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 교황은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 지도자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비판도 해왔다. 평소 경호를 최소로 유지할뿐더러 빈곤과 노동 문제에 대해서도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거리의 교황’으로 불린다. 이런 교황이 오는 14일 한국을 찾는다. 그런데 공개된 방한일정을 보면 교황이 찾는 곳은 ‘낮은 데’가 아니다.

14일 교황은 곧바로 청와대로 건너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나고 공직자 대상 강연을 한다. 이튿날에는 세월호 가족들을 초대한 미사에 참석한다. 16일엔 ‘순교성지’ 서울 서소문에 들르고 광화문 미사에 참석한 뒤 음성 꽃동네에 간다. 17일 충남 서산에서 아시아지역 주교들을 만나고, 18일 명동성당 미사를 끝으로 일정을 끝낸다.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23일째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월호 가족들, 2년 가까이 부양의무제·장애등급제 폐지 농성 중인 장애인들, 직장폐쇄에 대규모 해고로 한달 째 노숙농성 중인 케이블업체 씨앤앰과 티브로드의 간접고용노동자들이 모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들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낮은 데로 임해 달라” 했다.

▲세월호특별법 논의가 지지부진한 상황에서 유가족의 단식이 23일차를 맞았다.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최진미 공동운영위원장은 5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프란치스코 교황님, 낮은 데로 임하소서!’ 기자회견에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세월호 유가족 농성장을 찾아와줄 것을 요청했다.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16일 올 서울 광화문에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농성장이 있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회의’ 최진미 공동운영위원장은 “우리 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을 알려달라고 한지 4개월이 지났지만, 진실을 알 수 있는 수사권과 기소권은 특별법 논의에 빠졌다”며 프란치스코 교황이 광화문 농성장을 방문하길 바랐다.

광화문광장 지하에는 2년 전부터 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 폐지 농성장이 있다. 박경석 노들야학 교장은 “교황이 찾아야 할 곳은 아름답게 치장한 대규모 수용시설 ‘꽃동네’가 아니라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기 위해 싸우는 장애인들”이라며 “꽃동네를 보고 던지는 사랑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지옥의 메시지’가 될 것 같다”고 우려했다.

▲노들야학 박경석 교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꽃동네 방문을 반대했다. 아름답게 치장된 꽃동네에 가면 한국 장애인이 처한 현실(부양의무제, 장애등급제)를 제대로 알지 못할 것이라는 이유다.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광화문광장에서 보이는 흥국생명빌딩과 파이낸스센터 주변 거리에서는 전국 5대 케이블SO인 씨앤앰과 티브로드 하도급업체 노동자들이 노숙농성 중이다. 희망연대노동조합 이종탁 위원장은 “파업한지 일주일 만에 티브로드와 하청업체는 직장을 폐쇄했고, 씨앤앰은 노동조합과 약속을 어기고 99명의 노동자를 해고했다”고 전했다.

이종탁 위원장은 “직장폐쇄와 해고의 멍에를 쓴 노동자들이 거리에 내몰렸다”며 “거리의 교황이라는 이야기처럼 거리로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자본과 권력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노동자를 치우려 한다”며 “이 사특한 세계에서 교황이 만나야 할 사람은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가족들, 장애인, 노동자들”이라고 말했다.

▲희망연대노동조합 이종탁 공동위원장은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직장폐쇄와 대량해고로 거리에 내몰린 노동자들이 서울 광화문에 있다고 전했다.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단식, 노숙, 장기농성 중인 이들을 만날 가능성은 크지 않다. 박경석 교장은 “국가 원수급 경호를 한다고 하는데 교황이 지하로 내려와 우리를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경찰은 16일 광화문광장 미사에 4.5㎞ 길이의 방호벽을 설치할 계획이다. 경찰이 사전에 농성장을 정리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교황에게 띄운 편지에 “교황 성하, 우리와 함께 울어주십시오. 우리가 잃어버린 사람들과 다 겪은 후에야 끝나게 될 우리의 시련을 위해 울어주십시오. 우리와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성하께서 집전하시는 미사를 치장한다는 이유로 저들이 우리를 광장에서 쓸어내는 일이 없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썼다.

이들은 교황에게 “우리를 찾아와 주십시오. 익숙해지지 않는 우리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길거리에 나와 탄원하는 방법밖에 찾지 못한 우리의 어리석음과 우리를 몰아낸 사람들에 대한 우리의 멈추지 않는 분노를 깨끗이 용서해 달라고 우리 주님께 청원해 주십시오”라고 썼다. 조율되지 않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부친 편지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기자 수십명이 몰렸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설 곳은 국가원수급 경호와 4.5㎞ 방호벽 안이 아닌 낮은 곳에 있는 시민들과 기자들 사이는 아닐까. 사진=미디어스.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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