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사회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세월호의 침몰 사건이 발생한 지 100일이 넘었다. 이제 세월호는 ‘사회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이행되었다. 이는 논란의 중심이 ‘세월호 특별법’이란 법제도적 문제에 봉착했기 때문이고, 이는 피할 수 없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갈등과 적대의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는 사건 대처의 본질이 변질되거나 변형된 것은 아니다. 새누리당의 논리처럼 순수 유가족들 이외에 불순한 의도의 정치적 의도와 세력의 개입된 결과가 아니다.

사회는 순수할 것이라는 기대는 착각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황이란 홉스(Thomas Hobbes)의 묘사는 사회를 바라보는 익숙한 사고체계이다. 오히려 홉스의 논의에서 집중해서 검토해야 할 점은 투쟁하는 상황이 아니라, 만인이란 대상이다. 롤즈(John Rawls)와 같은 자유주의 관점에서 만인은 독립되고 원자화된 개인이다. 샌델(Michael Sandel)에 의하면 이러한 자유주의적 주체들은 아무런 연고도 가지지 않는 무연고적 자아(the unencumbered self)이다. 이러한 자아는 사회를 살면서 존재하는 자아가 아니라, 만들어지거나 구성된 주체이다. 인간은 사회를 살아가면서 각각의 입장을 갖으며 학습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은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어떤 입장들은 형성되어 있다. 내가 슬픈게 아니었고, 우리가 슬펐다라는 점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세월호는 앞으로 사건에 대한 ‘기억’이란 상징에 의해 각 입장들이 나누어지게 될 것이다. 기억의 구체적인 의미 뿐 만 아니라, 그 기억이 단기기억으로 슬퍼하느냐 장기적인 기억으로 추모하느냐에 따라 (지나가는 시간, 곧 세월에 의지하여) 입장들의 차이가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미 세월호를 둘러 싼 정치적 시공간들이 형성되었다. 혹시 정치적이란 표현이 불편하다면, 정치를 때 묻은 것이란 이미지로 이해하며, 현실 정치의 더러움에 의한 착시현상일 뿐이다. 칼 슈미트(Carl Scmitt)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이란 갈등과 적대로 인간의 존재론적 조건을 결정하는 하나의 차원으로 가정한다. 갈등과 적대는 사회적으로든 정치적으로든 제거 불가능하다. 세월호 사건은 발생 당시의 의문에 의해 이미 벌어졌을 때부터 갈등을 내재한 사건이었고, 쉽게 진실이 밝혀지지 않는 한 기억에 대한 투쟁적인 상황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부정과 회피와 무능의 정치적 증상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을 단순히 일시적인 진통으로 치부하면서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갈등 자체에 문제만을 문제로 삼거나, 그러한 갈등을 퇴색시키거나 오용하려는 여러 시도들이 벌어지게 된다. 샹탈 무페(Chantal Mouffe)는 이러한 현상들을 일종의 증상(symptom)으로 진단한다. 세월호 사건으로 인한 논의들은 정치적인 것으로 이행하면서 이러한 증상들이 여러 갈래로 발생되기 시작하였다. 무페는 이러한 갈등을 무마하려는 현상적 차원에서 부정과 회피, 무능으로 인해 발생된다고 이야기한다.

지난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 출몰한 ‘엄마부대봉사단’(엄마부대)은 이러한 사건을 부정하려고 하는 시도의 일부이다. 이미 새누리당은 이번 사건을 교통사고와 같은 지위로 해석하고 있다. 이러한 인식적 상황에서 엄마부대의 출현은 기존의 보수집단(어버이 연합 등)과 비슷하지만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다. 보수단체는 국가와 지배적인 정부의 이데올로기를 시민적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지배세력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는) 아바타와 같은 역할을 하여왔다. 그들의 역할은 정치적인 것을 전환하면서 이야기되는 문제에 이를 반대하는 다양한 의견(혹은 다른 의견)이 존재함을 나타내고자 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법은 그 동안은 어떤 특정한 국가관을 바탕으로 한 그들만의 정치적인 윤리를 강조하였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엄마부대는 유가족들이 주장하지도 않는 의사자 지정이나 특례입학 등을 물고 넘어지면서 무리한 요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유병언도 죽었으니, 이제 세월호 관련 논란을 끝내고 경제와 민생을 살리자는 이러한 요구는 자식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는 유가족들에게 할 수 있는 윤리적인 주장이 아닐 뿐 아니라 극단적인 상징 폭력이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마주치는 것은 사건에 대해 회피하고자 하는 무의식을 자극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월호는 단일 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장기화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처음 사건이 발생부터 국민적인 충격이었다. 세월호 사건은 당사자들 뿐 아니라 지켜보고 있던 시민들도 괴로웠고, 그렇기에 그러한 사건의 충격을 회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잠재되고 있다. 이는 도덕적인 결함의 문제가 아니다. 끔찍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본능이다. 게다가 사건이 발생한 이후 시간적 소멸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하나의 이슈나 아젠다가 영속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문제로 난항에 빠져들었을 때, 관심은 자연스럽게 줄어들게 된다.

▲ 세월호 농성장에서 진행 중인 '광화문을 그리다' 캠페인에 참가한 자원봉사자들이 농성장에 걸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오마이뉴스)

내버려둠으로써 발생되는 폭력들

문제는 이러한 태도들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회피하는 입장들로 인해 발생되는 효과이다. 세월호 사건을 지우기 위해서 다른 이슈로 덮어버리거나, 다른 가해자(적대)를 발명하는 방법으로 희석시키려는 시도는 (그들 입장에서는) 정치적인 시도이고 지배세력의 익숙하고 전형적인 수법이다. 이러한 시도에 반응할 수 밖에 없는 것은 동일성에 기반 할 수 있는 (상상적) 공동체가 부재하여 (정치적) 소비 개인 주체로 회귀 현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존재하며, 유족들은 단식을 하면서 거리를 나오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태도 역시 발리바르(Balibar Etienne)가 보기에는 내버려둠으로써 간접적으로 가해지는 ‘초객관적 폭력’의 일부이다.

이는 세월호 사건으로 구성되어가는 상징과 가치들이 전환되어 공동선으로 구축되지 못한 한계에서 발생한다. 동일성을 재구성하고자하고 새로운 생산을 하기에 방해되는 것은 역설적으로 현실 ‘정치적인 것들’의 무능에 의해 발생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지도부는 이번 국회나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이 단식을 하는 곳이 아닌 재보선 지역인 수원 영통에 천막을 쳤다. 이러한 무능은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떠한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기본적 성찰조차 없음을 보여주었다.

다시 정치적인 것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되면서 부정과 회피 그리고 무능은 현상적으로 발생하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현상적인 문제들에 대한 또 다른 문제제기는 아니다. 이는 생산적인 갈등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들을 무화하면서 시도하는 부차적인 문제일 수 밖에 없다. 결국 정치적 갈등의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은 쉽지 않을 뿐 아니라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발리바르는 휜스테렌(Herman Van Gunstereren)의 ‘운명공동체’라는 개념을 받아들인다. 여기서 운명이란 초월적이거나 세월 따위에 의존하자는 것이 아니다. 정치적 갈등의 피곤함을 포기하지 않고 운명처럼 받아들이면서, 갈등을 꾸준하게 섭취하면서 조절하여야 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세월호의 문제는 앞으로도 지난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 공감했던 사람들도 서서히 이탈하고 있고 어쩌면 (불행하게도) 정치적 사안의 유통기한은 이미 시스템적으로 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스템과 원리들을 간파한 채,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은 그 자체로서 개인적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사회적인 것에서 정치적인 것으로 전환된 세월호의 문제가 다시 사회적인 어떤 것으로 전환되어 사회적 변화를 만들 수 있는 어떤 기획들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미 우리에겐 여러 실패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예전 광우병으로 인한 촛불시위도 당시에는 정치적인 것으로 재현되었다. 또한 여러 정치적 사안에서 시청이나 광화문 등지에서 시민주체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상적인 정치적인 행위들이 실제적으로 사회를 변화시켰는지에 대해서는 내부적 평가가 필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할 수 있는 것이 단지 모이기만 하는 것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모이는 것 만 으로도 위로를 받았다. 예전 광우병의 촛불시위는 미국산 소고기의 반대를 위한 시위였다. 대부분의 정치적 시위 행위는 반대와 적대에 의한 반응에 머물렀기에 한계가 있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사건은 특별법이란 새로운 제도적 생산을 목적으로 모였다. 세월호 특별법은 단지 세월호만의 진실을 알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다른 구조적 모순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중요한 사례가 될 것이다. 정치적인 반대를 넘어서 사회적인 생산을 목적으로 하여 포기할 수 없는 기회이다. 이젠 세월호를 잊지 않겠다는 다짐 이외에 망가져버린 우리 사회에 어떤 운명을 걸고, 다른 공동체적인 가치를 만들고 사회적 생산을 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해야 할 단계에 왔다.

* 이 글은 문화연대 웹진 <문화빵>에도 실렸습니다.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