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을 말하려다 <군도>를 말하게 된 까닭은

 

원래는 <명량>에 관한 글을 쓰려고 했다. 그런데 망설여졌다. <명량>은 7월 30일 개봉했고, 12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동원하며 가공할 기세로 질주했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은 ‘최단기간 천만 돌파’란 컨텍스트와 함께 쓰이는 게 자연스럽다. 극장을 나서고 아무리 생각해도 막막했다. 전반부 드라마는 막연하고 빈약한 시추에이션의 총합이며, 후반부는 해석의 의미 값이 없는 해전 장면이다. 바다에서 배가 가라앉는다는 것 외엔 ‘세월호’ 사건과 연결고리도 없었다. 비평적 사유를 착근할 포인트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비평은 단순한 만듦새 평가로 빠지거나, 사변의 비약을 감내해야 한다.

다만, 눈에 들어온 것은, 이순신의 얼굴이 상당히 찌들어 보인다는 점과 이순신의 내적 갈등(두려움) 및 조선군 진영의 두려움이 거북선(이순신, 대한민국)에 대한 왜군의 두려움으로 이행(엔딩 신)하는 대구 구조였다. 영화 속 '리순신'은 왜적을 떨게 하는 명장인데, 그다지 무섭고 위대해 보이지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최민식은 나이에 비해 노안이고, 역사 속 이순신보다 10살쯤 많다. (엘리트/지도자 캐릭터를 소화한 적은 거의 없고, 오히려 반대 이미지에 가까운 배우다.) 널리 알려진 초상화 속 이순신의 풍채는 영기 서린 중년인데, <명량> 속 이순신의 행색은 세파에 얼룩진 노장이다. 이런 점에서 나이 든 관객들이 성웅에게 세속적으로 동일시할 통로, 개인의 정념을 더 큰 대상으로 승화할 발판을 찾은 것이 아닌가, 막연한 짐작은 들었다. 여기까지가 <명량>에 대해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할 것이다.

대신, 나의 눈길은 얼마 전 개봉한 <군도>로 거슬러 갔다. <군도>는 나름대로 논의할 거리가 있는 작품이다. 그 부분이 충분히 거론되지 않은 것이 첫째 이유다. <명량>은 러닝타임 절반을 해상 전투에 ‘올인’ 했는데, 이런 과감한 장르성이 <군도>와 통한다는 것이 둘째 이유다. 물론 그를 통해 더 큰 논점으로 나아가려 한다.

 

‘지리산 웨스턴’ 군도?
 

<군도>는 '지리산 웨스턴'이다. 웨스턴 무비, 스파게티 웨스턴을 걸쭉하게 표방한다. 눈 뜨고 영화를 봤다면 누구나 알 만큼 노골적인 사실이라서 단순히 이 점을 지적하는 것으론 <군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군도>에는 횅댕하게 부푼 서사와 거기 윽물리지 않는 과잉된 장르 이미지가 흘러넘친다. <군도>는, 사실은 웨스턴이라기보다, 다른 장르와 배가 맞은 정체불명의 혼혈에 가깝다. 이런 부정교합/이종교배가 어떤 행간에서 초래된 것인지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장르 영화 전반의 특질과 한국영화의 전통적인, 그리고 근래의 경향과 연루돼있기 때문이다.

장르 영화의 특징은 관습성이다. 장르마다 축적된 문법과 논리가 있고, 상투성과 과장이 끼어든다. 단적으로, <신세계>를 보고 “한국에서 경찰이 무슨 깡패 스파이 짓을 하느냐”며 개연성에 혀를 차는 건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장르는 영화 바깥의 관객 인식과 기대를 아우르는 개념이다. 영화와 관객이 합의한 대로 상투성, 비현실성을 묵인하는 ‘불신의 유예’가 작동한다. ‘불신의 유예’는 장르마다 다른 세기로 허락된다. 로맨스 드라마보다는 호러 영화가, 호러 영화보다는 스페이스 오페라가 더 많은 가짜의 자유를 누린다.

한편, 장르 영화는 현실에 발 딛는다. 장르 세계를 건축하기 위해 현실 세계에서 자재를 끌어오고, 현실과의 접점을 통해 관객은 서사를 이해한다. 이것을 ‘도상’(icon)이란 개념으로 압축하여 원용할 수 있겠다. 도상은 장르를 구성하는 최소 단위로서, 의상, 연기자, 소품, 지역, 건물 등 장르의 고유성을 담지한다. 누아르 영화는 ‘마피아’와 ‘팜므 파탈’, ‘시가’와 ‘보스의 집무실’로 묶인다. 히어로 영화는 ‘초인’과 ‘헤로인’, ‘유니폼’. 서부극은 ‘보안관’, ‘무법자’, ‘인디언’, ‘열차’, ‘권총’, ‘황야’로 엮인다. 영화는 국적을 가진 상품-예술이다. 제작-상영국가에 따라 장르적 도상도 차이가 난다. 하나의 장르가 타국으로 이사 갈 때, 지역 토질에 맞게 집을 짓는다. 필름 누아르가 홍콩 누아르로 바뀌면 마피아 대신 흑사회가, 서부극이 만주 웨스턴으로 바뀌면 인디언의 자리에 식민 지배기구가 들어선다.

할리우드에 비해 충무로 장르 영화가 협소한 이유는 - 어떤 비할리우드 지역 영화든 대체로 마찬가지겠으나 - 제작 규모의 제약은 물론 지역적 도상의 제약도 있을 것이다. 일찍이 허문영 평론가가 액션 장르와 민속적 도상의 관계를 거론했듯 말이다. 우리도 매력적인 장르물을 만들고 싶지만, 그를 재현할 마땅한 도상이 필요하다. 충무로 장르물 가운데 ‘조폭 누아르’가 상대적으로 많은 이유와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첩보물이 많은 이유가 바로 그런 것이다. 총칼을 대치하는 분단사회 적국 북한이 자연스레 장르적 대립 항으로 옮아간다. 다르게는, CIA 요원은 세계를 누비며 테러리스트와 싸우지만, 국정원 요원 정진수는 화석이 된 냉전의 도시 ‘베를린’으로 어쩔 수 없이 이동한다. 미국엔 NASA가 있으니 우주선을 타고 외계인과 조우하지만 - 그런 유형의 설정에 설득력이 있지만 - 한국에 뭐가 있어서 SF 영화를 만들겠는가? 중국에 무협 영화가 번성한 것은 9파 1방의 세계관이 존재하기 때문인데, 조선엔 그런 게 없었다. 하이스트 무비 <도둑들>은 아무리 대박을 터트리고 싶어도 한국에선 훔칠 게 없으니까 마카오로 떠난다. 슈퍼맨은 패권국가 미국이 인격화된 히어로지만, 충무로는 끽해봐야 <흡혈형사 나도열>이다. 히어로 물에서 코미디 물로의 전락. 이러한 장르의 축소/변주 이식에선 한국영화의 내적/외적 제약이 깃든 자의식의 흔적이 느껴진다.

<군도>는 이런 도상의 이접에 뻔뻔할 정도로 무신경하다. 한국에서 웨스턴을 재현할 공간은 일제 시대 만주밖에 없다. 윤종빈 감독은 조선 말엽 지리산이라는 생뚱맞은 곳에서 서부극을 꿈꾼다. 여기엔 웨스턴의 도상 노릇을 할 어떠한 질료도 없다. 그래서 선택한 전략, 가공을 거치지 않은 장르 원본 도상을 ‘복붙’한다. 오프닝 시퀀스를 떠올려보자. 둔덕이 말소된 채 아스라하게 뻗은 갈색 황야에, 군도 일당이 등장한다. 산지가 70%인 조선에는 이런 장소가 없거나, 적어도 관객 인식 속에 없다. 이곳은 무국적 공간이며, 말 그대로 장르의 신화적 공간이다. 러닝타임 내내 끊임없이 귓전을 때리는 웨스턴 풍 배경 음악은 지루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이며, 라스트 대결에서 돌무치가 기관총을 난사할 땐 너무나 난데없어 황당할 지경이다. 뒤집어 말하면 이런 단수 낮은 장치를 도배하지 않고는 이 영화가 웨스턴으로 성립할 수 없다는 거다. 더 중요한 것은, 원본 도상을 때려 박는 것만으론 도상의 부재로 인한 공동이 메워지지 않는단 점이다. 무법자와 보안관은 권총을 격발하며 승부를 가리지만, 칼을 차고 활을 쏘는 시대에 그런 요지경이 가능할까? 그래서 ‘무협’이 등장한다.

조선 최고 칼잡이 조윤과 대나무 숲에서 수련을 거듭하는 돌무치, 그들이 펼치는 액션과 1:1 결투를 보면 알게 된다. <군도>는 액션 연출에 가장 많은 공을 기울였다. 그 액션의 동선과 쾌감은 순전히 무협영화의 그것이다. 동료를 잃고 나락으로 떨어졌다 각성하며 복수에 성공하는 플롯 역시 이연걸 <태극권>이 떠오른다. 칼을 차고 말을 몰며 황야를 달리는 이미지를 되새기면 두 계열의 도상이 어떻게 교직됐는지 명료하게 와 닿는다. 이렇듯 장르성을 관철하려 장르 원본 도상과 (지역적) 인접 장르 도상을 작위적으로 꿰맞춘 결과 장르 이미지가 과잉된 것이다. 많은 관객이 불평했던, 앙상하게 지체되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장르적 조건상 웨스턴 서사가 성립할 수 없으니, 이미지가 서사를 압도하는 현상이 벌어진다.

이것은 오류가 아니라 의도된 결과다. 확실한 오락영화, 완연한 장르영화로 단장하려한 결과다. <군도>는 무협과 웨스턴 말고도 하이스트 무비의 컨벤션을 차용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양반가 저택을 털 때 군도 일당이 맡은 역할 플레이) 더 정확히 말하면, 이 영화의 전략은 잡다한 장르 페티시의 전시, 핵심은 강동원의 육체를 통한 전시다. 그를 통해 상업영화로서 경쟁력을 차별화하려 한 것 같다. 어떤 형식미의 과잉으로 작가적 맵시를 주름잡으려 했는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군도>는 장르 페티시에 탐닉하면서 정작 온전한 장르 세계로 투신하는 것은 주저한다. 장르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 텐데, 구태여 철종 시절이란 구체적 시대성(지역성)을 표지한다. <군도> : ‘민란의 시대’라는 역사성, 정치성을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군도>에 정말로 정치적이고 민본적인 무엇이 들어있다 볼 수는 없다. ‘민란’이란 주제의식이 기립하려면, 지배권력 vs 민중세력의 대립 항이 선결되어야 한다. 조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세도가 우두머리지만, 그의 학정은 순전히 아비에 대한 인정투쟁이다. 돌무치는 변혁의 결의가 아니라 가족이 학살당한 복수의 일념에 사로잡혀 있다. 정치적 대립 항을 이루는 두 축의 실체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이고 내면적인 것이다. 추설 패거리는 민중과 내왕 없이 ‘육지의 율도국’에 근거지를 틀고 격절돼있다. “뭉치면 백성, 흩어지면 도적”이라면서 자기들끼리만 뭉친 채 ‘정예 전사’를 가려서 받는다. ‘민란’의 주체가 되어야 할 백성들은 별다른 대사도 없이 원시화된 모습으로 떠돌다 장르적 변수로 개입할 뿐이다. (조윤과 돌무치의 결투에서 느닷없이 조윤을 찌르는 장면) 돌무치는 공동체 안에서 좋은 사회를 만들려 노력하는 대신, 공동체 바깥의 또 다른 ‘율도국’을 향해 무리를 이끌고 황야의 소실점을 따라 떠난다. 마치, 영화가 끝나고 모뉴먼트 밸리를 향해 사라지는 <수색자> 존 웨인처럼.

‘민란의 시대’란 부제는 허장성세다. <군도>의 정치성이 잘 작동하지 않거나 희미하다는 것은 그냥 보면 알 수 있다. 자기가 갖지도 않은 것을 치켜든 것은 한국에선 사회의식이 흥행 감각과 통한다는 검증된 사실 때문일 거다. 정치적 구호를 내걸고 장르적 향락에 몰두하는 셈인데, 라스트 신이 재미있다. 돌무치는 백성들의 가세로 검귀 조윤을 마침내 쓰러트린다. 그리고 망설인다. 여느 때처럼 상투를 자르는 승리의 퍼포먼스를 행하려다 그만둔다. 여기서 돌무치는 조윤을 승인하지 않음으로써 승인한다. 상투는 양반, 지배계급의 상징이다. 그것을 자르면서 권력관계를 뒤엎고 지배계급에 설욕하며 원한을 승화한다. 조윤의 상투를 놓아둔 것은, 그의 계급성을 부인하는 것이며, 조윤의 서자성, 그 역시 억압받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적 대립 항은 공식적으로 허물어져 버린다. 이것은 온전한 장르영화의 정체성을 사실상 자인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강화되는 상업영화의 장르성
 

허문영 평론가는 ‘한국 장르영화에 관한 단상들’이란 글에서 한국적 스토리텔링의 특징으로 장르적 페티시즘과 리얼리즘 스토리의 결합, 페티시즘에 대한 자책으로서의 마조히스트적 결말 등을 거론했었다. 실제 한국영화에는 리얼리즘 전통이 뿌리 깊고, 도덕적 자기검열의 압력이 스멀거린다. 필름 누아르는 법의 일탈에 대한 반대급부로 은밀하게 초자아가 개입하는 장르다. 한국 ‘조폭영화’ 주인공들은 예외 없이 파국과 자멸을 맞고, 어둠의 골목에 투신한 처벌을 받는다. 단 하나의 반례가 있다면 2013년 개봉한 <신세계>다. ‘조직’에 잠입한 ‘경찰’이 경찰 간부를 제거하고 범죄 세계의 제왕으로 등극한다. <신세계>란 영화가 인상적인 것은 도덕적 강박 따위 불살라버리는 ‘악의 카타르시스’다. 대체로 리얼리즘 서사에 입각한 역대 한국 누아르와 달리 온전한 장르 서사에 몸담은 점이다. 이런 점에서 - 작품 함량과 완전히 별개로 - 하나의 이정표로 느껴진다. <군도>는 어정쩡하지만, 어쨌든 돌무치에게 승리를 허락한다. 권력에 반역하며 분연히 일어섰지만, 결국 패배하고 울부짖던 전통적 민중서사의 ‘한’의 정서가 여기엔 없다.

가설을 세워보자. 이것은 한국영화의 장르성이 강화되어 가는 증거가 아닐까. 언젠가부터 한국영화는 장르의 영토를 넓혀가기 시작했다. 2006년엔 CG를 앞세운 괴수 영화 <괴물>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2008년엔 ‘만주 웨스턴’으로 돌아간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흥했다. 2009년엔 민속적 도상을 판타지의 상상력과 결합한 <전우치>가 성공했고, 초유의 재난 블록버스터 <해운대>가 천만 폭죽을 터트렸다. 2012년엔 할리우드식 호화 캐스팅 하이스트 무비 <도둑들>과 해외로케 다국적 첩보 액션 <베를린>이 돈다발을 긁었다. 2013년엔 본격 SF 영화 <설국열차>가 극장가 지축을 흔들며 달렸다. 2014년엔 ‘지리산 웨스턴’ <군도>와 역사적 도상을 통해 해상 액션을 구현한 <명량>,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즉각 떠오르게 하는 <해적>이 머리통을 부딪치며 경주한다. 후반기에는 - 호금전의 <협녀>와 제목이 같은 - 무협 영화 <협녀 : 칼의 기억>이 개장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 장르의 가지는 뻗어 감과 동시에 잎새가 짙어간다. 일례로, 2014년 천만 영화 <변호인>은 실존 인물을 재현하는 영화지만, 휴먼드라마의 공식을 제법 착실하게 쫓았다. 2013년 재난영화 <타워>와 <감기>도 하나의 표본이며, <감시자들>과 <더 테러 라이브> 역시 장르 순도가 높은 작품이다.

이런 흐름은 드라마와 코미디가 다수를 차지하던 10년 전 박스오피스 순위와 견주면 확연히 드러난다. 상업영화의 장르성 강화 자체는 긍정적인 현상이다. 이것은 산업의 성장, 자본의 유입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포화한 공급 시장에서 ‘신상’ 개발을 시도한 결과다. 한편으론, ‘큰물’에서 놀던 ‘흥행 집합’을 빌려오는 안전한 선택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익히 성공한 서사물의 플롯과 이미지를 따 옮기는 사례가 잦은 것은 우려스럽다. <군도>와 <명량>을 보면 서사를 부차화하고 장르적 쾌감과 이미지를 적극 앞세우는 특징이 발견되는데, 이것이 얼마나 보편적 경향인지는 좀 더 검토해야겠다. 중요한 건 이런 흐름을 낳은 행간이며, 거기서 발생하는 교착과 시너지다. 충무로가 처한 조건과 현명하게 부합하는 장르 재현 방식을 모색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명량>은 이야기가 거의 무의미한 영화다. 드라마 서술을 방기한 채 역사적 상상도 몇 장을 슬라이드 하듯 단편적으로 인물과 상황을 보여준다. 전체적인 극의 분위기도 상당히 무겁고 어두운 편이다. 그리고 해상전투 시퀀스에서 액션 공세를 퍼붓는다. 알려진 바와 같이 <명량>의 흥행 가도는 중년 세대 관객이 닦았다. <명량>의 ‘천만 관객’이 의미심장한 이유는 여기에도 있을지 모른다. 단순히 천만이란 숫자가 아니라, 내러티브를 버리고 장르적 전개에 집중한 영화가, TV 드라마에 익숙한 나이 든 세대를 아우르는 성공을 거머쥐었단 점이다. 이것은 정확히 무엇을 말할까. 단지 영화 바깥에 이미 존재하는 이순신이란 강렬한 ‘드라마’ 때문일까. 아니면 장르성의 강화와 함께 관람 선호체계가 발맞춰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야기 소비에 치우친 한국 관객의 입맛이, 가장 보수적인 계층에서도 조금씩 변해가는 신호는 아닐까. 어쩌면 장르성이란 ‘감각’과 한층 친밀해져가는 방증은 아닐까. 물론 확답할 수 없는, 그러나 흥미로운, <명량> 앞에서 <군도>를 돌아본 질문들이다.

PS : <명량>의 흥행 원인을 가늠하기 어려운 것은, 메인 관객층 반응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인터넷에선 중년 관객의 리뷰를 찾아보기 어렵다. "명량이 왜 흥행하는 건지 모르겠다.", “거기 없는 걸 말하지 마라!” 같은 젊은 관객의 리뷰만 흔하다. 어떤 점에서 영화가 좋았다는 소감이 있어야, 거기서부터 실마리를 풀 것 아니겠는가? 나이 든 관객은 관람 산업공간에는 안착하였지만, 문화 담론공간에서는 목소리 없이 겉돌고 있다. <명량>의 '천만 관객'이 던지는 질문 하나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 일상과 세상의 경계를 모로 걸으며, 조심스레 두리번대고 글을 쓴다. 사회, 문화, 정치의 단층을 채집하여 살펴본 이면의 수런거림들을 블로그(blog.naver.com/yke0123)에 편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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