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인증서와 액티브X가 없으면 중국 시민들이 ‘천송이코트’를 못 사는 줄 알았다.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은 규제개혁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공인인증서 및 액티브X 때문에 외국인이 ‘천송이 코트’를 살 수 없다”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천송이코트’는 한 순간에 한국사회의 '적폐'를 설명하는 대표 비유가 됐다.

대통령 말 한다미에 한국사회 대표 ‘적폐’ 됐던 ‘천송이코트’

실제 인증서를 내려받고 액티브X를 설치하지 않으면 결제 자체가 안 되는 사이트가 많았고, 그래서 박 대통령을 찰떡같이 믿었다. 정부는 서둘러 공인인증서 제도 개선을 추진했다. 외국인이 한국의 쇼핑사이트에서 천송이코트를 ‘직구(직접구매)’할 수 없다는 보도도 꾸준히 나왔다. 4월 <연합뉴스> 기사 <외국인이 ‘천송이 코트’ 사려면 산너머 산>에는 한국에 거주하지 않는 외국인들이 천송이 코트를 사실상 구입할 수 없는 이유가 여러 개 나온다. 외국인 대상 사이트를 운영하는 큰 사이트를 제외하면 휴대전화 또는 아이핀 본인확인을 할 수 없어 회원가입부터 안 된다. 카드결제와 해외배송 등 모든 단계에서 막힌다.

▲ 지난 3월20일 오후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제1차 규제개혁 장관회의 및 민관합동 규제개혁 점검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마무리 발언을 하는 장면. 천송이 코트 발언은 이날 이 자리에서 나왔다. (사진=연합뉴스)

그러나 외국인이 공인인증서 없이 간편하게 천송이코트를 구입할 수 있는 방법은 있었다. <경향신문>은 7월29일자 1면 기사 <“공인인증서 탓에 중국서 ‘천송이 코트’ 못 산다”는 대통령 말…사실이 아니었다>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발언 당시에도 비자카드, 마스터카드 등 해외겸용 카드를 이용했다면 천송이코트를 살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구매금액이 30만 원 이상일 경우, 공인인증서 본인확인이 필요하나 해외카드는 예외다.

부랴부랴 대통령에 말에 정책을 끼워 맞추는 금융위, '네들이 고생이 많다'

박근혜 대통령 발언 이후 4개월이 지나 나온 지적에 금융위원회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고 “당시 일부 쇼핑몰에서 영문사이트 등을 구축해 판매를 한 사례는 있으나, 이 경우에도 30만 원 이상 상품을 인증서 없이 판매했다면 이는 위법”이라고 해명했다. 금융위는 이어 “3월 당시 규제개혁장관회의 등에서 지적된 문제는 ‘30만 원 이하의 천송이 코트의 구매가능성’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다”며 박 대통령 발언 취지를 대신 설명했다.

금융위 해명대로라면 외국인들은 박근혜 대통령 발언 당시에도 30만 원 이하 천송이코트를 ‘불편하게’ 살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경향신문>은 7월30일자 2면에 재반박 기사를 싣고 “금융당국이 국내 온라인 쇼핑몰의 ‘천송이 코트’ 중국 판매를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박근혜 대통령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박 대통령 발언에 일부 오류가 있었으나 관료들이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직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틀 동안 나온 천송이코트 논란은 <경향신문>과 금융당국 취재원, 그리고 금융위원회 사이 갈등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렇게만 볼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 발언 이후 전면적인 개혁(?)이 시작됐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 6월 이미 중소업체를 위한 외국인전용 쇼핑몰 ‘케이몰24’(Kmall24)를 구축했다. 이곳에서 외국인들은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 없이 국내업체의 온라인쇼핑을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물론 천송이코트도 쉽게 살 수 있다.

▲ (사진=국민TV)

대통령의 발언 전엔 좌절됐던 시도가 정부 방안이 되는 풍경

정부는 간편결제 시스템을 마련하겠다며 한 발 더 나갔는데 이게 중요하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8일 미래창조과학부와 함께 ‘전자상거래 결제 간편화 방안’을 내놨다. 핵심은 전자상거래시 결제금액과 관계없이 휴대폰 인증을 중심으로 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것. 이밖에도 금융위는 미국의 Paypal이나 중국의 Alipay처럼 간편결제가 가능하도록 여건을 조속히 마련하고, 글로벌 웹 표준(HTML5) 확산을 위한 기술 지원도 강화할 계획이다.

여기서 짚어야 할 사건이 있다. 지난해 인터넷서점 알라딘은 현재 금융위가 선보이겠다는 결제방식보다 간편한, 모든 웹브라우저에서 액티브X 없이 결제가 가능한 시스템을 시도했으나 카드사들의 중도 이탈과 금융감독원의 반대로 무산됐다. 알라딘은 앞서 2009년에도 업계 최초로 간편결제 시스템을 시도했다 실패한 바 있다. 별 다른 사고도 없었고,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았지만 삼성 BC KB국민 신한 등 카드사들은 보안을 이유로 중도이탈했다.

알라딘의 시도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첫 결제 때 카드번호와 유효기간을 서버에 저장하고 이후 비밀번호만 입력하는 프로파일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카드회사가 고객에게 결제금액을 문자메시지로 보내고 고객이 이를 확인하는 금액인증 방식이었다. 두 가지는 액티브X 없는 간편결제 시스템인데 서버에 저장된 신용카드 정보와 고객의 비밀번호가 동시에 유출(금액인증 방식의 경우 휴대전화 분실)되지 않는 한 보안에서도 큰 문제가 없었다.

이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카드회사들이 간편결제를 적극 반대한 데 있다. 우리가 신용카드로 전자상거래를 할 때 결제를 대행하는 회사(전자지급결제대행업체), 일명 PG사(Payment Gateway)들은 주로 카드회사의 자회사인데 카드사들이 대행수수료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카드회사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두 번 거쳐야 이익이 더 남고, 결제가 편할수록 이익은 준다. 이번 금융위의 결제 간편화 방안에는 카드사의 이해관계가 그대로 반영됐다.

▲ 금융위원회가 7월28일이 배포한 보도자료 중 일부.

결국, 대기업 카드회사의 자회사를 간편결제 시장에 투입하겠단 금융위

금융위 방안을 보면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기술력 보안성 재무적 능력을 충분히 갖춘 PG사들이 카드정보를 저장할 수 있도록 여신금융협회의 ‘신용카드 가맹점 표준약관’을 개정”하겠다는 내용이다. 물론 금융위는 “신용정보를 보유하는 PG사에 대해서는 검사·감독을 엄격히 해 책임성을 더욱 강화할 계획”이라고 밝혔으나 핵심은 능력 있는 대기업 카드회사의 자회사인 PG사들을 간편결제 시장에 투입하고 더 큰 정보를 주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미래부는 하나를 더 얹었다. 정부는 액티브X 없는 웹 표준을 권하고, 공인인증서를 요구하는 관행을 없애면서 다양한 공인전자서명기술을 도입할 계획인데 미래부가 내놓은 것은 “전자서명 이용자의 편의성 증진을 위해 생체정보 등을 활용하는 새로운 공인전자서명 기술의 도입”이다. 미래부는 8월부터 생체정보 공인인증 기술 도입을 촉진할 계획이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 대신 고객의 생체정보 등을 인증수단으로 삼겠다는 이야기다.

카드번호와 유효기간, 비밀번호만으로 결제할 수 있는 사이트도 꽤 있다. 더 간편하면서 보안도 갖춘 간편결제시스템을 시도한 경험도 있다. 그런데 정부는 카드회사의 이익만을 적극 대변해왔고, 카드사는 아마존이 이미 수년 전에 시행했던 결제시스템마저 거부했다. 이번에 금융위와 미래부가 내놓은 결제 간편화 방안도 마찬가지다. 공인인증서와 액티브X가 천송이코트 쇼핑을 방해했다면 정부는 이를 명분 삼아 대기업 먹거리만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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