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과 <팅거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드디어 <모스트 원티드 맨>을 보고 왔습니다. 유이한 상영관이 둘 다 집에서 1시간 30분 이상 떨어진데다가, 제가 선호하는 극장은 개봉일 부터 하루에 딱 두 번만 상영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 며칠 동안 비가 그치질 않았던 것까지 겹쳐서 저의 귀차니즘을 더 강화시켰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이게 단지 저의 미약한 의지 때문인 건지, 아니면 환경의 문제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꽤 오랜 시간 끝에 <모스트 원티드 맨>을 기어코 봤습니다. 넋두리는 이만 집어치울게요.

북미 박스 오피스 소식에서 말했다시피 <모스트 원티드 맨>을 기다린 이유는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2010년에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던 <아메리칸>의 안톤 코빈이 연출했다는 것, 둘째는 2012년에 올해의 영화 중 하나로 꼽았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처럼 존 르 카레의 소설이 원작이라는 것, 마지막 셋째는 얼마 전에 생을 마감한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포진했다는 것입니다. 이 셋의 조화는 다행히 <모스트 원티드 맨>을 아슬아슬하게 본 보람을 갖게 했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만큼은 아니지만 <모스트 원티드 맨>도 제법 복잡한 이야기를 갖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풀자면 이렇습니다. 영화의 배경은 911 테러 이후 테러리스트의 온상으로 급부상하여 전 세계의 정보부가 예의주시하고 있는 함부르크입니다. 독일 정보부 소속인 군터는 터키와 러시아를 거쳐 밀입국한 무슬림인 이사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를 쫓으면서 군터는 인권 변호사인 애너벨과 유력 은행장인 토마스가 이사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까지 밝혀냅니다. 자연스레 두 사람에게 접근하고는 협조를 요청해 이사를 잡으려고 하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모스트 원티드 맨>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나 <아메리칸>과 공유하는 바가 있습니다. 피아식별조차 쉽지 않은 비정한 스파이의 세계를 다뤘다는 것에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와 겹쳐진다면, 그 속에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군터의 내면을 조명한다는 것에서는 <아메리칸>과 일맥상통합니다. 둘 중에서 안톤 코빈은 전자를 다소 소홀히 하는 반면에 뒤로 갈수록 점진적으로 후자에 큰 비중을 두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은 전개가 느린 것에서도 안톤 코빈의 전작과 유사합니다. 대신에 이 영화 역시 피도 눈물도 없을 것만 같은 세계에서 '이상적이진 않지만 현실적인 올바름'을 지키려고 하는 군터를 애지중지 다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아메리칸>이 암살자를 내세운 스릴러로 가장한 인간적인 드라마였던 것처럼, <모스트 원티드 맨>은 비록 불법적인 임무수행으로 존재를 알리지 않는 기관에 일하면서도 최소한의 인간성은 잃지 않으려고 하는 자의 고군분투기에 가깝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사의 이민을 도우려고 했다가 졸지에 정보부와 얽히는 애너벨과 냉철하기 그지없을 것처럼 침착한 성격을 유지하는 군터 사이에는 커다란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군터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 모종의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던 미국 CIA 요원이 그에게 했던 말입니다. 대체 이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의 답으로 나온 말이었습니다. 이 상투적인 대사에서 안톤 코빈의 <모스트 원티드 맨>이 품고 있는 평범한 것 같지만 예사롭지 않은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비인간적인 행위를 저지르는 것마저 용인해도 되는가?" 또는 "지금의 현실은 흑백논리에 치우친 이분법적인 사고만이 통용되는가?"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질문이 더는 새롭지 않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습니다. 다만 <모스트 원티드 맨>에는 비슷한 주제의 영화들과 조금은 다른 것이 있습니다. 보통은 사건을 풀기 위한 단서를 얻는 데 필요한 관계의 형성이 물리적이고 강압적인 것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에 초점을 맞추곤 합니다. 이와 비교해서 <모스트 원티드 맨>은 인간관계의 본질로 좀 더 들어갑니다. 마치 <님포매니악>에서 섹스로 전개하는 과정을 낚시에 비유했던 것처럼 <모스트 원티드 맨>의 인물들도 낚고 낚이는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습니다. (실제로 극 중에서 낚시에 비유하는 대사도 나왔습니다) 그 와중에도 군터는 폭력과 강압을 사용하지 않고 설득과 이해를 전합니다. 즉, 설사 상대가 정보원이거나 미끼라고 할지언정 유대와 공감 등으로 얻은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그것을 지키는 신의를 중시하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인간적인 면모를 유지하려고 노력합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의 이것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분위기와는 사뭇 상반됐습니다. 군터도 미국은 물론이고 자국 내 다른 정보부와도 엎치락뒤치락하는 스파이의 세계에 있지만,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와 이상을 구분하고 지향하려는 선의를 품고 있습니다. 현실만이 아니라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간편하게 다루는 선과 악의 경계를 지우고 그 사이에 위치한 자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베이루트에서 있었던 사건으로 인해 쓰라린 상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을 지키려고 합니다. 반대로 보면 그것 때문에 지금의 가치관을 가지게 된 것일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중요한 건 이것이 테러의 만연으로 쓰러져 가는 세상에 필요한 덕목이자 혜안이라는 것입니다.

조금은 스파이 장르다운 긴장을 더 유발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은 못내 아쉽습니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장르를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만큼 지금의 <모스트 원티드 맨>은 드라마에 치중했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안톤 코빈이 적어도 스스로 세운 목적과 의도에 부합하는 연출을 보여줬다는 것에서 만족합니다. 어쩌면 <아메리칸>을 봤었기에 대비할 수 있었던 덕분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 군터에 집중한 나머지 그의 판단과 행동에 설득력과 당위성을 부여했어야 할 몇몇 인물의 묘사가 불충분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스트 원티드 맨>을 두고 '속 편한 이상주의자의 투정' 쯤으로 볼 여지도 있을 것 같습니다. 설사 그렇더라도 이 영화는 현시점에서 한번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덧 1)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의 연기는 명불허전입니다. 속을 알 수 없는 군터의 성격을 표정과 대사로 모두 소화합니다.

덧 2) 보기 전에도 그렇고 보고 나서도 그렇고, 왜 이 영화가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인 것인지를 도통 모르겠습니다.

덧 3)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아저씨들께서 나누시는 대화를 들었습니다. "아~ 복잡해. 머리 아프네. 우리 세상과는 너무 먼 얘기 아이가" 이 말씀 그대로 우리나라에서는 직접 피부로 체감할 수 없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네요.

스포일러 - <모스트 원티드 맨>의 결말은 꽤 인상적이었습니다. 군터는 자신의 계획을 감당(Handle)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이런 의지는 마지막에 압둘라 박사를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 운전하는 택시에 태운 것에 은유적으로 담겼습니다. 이내 이것은 독일 타 정보부와 미국 CIA의 개입으로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안톤 코빈은 이 장면도 굳이 군터가 출발한 후에 다른 차들로 길을 막고 들이받아서 저지하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압둘라 박사와 이사를 모두 잃은 것에 분노했지만 군터는 쓰러지거나 좌절한 채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다시 한 번 차를 몰아 정보부 건물로 돌아가면서 굴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모스트 원티드 맨>에서 우리가 진짜 유념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엔딩입니다.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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