 수 있는 기반은 소셜네트워크라는 시스템 내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는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계층적으로 연결되어 있고, 이러한 연결의 동력은 자기과시이다. 물벼락행사는 사회 구조(society)에 대한 관심이기 보다는 관계적인 소셜(social)의 행위의 수준에서 사회적인 것(The Social)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어떤 매체에서 지적하듯, 루게릭병의 근본적인 치유에 관한 의료시스템(의료 민영화 등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부분이나 기여라는 측면보다는 기부하는 자들의 사회적관계를 재설정하는 즐거움에 초점을 맞췄다는 의미에서 사교적인 행위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전환에 지나치게 비판적일 필요는 없다. 성공한 쿠테타를 처벌하지 않았던 것처럼, 결과적으로 환우들에게 일정 정도의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면 성공한 마케팅도 지나쳐 버릴 수 있다. 어차피 소셜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사회적인 것의 소비가 더욱 중요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 난치 희귀병을 앓고 있는 김영웅 씨는 세월호 참사 특별법 통과를 촉구하며 아이스버킷을 해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찰나의 소비, 기부행위에서 찾을 수 있는 순수성과 현실

모스는 기부라는 행위가 발생하기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의 윤리지수나 사회의 도덕지수가 높아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이 유행은 현대 사회의 윤리나 도덕이 높지 않음을 드러내주었다. 루게릭병의 문제에 대해서 그 동안 알지 못해서 이러한 기부가 이뤄지지 않았던 건 아니다. 루게릭병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은 존재하고, 더 많은 소외계층도 있다.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으나 충분히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번 행사에서 열심히 참여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기부라는 행위가 이뤄지기 위해선 어떤 계기가 필요하게 되는데, 그러한 계기는 어떤 사회적인 공감이나 연대의식이 아니라 ‘재미’를 통한 ‘참여’가 결과적으로는 더욱 효과적임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강제적으로 ‘지정’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기부행위에 쉽게 참여하지 않는다는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번 행사에 참여자가 많은 이유는 단순한 재미와 취지에 대한 동감이 아니라 관계적 자본과 윤리적 강제성이 수반되었지만 일탈행위를 통해 발현되며 소비되었기 때문이다. 바타이유(Georges Bataille)는 기부란 행위를 일종의 광기로 보았고, 이러한 형태의 기부야 말로 기부의 순수성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물벼락행사는 사회적 광기를 타고 진행되었고, 어차피 지속적이지 않을 테니 자체는 순수한 형태로서 받아들일 수 있다. 한계를 인정한다면, 기부를 통한 도덕적 변제에 대한 부담이 없는 유희 차원으로 머물러준다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은 없다.

소셜네트워크의 가장 큰 특징은 이슈를 소비하고 그 소비의 시간도 찰나적이라는 것이다. 데리다(Jacques Derrida)에게 있어 순수한 기부 행위는 그야말로 짧은 순간에만 존재한다. 물벼락행사는 곧 잊게 될 것이고, 이러한 형태를 흉내 낸 또 다른 기부 행사도 잠깐 동안 유행하면 좋겠다. 이러한 유행들이 번져 진다면 어려운 비영리기관이 조금 숨통을 트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잠시 잠깐 시간을 소비하는 이러한 기부 행위들이 사회에 대한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가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다.

기부가 사회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사회의 변화도 일정 정도의 시간의 누적을 통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기부 행위는 일시적이거나 혹은 자기 책임을 변제하는 행위이기에 부차적인 노력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나 혹은 기분을 변화시키는 정도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 특히 다양한 사회문제가 다양하게 벌려져 있는 사회에서 어느 특정 이슈가 이번처럼 부각된 다면 사안의 중대성에 대한 심각한 논란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지난 몇 일간 세월호의 특별법 문제보다 루게릭병이 더욱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처럼 보였고, 많은 참여가 있었다. 이는 어떤 문제를 중심 의제로 삼는 것에 따라 사회라는 타자의 문제 설정에서 일정 정도의 방해하는 효과를 지닌다. 기부를 모금 행위는 어떠한 의제 설정을 통해서 발현하는 마케팅의 형태로 이뤄진다면 그 의제 설정에 있어서 신중하거나 지속성을 가져야 할 것이다.

앞으로 지켜봐야 할 부분은 의도와 과정이 어떻든 기부행위가 발생했을 때, 실제로 그 효과가 어떻게 진행되는지에 대한 이차적 관심이다. 앞선 모스나 바타이유, 데리다와 같은 철학자들은 기부 행위 이후에 오히려 자신이 기부했다는 사실을 망각하는 편이 더욱 순수한 기부행위에 가깝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이는 기부를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뿐 사회라는 여러 개인이 구성된 불순한 형태의 시공간에서 기부 행위를 순수한 의도에서 멈추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기부를 통해서 우리의 경험이 상처받은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IMF시절 ‘금모으기 운동’으로 만들어진 ‘함께일하는재단’이란 공익재단은 대표와 사무국장은 사회적 책임 없이 공금을 허투루 쓴 사건이 알려졌다. 이렇게 기부를 국가 체계의 지배와 위기관리 차원에서 동원으로 활용되었던 사례가 많았을 뿐 아니라 그 관리조차 투명하지 않았던 사례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의 기부 행위가 어떠한 사회적인 변화로 이어지는 지를 지켜보는 것은 중요하다.

또한 기부란 사회의 실패를 유지시키거나 혹은 책임을 방기하는 형태거나 그 자체만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기에는 한계가 명확하다는 지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부란 행위는 (경제적으로는) 비정상적인 행동에 가깝다. 그런 행동의 순수성에 대해서 비난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이미 세금이란 형태의 강제적 기부를 하고 있는 국민의 입장에서 개인적 기부가 아니더라도 의제를 설정하여 국가가 책임지게 만들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을 제정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는 무책임한 정부에 살고 있다는 정치적 현실을 고려한다면, 사회변화를 위해서는 기부 이외에 참여할 수 있는 다른 방법도 동시에 고민하여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문화연대 웹진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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