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대로 이순신과 명량해전을 내세운 <명량>이 올해 여름 극장가의 승자로 급부상했습니다. 휴가기간과 맞물려 개봉 7일 만에 자그마치 600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이 속도라면 1,000만 관객 동원 역시 새로운 기록을 세울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CGV가 <명량>을 지나치게 밀어준다는 볼멘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과연 정말 그럴까요?
한국에서의 SF 영화
국내의 제작실정은 어떤가요? 민병천 감독의 <내츄럴 시티>와 정윤수 감독의 <예스터데이>는 모두 흥행에서 참패하고 끝났습니다. 이시명 감독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가 비교적 괜찮았으나 이 또한 성공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작 애니메이션이었던 <원더풀 데이즈>는 참담할 정도였습니다. 이로부터 10년 이상이 흐른 현재 SF 장르는 우리나라에서 거의 사장됐습니다. 2012년의 <인류멸망보고서>가 정말 오랜만에 나타난 한국 SF 영화였지만 역시 만족스러운 결과를 내진 못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단지 영화가 엉망이어서 그랬던 걸까요? 즉 <그래비티>가 그랬던 것처럼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흥행성은 소위 '영화 좀 본다' 내지는 '관심 좀 있다'는 분들이 온라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니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VS <명량>
위를 표를 보세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스타트렉: 다크니스>나 <그래비티>에 비해서도 상영관이 적은 건 맞지만 <명량>의 밀어주기에 큰 피해를 봤다고 얘기할 정도는 아닙니다. CGV 입장에서는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다른 곳도 아닌 디즈니의 영화라는 걸 잊지 마세요. 만약 CGV가 정말 <명량>을 중시하면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마냥 홀대했다면 나중에 디즈니로부터 응당의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하필 <명량>과 동시에 개봉했고, 흥행성에서 밀리기 때문에 저 정도 확보하는 선에 그쳤다는 게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나마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마블 영화가 국내에서도 탄력을 받은 상황이라서 양호합니다만, 흥행의 보편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명량>에 견줄 수 없습니다. 재차 강조하건대 <그래비티>의 예를 염두에 두셨으면 합니다.
두 영화의 좌석 점유율
상영관이 더 많으니 당연한 것 아니냐고요? 천만에요. 좌석점유율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큰 피해를 입었다고 하면서 <명량>의 밀어주기를 비아냥거리려면, 좌석점유율에서라도 전자가 후자를 앞서거나 대등한 상태여야 합니다. 현재 <명량>은 상영하면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는 상영하지 않는 극장이 얼마나 있을까요? 있긴 있을까요? 지금의 상황에서는 역으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가 상승작용을 얻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극장에 갔더니 <명량>이 매진이라서 차선책으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관람하게 되는 경우가 생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영관이 많으니 좌석점유율도 높은 거라는 추측은 금물입니다. 지금 당장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상영관을 두 배로 늘리면 좌석 점유율도 덩달아 상승할까요? 북미 박스 오피스 소식을 몇 년 동안 전하면서 말씀드렸다시피 결코 상승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상영관이 많으면 적은 영화에 비해 좌석점유율이 떨어지곤 합니다. 북미는 소규모 상영으로 시작해서 인기를 얻고 극장을 확대해도 평균수입은 떨어지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당신이 애먼 데 열 올리는 사이
종종 열혈 영화 매니아를 자처하는 분들은 일단 거품을 물면서 덮어놓고 이런 현상을 비판하는 걸 봅니다. 누구 하나가 비난하면 전후사정 파악도 하지 않고 군중심리에 휩쓸려서 욕합니다. 더 가관인 건 마치 자신이 평소에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군다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감히 말씀드리고 싶은 건, 오히려 진짜 피해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이 터지는 것처럼 작은 영화들의 설 자리가 더더욱 없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본적인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 얽힌 해프닝은 좀 가소롭더군요.
대작끼리의 다툼이야 누가 이기던 상관없습니다. 그네들은 지금 손해를 봐도 나중에 어떻게 해서든 만회하고, 영화 한 편 망한다고 해서 회사의 존립이 위태로울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진짜 소자본의 독립/예술영화는 한편을 제작할 때마다명운을 걸고 있습니다. 이런 의혹이 불거질 때만 볼 권리가 어쩌니 대기업의 횡포가 어쩌니 하면서 분개하지 마시고, 자신이 진정으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독립/예술영화와 같은 이른바 '작은 영화'에 관심을 가져주세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은 독립영화전용관에 대해서 얼마나 아시나요? 정부는 물론이고 각 지자체에서 아직도 건립에 소극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영화발전기금이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아시나요? 영화발전기금을 가지고 영화진흥위원회가 무슨 사업을 하는지는 아시나요? 아니, 영화발전기금이 뭔지라도 아시나요? 모르신다면 알려고 노력은 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이건 정치판과 마찬가지입니다. 정부가 미온적이라면 관객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응원해야 합니다. 평소에 아무 관심이 없다가 흔히 말하는 '냄비근성'처럼 뜨거워졌다가 금세 식어버리는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습니다. 대기업이든 정부든 욕하기 전에 저를 포함한 우리 관객부터 달라져야 합니다.
이 글을 쓰는 진짜 이유는 이것입니다. <명량>과 CGV의 편을 들어주고 싶은 의사는 당연히 없습니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를 더 재미있게 봤다는 사실은 이미 적시했습니다. 두 영화 사이에 어떤 완력이 작용하든지 간에 지금 이 순간에도 정작 진짜 피해를 보고 있는 영화는 따로 있다는 걸 유념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은 CGV가 무턱대고 <명량>을 밀어주는 것도 아니지만, 그걸 떠나서 이 사태에서는 늘 그랬듯이 소수의 영화가 다수의 상영관을 모조리 차지함으로 인해서 벌어지고 있는 진짜 본질적인 문제를 봐야 한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북미처럼 상영관 규모가 대작의 1/10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턱없이 부족해도 종종 박스 오피스 탑 10 안에 들어가는 영화를 더 자주 보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대중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 주세요.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