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무엇도 아닌 배우의 연기 덕분에 두 번, 세 번 연거푸 보고 싶어지는 드라마 속 명장면이 있다. 네티즌은 이를 소위 플짤로 부르는 짧은 영상을 만들어 배포한다. 이런 영상은 한 번에 만족 못해 게시물 안으로 들어갔다 하면 수십 번을 연속으로 보게끔 하는 힘을 갖고 있다. 그게 바로 배우의 존재감이고 연기력의 힘인 것이다.

송윤아 또한 같은 플래시 이미지를 갖고 있다. 드라마 ‘온에어’에서 방송 작가로 분한 송윤아와 배우 김하늘의 불꽃 튀는 말싸움. 너가 잘났네! 내가 잘났네! 마치 슬럼가의 랩배틀을 방불케 하는 두 여자의 치열한 자존심 대결에 혀를 내둘렀다.

연기력만큼은 신인시절부터 남부럽지 않은 호평을 받아왔지만 특히 송윤아의 연기는 말싸움 할 때 참 빛났다. 김남주처럼 차가운 도시 여자, 커리어우먼의 영역을 다지고 있지만 귀엽게 신경질적이고 조금은 덜렁대는, 할리퀸 로맨스의 여주인공 같은 송윤아. 그래서였을까.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쫀득쫀득한 딕션이 빛나는 말싸움 도중의 송윤아는 감탄이 나올 만큼 연기를 참 잘했다.

최근 송윤아는 드라마 마마로 6년 만의 안방극장에 안착했다. 오랜만에 그녀의 연기를 보고 놀랐던 것은 적지 않은 휴식 기간을 거쳤음에도 감각을 잃지 않은 탱탱한 발음이었다. 마마는 다소 특이한 줄거리를 가진 드라마다. 송윤아가 분한 한승희 또한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여자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싱글맘 여주인공이 세상에 홀로 남겨질 아들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기 위해 옛 남자의 아내와 역설적인 우정을 나누는 이야기’는 제작진이 의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묘하게 퀴어 코드를 포함한 것 같은 드라마 마마에서 한승희는 캐나다의 유명 만화 작가로 ‘직선적이며 거침없는 성격에 때론 무례해보일 만큼 못 볼꼴은 절대 그냥 못 넘어가는 고집 세고 타협할 줄 모르는’ 깐깐하디 깐깐한 여자다. 물론 예쁜 모양새는 결코 아닌 못나게 모난 여자지만 이런 역할이야말로 궁극의 송윤아 연기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한승희는 자신이 죽고 나면 홀로 남을지 모를 아들 한그루(윤찬영 분)에게 가족을 만들어주기 위해 전 남편 문태주(정준호 분)의 현 아내, 서지은(문정희 분)과의 기묘한 우정을 나눈다. 완벽주의자인 승희에게 지은은 줄곧 인생을 저당 잡아 사고를 치고 뒷수습마저 남에게 맡겨버리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민폐형 인간이다. 빚 청산을 위해 누드모델을 하려다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처럼 승희에게 매달려 목숨을 구걸한다. 이런 판국에 두 사람이 연을 맺게 되는 과정이 할리퀸 로맨스의 한 페이지 같다. 지은이 벗어놓고 간 구두를 무릎 굽혀 줍는 승희의 행동은 로맨스 소설 속 시작되는 연인의 첫 만남에 빼놓을 수 없는 클리셰가 아니던가.

서로가 못마땅해 염증마저 느끼는 두 사람은 줄곧 말싸움을 벌인다. 그런데 싸우는 꼴이 어쩐지 연인 사이의 그것 같다. 마치 로맨스를 하듯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는 송윤아와 문정희의 뛰어난 연기력에서 빛을 발한다. 애증이라고 표현해야 걸맞을 두 사람의 관계가 연인들의 사랑싸움 같아 기묘한 즐거움을 준다. 자존심은 강하면서 폐 끼치는 문제를 딱히 해결하려 들지 않는 지은. 떽떽거리고 엄격하지만 사고뭉치 지은의 뒷수습을 도맡아하고 있는 승희. 더군다나 두 사람은 서로의 호칭을 '자기'라 부른다.

”자기가 뭘 안다 그래? 뭘 얼마나 잘나서 내 일에 뭔 상관이냐고!“ “얘기했잖아. 난 그쪽이 좀 강해졌으면 좋겠고 편해졌으면 좋겠어. 주의 사람들의 시선, 소문 그 따위에 신경 쓰지 마. 살다보면 더한 일도 생길 수 있는 거야. 그땐 어떡할 건데. 남들 보기 창피하다고 숨어살 거야?!”

“난 자기랑 달라. 부족한 거 하나 없는 자기랑 내가 같은 줄 아냐고.” “그래. 달라! 달라도 너무 달라서 너 같은 여자랑 절대로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까 어떡하다 보니까 나도 여기까지 왔어. 보고 있으면 피곤하고 짜증나고 화나고 열 받고!” “모르는척해. 모른척하면 되잖아!” “그렇게 안 되니까 미쳐버리겠다구!” “그럼 안 보면 되겠네.”

최근 방영분에서 두 사람의 말싸움이 극에 치닫는 장면이 있었다. 연기력이 미숙한 배우였다면 대본을 붙잡고 낑낑- 외우는 것만 해도 벅찼을 길고 긴 대사. 그래서 정말 외우는 것만이 끝이었을 이 요란한 대사를 두 여자는 정말 생활인의 대화처럼 자연스럽게 쏟아냈다.

불신이 극에 달한 아들에게 참다못해 “그래. 엄마도 세상에서 한 일중 제일 후회되는 일이 널 낳은 거야! 내가… 내가 왜 널 낳아서 이렇게……” 라고 보답하는 한승희의 절규. 정신을 잃을 만큼 아득한 상황에서도 그녀의 발음만큼은 흐트러지지 않고 명확하다. 그 까랑까랑함이 오히려 절박한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으려는 한승희의 기가 느껴져 애처로움이 더했다.

대사가 겉돌지 않을 충분한 리얼리티에 극의 긴장감이 여실히 살아나는 강약. 그리고 무엇보다 탄성이 느껴지는 또랑또랑한 발음에 희열마저 느껴졌다. 그래. 저게 바로 기본기가 제대로 잡힌 연기지- 싶어서.

연극판 서당개가 되어 몇 년을 전전긍긍하다 가까스로 얻은 기회에 브라운관의 슈퍼스타가 되는, 배우의 정석 같은 이야기들은 모두 다 옛날 배우들의 미담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애초에 연기자의 꿈을 갖고 있지도 않았던 어린 아이들이 너무나 많은 기회를 통해 쉽사리 브라운관의 주인공 역할을 맡기도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연기에 대한 판단 기준 또한 흐릿해졌고 발음과 발성이라는 연기의 기본 보다는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의 분위기라거나 감정 표현과 같은 감상적인 이유에 더 가치를 두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오랜만에 이렇게 살아 숨 쉬는 기본기 꽉 잡힌 완벽 발음의 연기를 보니 새삼 짜릿한 희열마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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