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밤 10시 이후 KBS 안에서는 구성원들의 분노가 들끓고 있다. 하지만 자연을 벗삼아 유독 한갓진 시간을 보낸 구성원들이 있으니, 다름 아닌 KBS 노동조합 집행부다. 이들은 ‘정연주 사장 퇴진, 낙하산 사장 저지를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해단식을 치른다며 1박2일 동안 전북 선유도에 다녀왔다. 이병순 사장이 일명 ‘한밤의 피의 보복 인사’를 단행한 바로 이튿날부터다.

우연이겠지만, KBS 창사 이래 최악의 인사라는 평을 받고 있는 ‘사건’이 벌어진 직후, 그것도 이 사태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연주 사장 퇴진’의 성공을 자축하는 자리가 아름다운 서해바다 한가운데서 열린 것은 절묘했다. (KBS노조는 “패러글라이딩은 낙하산이 아니다”는 식의 궤변으로 이병순 사장의 ‘착지’를 기꺼이 받아들였으니 ‘낙하산 사장 저지’도 함께 자축했는지 모를 일이다.)

▲ 박승규 KBS 노조위원장 ⓒ서정은

KBS노조의 ‘1박2일’ 여정은 어디까지나 사전에 계획된 일정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원이기도 한 사원행동 사람들에게 보복인사가 단행된 바로 다음날 홀연히 바다로 떠난 건 분명 큰 문제다. 해단식은 언제 해도 할 수 있다. 아무리 사원행동 쪽과 생각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들에게 가해진 보복인사에 대해 KBS노조가 떠맡아야할 책임은 없는가? 조합원의 이익과 이해에 복무해야 하는 것은 노동조합의 가장 기본적인 책임이 아닌가?

이번 인사에 대한 세간의 평은 혹독하다. 원칙도 법도 없는 인사라는 평에서부터 군사독재시절에도 이런 인사가 없다는 평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경악 일색이다. 무엇보다 정해진 절차규정을 어긴 인사다. 그러나 인사 전횡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KBS노조는 입장 표명조차 없었다. 명백한 ‘배임’이다. 나아가, KBS노조의 묵인과 방조가 있었기에 이번 인사가 가능했던 것은 아닌지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KBS노조는 이번 사태의 ‘원인’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 체제 아래에서 조합원의 배타적 이익만 챙기려는 노동조합들의 보수화 경향이 적잖은 우려를 낳고 있다. 하지만 KBS노조는 보수화를 뛰어넘는 새로운 경향을 보여줬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조합원의 이해는 뒷전이고, 오로지 집행부만을 위한 노조라는 점에서 그렇다. 노동대중의 타락이 아니라 몇몇 개인의 타락일 뿐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위안을 찾아야 할까.

요즘 KBS에서 가장 잘 나가는 예능 프로그램이 ‘1박2일’이다. 유명 연예인 6명이 1박2일 동안 옥신각신 갖은 고생을 다하며 웃음을 선사한다. 시청자들의 웃음을 유발하는 코드는 그들이 보여주는 인간적인 면모다. 그런 면에서 KBS ‘1박2일’은 따뜻한 휴먼 코미디라고 할 수 있다. 그 프로그램 장면들에 KBS노조의 1박2일 선유도행이 겹치면 절로 웃음이 난다. 하지만 그 웃음은 쓰디쓴 웃음이다. KBS노조의 ‘1박2일’은 웃지 못할 코미디,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코미디다.

마지막으로 KBS노조 집행부가 군산 선유도에서 먹었을 생선회 맛이 과연 좋았을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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