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이 항소심에서 내란음모죄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감형받았다.

서울고법 형사9부(재판장 이민걸 부장)는 11일 내란선동죄, 국가보안법 위반, 내란음모죄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석기 의원에 대한 항소심에서 내란선동죄와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선 유죄를 선고했지만 내란음모 혐의를 유죄를 인정한 1심을 취소하고 징역 9년에 자격정지 7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이석기 의원의 주 혐의인 내란음모 혐의에 대해서 "전쟁발발 시 국가기간시설 논의한 것은 그 자체로 대한민국 자유민주주의 훼손한 것으로서 피고인들의 행위는 비난받아 마땅하다"면서도 "이적동조행위로 인한 국보법으로 처벌할 수 있음을 별론으로 하고 내란음모죄로 처벌하려면 구성요건을 인정해야 하는데 내란범죄의 합의 단계까지 이르지 못했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은 이른바 지하혁명조직인 ‘RO’를 조직해 2013년 5월 130여명의 조직원을 모아놓고 국가 주요시설을 파괴하는 방식으로 내란을 음모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석기 의원의 혐의는 1심에서 대부분 유죄로 인정돼 징역 12년에 자격정지 10년을 선고받았으나 이 의원 측은 무죄와 양형부당을 주장하며 항소했다.
검찰은 이석기 의원이 대한민국의 전복을 기도한 점 등에 비춰 사회로부터 장기간 격리할 필요가 있다며 7월 28일 결심 공판에서 1심과 마찬가지로 징역 20년에 자격정지 10년을 구형한 바 있다.
▲ 내란음모 혐의 등으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2년을 선고받은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에 대한 항소심 선고가 11일 서울고법에서 열리고 있다. 2심에선 1심보다 감형된 징역 9년이 선고되었다. (연합뉴스)
재판부는 제보자가 제공한 ‘RO’ 모임 녹음파일 및 제보자 진술에 대해 증거능력이 인정되고 신빙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지하혁명조직 ‘RO’의 실체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RO’의 실체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존재가 엄격하게 증명됐다고 볼 수 없다”라고 판단했다.
이는 이석기 의원 등 개인이 모임에서 한 발언에 대해선 법적으로 평가할 수 있지만 해당 모임이 어떤 조직의 모임이며 그 조직의 목적이 무엇인지까지는 이 증거들로 평가할 수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1심 판결과 달리 ‘RO’의 실체가 인정되지 않았다는 것은 의미가 크다. 1심 판결문은 혁명조직 ‘RO’(Revolutionary Organization)에 대해서 주체사상을 지도이념으로 대한민국의 정권이 미제에 예속된 파쇼권력이라는 인식하에 혁명의 결정적 시기에 그 체제를 변혁, 최종적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한 비밀결사 RO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이석기 의원이 혁명조직 ‘RO’의 총책임을 인정하고 회합 참석자 130명이 ‘RO 조직원’이며 모두 내란의 주체라고 판시했다.
그러나 과연 주어진 증거를 통해 그와 같은 명확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느냐는 문제제기가 있었다. 일각에선 “그 ‘RO’란 조직이 그토록 실체가 분명한 혁명조직이라면, 어째서 반국가단체구성죄로 기소하지 않았는가?”라고 묻기도 했다. 검찰은 1심 재판 당시 반국가단체구성죄를 혐의에 추가하려는 검토를 했으나 결국 추가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RO’를 조직의 고유명사로 보기엔 부적절하다는 지적도 있었다. <미디어스> 역시 과거 분석기사에서 “ ‘RO’는 특정한 단체라기보다는 ‘비선’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자리는 경기동부연합의 비선들의 모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밝혔으나 그 후의 기사들에선 해당 회합을 가진 조직을 ‘RO’라고 지칭해 왔다.
재판부가 지하혁명조직 ‘RO’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밝힌 것은 현재 진행 중인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와 관련해 통합진보당 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법무부는 2013년 11월 통합진보당이 위헌정당이란 결론을 내리고 헌법재판소에 위헌정당 해산심판 청구안을 통과시킨 바 있다. 법무부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의 내란 음모 혐의와 통합진보당의 당헌·당규 및 강령, 통합진보당원들의 국보법 위반 사례 등을 종합적으로 법리 검토한 결과 현행법에 정하고 있는 민주주의 기본질서에 위배된다고 판단했다고 주장해왔다.
이 경우 ‘RO’와 통합진보당의 관계설정에 관한 논증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2013년 11월 8일에 열린 참여연대와 민변 주최 토론회에서 이재화 민변 사법위원회 부위원장은 (이석기 사건에 대한) 검사 공소장이 사실이라 해도 그들이 입증한 건 ‘RO’의 행위다. ‘RO’와 통합진보당의 관계를 엮기 위해선 별도의 근거가 필요하다. 그런데 전혀 근거가 없다. 검사가 ‘RO’와 통합진보당과의 관계를 이미 입증했다면 당대표나 주요 간부들을 기소했을 것이다. 그런데 검사 공소장에서도 그들이 기소되지 않았는데 ‘RO’ 활동을 통진당 해산의 근거로 삼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라고 물은 바 있다.
당시 같은 토론회에 참석한 한상희 참여연대 운영위원장(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역시, “통진당이 ‘RO’의 외곽단체임을 입증해야 법무부 주장이 최소한이라도 성립한다”라면서 “스페인이 바스크 정당이 위헌정당임을 입증하려 했을 때는 그 부분에 치중했다. 테러단체와 바스크 정당의 연계성을 규명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런데 우리 법무부가 만든 논리를 보면 이 부분은 완전히 비어 있다”고 지적했다.
‘RO’와 통합진보당의 관계를 입증하는 것이 과제였던 상황에서, ‘RO’의 실체조차 법원에서 인정받지 못한다면 법무부의 처지는 더욱 난감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통합진보당이 6월 지방선거와 7월 재보궐선거에서 유권자들에게 심판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는 상황에서, 굳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해산당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시선이 힘을 얻게 되었다.
이석기 의원 등은 국정원과 검찰이 제시한 증거를 줄곧 날조라고 주장하였으나, 재판부가 검찰이 제시한 증거의 증거능력을 수용하였으니, 이석기 의원 등 통합진보당의 일부 구성원들에게 반성이 필요하지 않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와는 별개로 물리적 위협을 지니지 못하는 회합에서의 선동을 빌미로 정치적 이득을 누리려고 한 국정원과 법무부, 넓게 봐서는 박근혜 정부 전체의 ‘깨춤’은 훗날 당대 한국 사회의 현실을 드러내는 희극으로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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