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는 환경에 대한 불확실성을 줄이고 그 환경에 적응해 생존하려는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태어났다. 예컨대 ‘비바람 부는 날은 신께서 노하셔서 불벼락을 내릴 가능성이 높으니 집밖으로 나다니지 말라’ 따위가 그 원형인 셈이다. 동서고금이 하나다. 현대의 기업화된 상업 언론이 적극적으로 위기를 다루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오늘도 신문지면과 방송뉴스에는 위기의 현실이 지옥의 묵시록처럼 재현되고 또 재현된다.

하지만 상업 언론이 다루는 것은 위기 자체가 아니다. 다만 ‘위기의식’을 ‘전시’할 따름이다. 위기의식은 물신화된 위기다. 상업 언론은 위기를 위기의식으로 상품화한다. 위기의식은 수용자에 의해 소비되고, 상업 언론은 이를 재화로 환수한다. 이 때문에 위기는 위기의식의 끝없는 재생산을 위한 미해결의 상태로 유예되고, 또다른 위기의식이 새로 전시된다. 그래서 상업 언론이 위기를 끝낼 해법을 제시해주기를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 9월17일치 조선일보 경제 1면

상업 언론을 통해 비친 미국발 금융 위기는 느닷없다. 제 아무리 인과관계를 들이대며 필연성을 강조해도, 이 사태가 언론에 등장하는 과정은 깜짝쇼에 가깝다. ‘헐값에 세계 일류를 인수할 수 있는 기회’ ‘금융 세계화의 문이 열릴 것’이라며 산업은행의 리먼 브러더스 인수를 부추겼던 <조선일보>가 시치미 뚝 떼고 “거대 투자은행들의 말로는 브레이크 없는 ‘돈의 질주’가 어떻게 끝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일갈한 것은, 너무 전형적이어서 되레 싱겁다. (▷참고 기사 : 조선일보는 조선일보에게 말하라)

‘조선일보는 시치미 떼기의 1인자’라는 딱지는 따지고 보면 가시 면류관이다. 좀 따갑기는 해도 ‘상업 언론의 문법에 가장 탁월하다’는 곡진한 헌사다. (상업 언론은 선정주의 언론과는 다른 개념이다. 상업 언론의 일부가 선정주의 언론, 옐로페이퍼일 뿐이다. 기업으로서 영리행위를 하는 모든 언론, 그러니까 KBS·MBC는 말할 것 없고 한겨레·경향신문도 상업 언론의 범주에 든다. 조선일보가 한겨레·경향신문보다 탁월하다면 대단한 칭찬 아닌가.)

시치미 떼기는 위기의 상품화·물신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날마다 새로운 위기의식이 소비되려면 반드시 망각이 필요하다. 위기의식은 이성의 영역으로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되고 감성의 영역에 잠시 머무르다 무의식 영역에 백업 파일로 축적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동원되는 장치가 전두환 정권 시절 3S(섹스/스포츠/스크린) 같은 시치미 떼기, 둔갑술이다. 폭압의 현실을 ‘강물엔 유람선이 떠 있는’ 천국 같은 ‘아, 대한민국!’으로 바꿔놓는.

▲ 9월19일치 조선일보 사설

1면을 위기의식으로 가득채운 신문은 안쪽에 어김없이 3S와 가십을 배치한다. 삼엄한 표정으로 현실을 개탄하던 뉴스 앵커는 느닷없이 옅은 미소를 살포시 머금고 주말 나들이 얘기로 넘어간다. 공영방송이 짓밟히던 날도 그 방송은 반드시 베이징 올림픽 메달수를 집계해, 흥분한 표정으로 보도해야 한다. 상업 언론이 재구성한 세상은 파블로프 박사의 거대한 실험실이다. 수용자는 냉탕과 온탕을 오가며 소비욕망의 조건반사를 일으켜야 한다.

미국발 금융 위기가 보도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지난해부터 반복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렇게 보면 상업 언론의 이번 보도가 느닷없다는 건 틀린 얘기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상업 언론은 위기를 보도한 것이 아니라 위기의식을 팔아왔다. 지금은 위기가 훨씬 심화됐고, 상업 언론도 그만큼 위기의식을 강화해 보도하고 있다지만, 시치미 떼기와 둔갑술은 예나 제나 마찬가지다. 반복된 보도란 정작 들켜서는 안 되는 느닷없음이었을 뿐이다. (개는 밥그릇을 보는 대신 종소리를 듣고 침을 흘려야 한다.)

조선일보 말마따나, 이번 위기는 “지난 20여 년간 승승장구해온 미국식 금융의 허망한 붕괴”다. 미국식 금융이란 달리 말해 시장을 ‘신’의 자리에 앉힌 신자유주의 신화에 기반한 돈놓고 돈먹기 식의, 아니 가상의 장부 놓고 돈 빼먹기 식의 천박 금융자본주의 결정판이다. 그렇다면 국내 경제정책과 개인의 위기 대처법은 적어도 미국식 금융을 따라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 그러나 상업 언론은 이 심각한 위기에서도 한강에 유람선을 띄우라고 주문한다.

▲ 9월18일치 중앙일보 E6면

시치미 떼기의 1인자 조선일보는 “리먼브러더스 파산과 산업은행 민영화는 별개”라며 “산은을 민영화해 투자은행으로 키워낸다는 계획도 그런 방향에 맞춰 충실한 대비책을 세워나가면 된다”고 설교한다.(19일치 사설) <중앙일보>는 지난 18일치 ‘중앙경제’ 섹션 E6면에 “금융위기 큰 파도 지나 지금이 주식 살 때”라는 어느 투자금융사 부사장의 편지까지 소개한다. (기도하고 헌금하면 천국행 티켓을 거머쥔다.) 여전히 이들 신문에서의 위기의식은 독자 매수를 위한 ‘페티시’일 뿐이며, 위기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사적 차원의 망각으로 해결할 문제다.

이번 미국발 금융 위기가 개인 투자자들이 쪽박을 차고 일부 기업이 피떡이 되는 수준에서 정리된다면, 상업 언론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3S와 더불어 공적 영역의 사유화를 위한 신자유주의 ‘747 폭탄 돌리기’의 속도를 높일 것이다. 국민의 의식을 병들게 하는 공영방송, 그들의 선동에 부화뇌동하는 철부지 누리꾼들, 미래의 경쟁력을 절멸하는 전교조와 평준화 교육, 우리 경제를 침몰시킬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각종 규제, 한반도를 지금 당장 불바다로 만들려고 하는 북한정권…. 팔아먹을 위기의식이야 넘쳐나고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하지만, 시기가 문제일 뿐, 폭탄은 반드시 터진다. 혹시 지금이 그때가 아닐까? 폭탄이 터지면 그때 가선 뭘 팔아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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