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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유리동물원’, 대공황 혹은 신자유주의 앞에서 부속품으로 전락하지 않기[블로그와] 박정환의 유레카
박정환 | 승인 2014.08.13 11:37

영화 <몽상가들> 속 몽상가가 한 무대에 올랐다고 표현하면 좋을까.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톰은 물류창고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는 육체는 공장에서 혹사당할지언정 정신마저 구두공장에 예속당하기를 바라지 않는 캐릭터이다. 물류창고에서 일하지만 틈만 나면 시를 쓰고, 밤이면 영화관으로 달려가는 건 톰이 현실과 적당히 타협할 줄 아는 현실주의자가 아닌 이상주의자라는 걸 반영한다.

톰의 집안에는 또 하나의 이상주의자가 있다.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이 연기하는 톰의 어머니 아만다가 남부라는 노스탤지어를 잊지 못하는 정황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아 보인다. 2막에서 아만다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아들의 친구를 저녁식사에서 맞이하는 건 아만다가 남부의 부유함을 잊지 않고 있음을 반증하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한 집안에 톰과 아만다라는 두 이상주의자가 함께 사는 셈이다.

   
▲ 사진제공 명동예술극장
하지만 어머니 아만다의 이상주의는 아들 톰의 이상주의와는 다르다. 아들 톰이 비루한 일상을 벗어나기 위한 정신적인 도피처로 영화와 시를 선택한 것과는 달리, 아만다는 노스탤지어로서의 미국 남부 정서를 강조하고 이를 아들과 딸에게 입버릇처럼 달고 읊기 바쁘다. 미국 남부의 풍요로움을, 물질주의를 은연중에 아들과 딸에게 역하지각으로 강요하는 셈이다. 아들이 현실 도피로서의 이상주의자라면 어머니는 노스탤지어로서의 남부 정서를 추앙하는 이상주의자로 두 사람의 이상은 차이가 크다.

아들은 아버지를 극복해야 비로소 한 남자가 된다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적어도 <유리동물원>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아들은 집안에 부재한 아버지의 뒤를 따르고 싶어 한다. 아만다의 집안은 남편이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은 지 오래다. 가족, 어머니 아만다와 누나 로라를 부양해야 한다는 의무만 없었다면 아마도 톰은 집안에 없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일찌감치 집을 나갔을 것이 분명하다.

아버지의 궤적을 따르고 싶은 톰의 소망에 제동장치를 거는 건 누나 로라의 몫이다. 만에 하나 로라가 직업학교를 이수하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을 톰과 분담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도 톰은 일찌감치 집을 나갔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 아만다의 정신적인 분신은 딸 로라다. 딸이 멋진 신랑감을 만나 결혼에 다다른다는 건 딸의 결혼을 통해 어머니 로라가 정신적인 대리만족을 갈구한다는 걸 의미한다. 비록 아만다 스스로는 미국 남부의 화려함에서 격리되어 투박하고 비루한 삶을 이어가지만, 딸에게는 이런 비루한 삶을 물려주지 않고 싶어 하는 바람이자 대리만족인 게다.

극의 2막에서 로라가 아끼던 유니콘의 뿔이 부러지는 건 어머니 아만다의 정신적인 바람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보여주는 걸 보여준다. 유니콘에게 뿔이 없으면 다른 말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한 개체가 되고 만다. 로라가 그토록 지극정성으로 아끼던 유니콘의 뿔이 부러지는 건 멋진 사윗감에게 딸을 시집보내겠다는 아만다의 욕망의 붕괴를 뜻한다.

이는 아만다의 신데렐라 콤플렉스, 혹은 미국 남부의 노스탤지어가 <유리동물원>의 제목 속 유리만큼이나 얼마나 덧없는 욕망이었는가를, 깨어지기 쉬운 욕망이었는가를 환기하게 만들어 주기에 충분하다. 유리라는 소재는 아름답기는 하지만 잘못 다루면 허망하게 깨지기 쉬운 소재다.

   
▲ 사진제공 명동예술극장
현대의 관객은 신자유주의라는 무한경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인생의 중반까지 아무리 잘 살았어도 회사를 퇴직한 후 인생 2모작을 잘 경작하지 못하면 사회빈곤층으로 수직 낙하하고 마는 암울한 시대라는 이야기다. 연극의 배경이 되는 대공황시대는 많은 미국의 젊은이를 거리로 내몰았던 암울한 시대다. 이런 암울한 시대에서 개인의 노스탤지어는 대공황, 혹은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사회 매커니즘 앞에서 유리처럼 얼마든지 깨어질 수 있음을 시사하는 연극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유리동물원>은 개인의 갈망이 유리처럼 덧없다는 걸 보여주는 허무주의에 안착하지만은 않는다. 어머니의 노스탤지어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집을 나서는 톰의 행보는, 물류창고라는 매커니즘의 부속품으로 젊음을 소진하기보다는 자신의 길을 스스로 개척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대공황이라는 체제의 부속품으로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독립된 자아로 미래를 개척하겠다는 톰의 이상주의는, 빛나는 유리의 아름다움과 궤를 함께하기에 충분해 보인다. <유리동물원> 속 유리는 깨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색채로 투사하는 이중성을 갖는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박정환  js7keie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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