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에 대한 경외이자 의문

명량해전은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전 세계를 통틀어도 역사에 길이 남을 전투입니다. 다른 건 다 제치고 하나만 놓고 볼까요? 기록마다 차이가 있으나 <명량>은 13척 VS 300척 이상으로 인용하는데, 명량해전 당시 조선과 일본의 병력은 최소 열 배의 차이를 보였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최소 열 배입니다. 제아무리 조선의 판옥선과 화포가 우수했다고 해도 그렇게나 절대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보고 전투에 임한다는 게 말이 될까요? 더군다나 임금(선조)이란 자는 업신여김을 넘어 모진 고문까지 가하고 업적을 깎아내리기 바빴습니다. 이순신 제독은 제아무리 군인의 신분이지만 이런 임금을 모시면서 죽음을 자처하는 형국을 스스로 맞이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수군을 포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지시마저 거스르면서 "제게는 열두 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건 대체 무슨 신념에서 나온 것인지 저 같은 범인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게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이런 이순신 제독에게 의문을 가지지 않는 게 이상할 지경입니다. 그분은 과연 명량해전을 앞두고 어찌하여 그리도 불리하고 억울한 현실을 극복할 수 있었을까요? 무엇이 이순신 제독으로 하여금 '必死則生必生則死'을 감행하게끔 만들었을까요? 두려움에 떨었던 휘하의 장수들은 어떻게 독려하고 끌어안아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걸까요? 만약 여러분이 저와 같은 의문을 갖고 <명량>을 본다면 필경 아쉬움을 감추지 못할 확률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 이순신과 성웅 이순신 사이의 방황

<명량>은 관점에 따라 아주 성급하게 보일 수도 있을 만큼 빠른 전개를 보입니다. 도입부는 아예 서론을 건너뛰다시피 합니다. 이순신 제독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으로 시작해서 백의종군을 거쳐 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는 것은 짧은 자막으로 처리합니다. 이순신 제독을 다시 불러들일 수밖에 없도록 기여(?)한 칠천량에서의 대패는 배설과 안위의 몇 마디 대사로 나오는 것이 전부입니다. 일견 무모하고 과감한 <명량>의 생략은 그 인물이 다름 아닌 이순신 제독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보면 설마 전혀 모르는 관객에게는 어리둥절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대목이긴 합니다.

이윽고 <명량>은 조선의 수군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보여주는 것을 통해서 이순신 제독의 심정을 그려나갑니다. 그걸 보면서 위에서 던진 의문에 대한 답 내지는 공감을 얻을 수 있길 기대했으나, 실상 <명량>은 이순신 제독을 가련했던 동시에 비장했던 영웅으로 그리는 데만 급급합니다. 만화 속 영웅에게조차 인간미를 부여하는 게 필수인 작금에서 민족 최고의 위인인 이순신 제독의 그것을 조명하는 건 이상할 게 전혀 없습니다. 이상하기는커녕 위인을 위인으로서 일차원적으로 그리는 것보다는 <명량>의 접근법이 훨씬 올바르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제독을 벼랑으로 내몰고 늪으로 빠뜨리기만 했고, 정작 그것에서 어떻게 벗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소홀하게 다룬다는 게 문제입니다.

시작만 하더라도 <명량>은 이순신 제독을 인간적으로 그리려는 시도를 보였지만 갈수록 거기서 더 나아가질 못하고 있습니다. 결국 하려는 얘기는 "이런 판국에도 굴하지 않고 이순신 제독은 능히 그것을 극복하시고 전투에 나아가셨다"는 건데, '이런 판국'에만 집중하고 '그것을 극복'하는 건 제대로 다루질 않더라는 얘깁니다. 다시 말해서 <명량>은 이순신 제독의 위대함을 정면으로 설파하는 대신 우회적으로 숭상하고 있는 것입니다. 덕분에 상대적으로 거부감은 덜해졌지만 보다 입체적인 인물 묘사도 가능했었다는 점에서는 역시 아쉬움을 지울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아울러 안위와 김억추 등의 다른 인물들과 당시 상황의 묘사도 불충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배설은 좀 더 조심스럽게 다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이순신 제독의 위엄을 부각시키기 위함인 것처럼 다소 편향적으로 그려지면서 희생된 감이 있습니다.

가장 의아한 인물은 류승룡이 연기한 구루지마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과연 <명량>에 구루지마와 류승룡이 필요했는지 의문입니다. 김한민 감독이 염두에 둔 것이 투톱을 발판으로 한 흥행인지 대립구도를 통한 극적 재미인지 모르겠지만, 사실상 구루지마는 필요 이상의 비중과 무게감을 가지면서 영화의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억지로 애써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순신 제독처럼 구루지마 또한 나라와 동료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비운을 가지고 있겠으나, 이건 말 그대로 억측에 가까운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그만큼 <명량>에서의 구루지마는 유명무실한 존재였습니다. 재미를 위해서라도 그럴 듯한 악당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명량해전은 이미 그 자체로 여건을 갖췄으니, 차라리 구루지마를 묘사하는 데 들인 시간을 이순신 제독에게로 돌렸더라면 인물 묘사에서 더 나은 영화가 됐을 것 같습니다.

관객을 사로잡는 <명량>, 아니 이순신의 위용

<명량>에서 이순신 제독을 비롯한 인물의 묘사는 대체로 신파적인 요소가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말부에 다다르면 강도는 점점 세지더니 급기야 한계선을 돌파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듯이 진구와 이정현이 연기한 부부는 작위적으로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리는 역할까지 합니다. 기록에 입각하여 산에 올라 명량해전을 지켜보던 백성들을 극에 개입하게 하는 것도 매끄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명량>의 큰 흠결이라고 보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명량>은 적어도 <군도>와 <해적>에 비해 영화의 바탕에 깐 정서를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짧지만 아들인 이회와의 대화에서 이순신 제독이 무얼 위해 싸우는지를 알렸고, 진구와 이정현을 필두로 한 몇 가지 에피소드는 그것을 뿌리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조금 억지스럽긴 하지만 관객을 정서적으로 울리는 데는 부족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이순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막강한 위용이 최민식의 연기로 잘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건 아무래도 해전이며 <명량>을 보는 데 있어서의 백미입니다. 반대로 보면 해전에 열을 올리면서 인물 묘사에 불충했다는 단점을 더 크게 부각시키기도 하지만, 극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데는 이만한 성공을 거두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순신 제독이 울돌목의 세를 간파하거나 화포를 동원하여 극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등의 전략과 전술은 절로 흥분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김한민 감독답게 어느 정도는 고증에 따라서 구현한 것이라서 더 의의가 있습니다. 과장을 살짝 보태면 어릴 적에 <캡틴 하록>과 <스타트렉> 등에서 봤던 함전이 떠올라서 더 몰입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CG 완성도가 옥에 티라는 게 아쉽습니다. 사욕일 수도 있으나 할리우드의 자본과 기술력을 동원해서 제대로 연출했더라면 정녕 최고의 볼거리가 됐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우리가 가진 역량 내에서는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함전만이 아니라 판옥선에서 펼치는 백병전도 처절하고 치열하게 묘사해서 보는 재미를 더합니다. 롱테이크라고 하긴 좀 그렇지만 슬로 모션을 걸어서 한번 쭉 이어가는 장면 같은 걸 보면 상당한 공을 들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연기와 연출도 좋았지만 촬영에서 특히 세심한 노력을 들였을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종합하면 "돈을 들은 티가 납니다"

남은 건 고증입니다. 김한민 감독은 <최종병기 활>로 고증이라는 면에서 적지 않은 호평을 받은 터라 <명량>에도 기대가 컸습니다. 이미 말했다시피 이것에 부합하면서 어느 정도 만족을 시켜줬습니다. 일본의 화승총이 견고한 판옥선의 선체에 막혀 타격을 주지 못하거나, 근접전에서 조란환을 쏴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등은 고증을 아주 적절히 활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몇 가지 다른 것도 분명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순신 제독의 목숨을 노리는 일본의 XXX는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화포의 사정거리도 어마어마하게 길어서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더 자세하고 정확한 건 제가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니 다른 분께 맡기지만, 극적인 재미를 위해서 필요했던 부분이라는 걸로 넘어가기에 큰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덕분에 <명량>은 올 여름 개봉하는 한국영화 '빅 4' 중에서 관객을 가장 만족시킬 수 있게 될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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