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단행된 사원 인사와 관련해 KBS 기자협회에 이어 중견 PD 52명이 비판 성명을 발표했다.

90년 4월 서기원 낙하산 반대 투쟁을 벌였던 이들 PD는 19일 ‘공영방송 사수의 깃발을 다시 세우며’라는 제목의 성명을 내어 “KBS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여느 때보다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조직의 핵심을 장악하고, 설상가상 노동조합마저 개인의 영달을 위한 도구로 전락해 한줌도 안 되는 저들의 손에 의해 조직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다”며 “많은 선배들이 흘린 피와 땀의 희생으로 세운 공영방송의 가치와 제도가 또 다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오늘, 우리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공영방송 사수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자 한다”고 선언했다.

▲ 18일 KBS 사원행동이 본관에서 '이병순 관제사장의 광기어린 인사 전횡에 대한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참세상 유영주

이들은 이번 사원 인사에 대해 “가위와 핀셋으로 환부를 도려내듯 해당자를 찍어내는 그 정확성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라며“말로는 화합과 동참을 말하면서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이번 인사는 저열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고 비난했다.

이들은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방송인으로서의 정체성이요, 자존심”이라며 “이제 우리는 방송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올곧게 바로 세우기 위해, 그리고 공영방송 사수와 사내 민주주의를 위해 강력하게 싸워나갈 것임을 천명한다”고 밝혔다.

다음은 이들이 발표한 성명서 전문이다.

공영방송 사수의 깃발을 다시 세우며

시퍼렇게 날 선 칼끝이 우리의 목을 겨누고 있다. 공영방송 제도 자체가 권력과 자본의 욕망에 의해 와해되기 일보 직전의 위기에 처한 것이다. 정부여당은 국가기간방송법을 통해 예·결산권을 틀어쥐고 KBS를 순치시키고, 광고를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2TV를 떼 내는 것도 검토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공영방송을 축소시켜 사회적 환경감시 기능을 죽이고, 재벌과 시장에 친화적인 미디어 환경으로 새판짜기를 하겠다는 것이 집권여당의 미디어 정책으로 보인다. 바야흐로 공영방송 사수가 구호가 아닌 현존하는 급박한 위험으로 우리에게 바짝 다가와 있는 것이다.

이렇듯 공영방송 KBS를 난도질하려는 외부의 적은 시시각각으로 우리의 목을 죄고 있는데, 우리의 경영진은 아무런 입장도, 계획도 밝히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내부는 어떠한가? 정권의 낙하산을 타고 온 관제사장은 부사장 인사에서부터 직원발령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편가르기 코드 인사로 일관하고 있다. 이는 명백한 인사권의 남용이며, 상식에 대한 배반이다. 팀장 인사에서 제작능력, 리더십, 선후배간의 신망 등은 별 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일부를 제외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오로지 ‘판갈이’, ‘논공행상’, ‘끈’뿐이다. 군사정부 시절에도 이런 인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KBS 역사상 최악의 인사라는 말이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측근에 둘러싸여 눈멀고 귀먹은 사장에게 널리 인재를 구하라는 요구는 너무나 가혹한 주문이었나?

특히 사원 인사에서는 마치 가위와 핀셋으로 환부를 도려내듯 해당자를 찍어내는 그 정확성에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사장의 출근거부 투쟁에 앞장섰던 사람들, 불법적인 이사회 논의를 저지하기 위해 사복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던 직원들, 코비스를 통해 회사를 걱정하는 글을 올렸던 사람들, 사원행동의 대의에 공감하고 참여했던 사람들이 이번 보복인사의 희생자들이다. 말로는 화합과 동참을 말하면서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이번 인사는 저열함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이제 인사는 만사라는 진부한 언사는 쓰레기통에서나 찾아야 될 것이다.

KBS 역사상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여느 때보다 무책임하고 부도덕한 자들이 조직의 핵심을 장악했다. 설상가상으로 강력한 견제세력으로 존재해야 할 노동조합마저 개인의 영달을 위한 도구로 전락했다. 한줌도 안 되는 저들의 손에 의해 조직의 미래가 흔들리고 있는 형국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얼마 전 후배 기자와
피디들이 용감하게 나서서 의로운 목소리를 내 주었다. 선배로서 정말 눈물이 나도록 고맙고 부끄럽다.

다시 입사 시절을 생각해 본다. 20여 년 전 비록 땡전뉴스, 편파방송으로 각인된 이름이었지만 우리는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으로 KBS를 선택했다. 한국사회가 민주화되면서 KBS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90년 4월 투쟁을 거치면서 우리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KBS에서 자행되고 있는 야만과 부도덕을 목격하고 있다. 공영방송을 시장에 팔아넘기고, 정권의 애완견으로 삼고자 하는 노골적인 기도가 자행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선배들이 흘린 피와 땀의 희생으로 이제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상식으로 굳어졌다고 믿었던 공영방송의 가치와 제도가 또 다시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는 오늘, 우리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공영방송 사수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자 한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방송인으로서의 정체성이요, 자존심일 것이다. 내 일터에서 자행되고 있는 불의에 맞서 당당히 싸우지 못하고 냉소와 무기력에만 숨어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 대한 부정이자 배반이다. 이제 우리는 방송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올곧게 바로 세우기 위해, 그리고 공영방송 사수와 사내 민주주의를 위해 강력하게 싸워나갈 것임을 천명한다.

2008년 9월 18일 뜻을 같이하는 15, 16, 17기 PD들

(15기)
국은주, 김영진, 김인호, 김해천, 박중민, 송재헌, 심웅섭, 우종택, 이강현, 이기원, 윤찬규, 허태원

(16기)
강원호, 경기수, 김광준, 김동훈, 김영두, 김영한, 김창범, 박일성, 성수일, 심상구, 양승동, 윤한용, 이금보, 이기홍, 이석진, 이연식, 이영철, 이완희, 이용우, 장영주, 전보원, 최우철, 표만석

(17기)
공광일, 공용철, 곽한범, 권혁만, 김덕재, 김득수, 김원용, 박기완, 박종성, 박형노, 이강택, 이광록, 이도경, 이만천, 이종윤, 조해달, 홍성협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