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발표를 믿으면 ‘바보’ 취급받는 시대, 바야흐로 '음모론의 전성시대'다. <리얼미터> 여론조사 결과 국민들의 절반 이상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발표를 믿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다. 특히 ‘2040세대’의 경우 70% 이상이 국과수의 발표를 불신하고 있다.

음모론이 이토록 창궐한 것은 전적으로 정부의 책임이다. 정부가 책임 있는 진상규명에 나서지 않고 대통령과 청와대의 책임만을 면피하는 것이 목표로 여겨지기 때문에 음모론이 창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반 국민들이 음모론을 믿지 않는 것과 제1야당이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이 박지원 의원과 박범계 의원을 통해 제기하는 ‘유병언 사체 가짜 음모론’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책임 있게 규명해야 하는 역할을 가진 공론장을 어지럽히고 있다. 여론에 기대어 재보궐선거에서 유리한 결과를 내려는 무리수인지 모르겠으나, 훗날 반드시 ‘부메랑’으로 돌아올 일이다.
박범계 의원, ‘무능한 경찰’의 말을 믿고 국과수를 조롱하나
박범계 의원의 주장은 당시 시신을 발견한 경찰 간부들이 그 시신이 유병언 전 청해진해운 회장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했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그런데 이는 우리가 익히 아는 일이다. 경찰은 그 시신이 결코 유병언 전 회장이 아니고 노숙자라 단정했기 때문에 유류품 검사조차 하지 않는 무능한 행태를 보였다. 경찰이 발표한 유 전 회장의 키가 165cm가 시신인 159cm와 맞지 않는다는 의혹도 경찰의 실수로 규명되었다. 경찰은 유 전 회장의 키를 160cm로 화급하게 수정했다.
▲ 유병언 시신의 진위에 관한 의혹을 제기한 새정치민주연합 박범계 원내대변인의 모습 (연합뉴스 자료사진)
국과수는 자신들의 결론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민간법의학자들까지 대동하여 검증 과정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사인을 밝히지 않은 이상 규명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으나 규명할 증거가 없는 문제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것은 과학이 아니다. 박범계 의원이 설득력 있는 주장을 하려면 적어도 40일 동안 유령을 쫓아다닌 무능한 경찰이 아니라 민간 법의학자를 대동했어야 옳다. 박범계 의원도 판사 출신인데, 해당 분야 전문가와 ‘과학자의 양심’을 모독하는 일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박지원 의원, 동네 주민 기억력과 정황증거로 통신망의 기록을 부정?
박지원 의원의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박지원 의원은 동네 주민들의 진술을 토대로 국과수가 유병언의 것이라 밝힌 사체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으며 심지어는 세월호 참사 이전에 거기 누워 있었다고 주장한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이전이라면, 도대체 왜 동네 주민의 증언에 등장하는 경찰과 기자(?)는 세월호 참사를 미리 대비(?)하여 책임을 떠넘길 노숙자의 시체를 구했을까. 설마하니 세월호 참사가 정권의 기획이라 믿는 것일까. 박근혜 정부는 뭐하러 자신들의 ‘콘크리트 지지율’을 깨뜨릴 그런 멍청한 기획을 한 것일까.
▲ 새정치민주연합 박지원 의원이 27일 국회에서 유병언 청해진 회장의 사체 발견 현장 사진을 보여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연합뉴스)
동네 주민들의 증언들을 논박할 자료도 있다. 일단 동네 주민이 신고한 112는 전국적인 통신망 체계로 되어 있다. 신고한 이의 전화번호, 신고시간이 기록에 남고, 통화내용 마저 음성으로 녹음된다. 연로한 동네 주민들의 오락가락하는 증언과 상관없이 그 내용을 통해 해당 기록의 음성이 그 동네 주민임을 입증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정부가 112를 해킹해서 기록을 변조했다는 터무니없는 의혹을 믿느니 보단 차라리 동네 주민의 기억력을 의심하는 것이 낫다. 전라남도 순천에선 한달이 수십여구의 변사체가 발견된다고 하고, 당일에도 신고된 변사체는 네구였다고 한다. 시민들이 이런 사실을 잘 모를지라도, 시민보다 훨씬 풍부한 정보를 접하는 국회의원들이 이를 모르기는 힘들다. 만약 모른다면, 정부에 대한 불신과 선거 승리에 대한 욕심에 눈이 멀어 정보를 머릿속에서 선택적으로 왜곡한 결과일 것이다.
무능한 검경으로 책임회피해려 했던 정권의 ‘멘붕’
여기서 29일자에 실린 <한국일보> 이충재 논설위원의 칼럼의 서두를 감상해보자. 이충재 논설위원은 다음과 같이 칼럼을 시작한다.
“야!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지난 21일 저녁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 시신의 DNA감식결과를 보고 받은 서중석 국립과학수사연구원장의 첫 마디다. 안전행정부 장관과 연락이 닿지 않아 서 원장으로부터 대신 전화보고를 받은 안행부 1차관은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느냐”고 했고, 연이어 소식을 전해들은 경찰청장 검찰총장 법무부장관도 “그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이었다.

유씨 변사체 발견은 국과수 원장, 검경 수사 총책임자에게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방금까지 눈에 불을 켜고 찾던 사람이 한 달도 훨씬 전에 이미 사망했다니. 한데 숨진 이의 신원 확인을 안 해 그 동안 모르고 있었다니. 막장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런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인 일을 누군들 믿을 수 있겠는가. 그러니 일반 국민이 불신을 갖고 의혹을 제기하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왜 믿지 못하느냐”고 윽박지를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을 만든 이들을 탓하는 게 옳다.(...)
- <한국일보> 이충재 칼럼, <박근혜 정부를 못 믿는 이유>
▲ 29일자 한국일보 26면 이충재 논설위원의 칼럼
그렇다. 국민들이 정권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서 보이는 것은 검찰과 경찰의 총체적 무능이지 다른 것이 아니다. 검찰과 경찰은 유병언 전 회장의 시신을 바꿔치는 수준의 공작을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검경이 유병언 전 회장을 죽이려고 했다면 이유가 있어야 한다. 대다수 국민들은 유병언 전 회장이 현 박근혜 정부와 가지고 있는 관계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추정한다. 설득력이 없는 분석이다. 왜냐하면 안전행정부 산하 법의학자들을 매수하는 것보다는 검찰을 조종하는 것이 훨씬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정부의 의도는 매우 명백하게, 유병언 일가를 제물로 삼아 세월호 참사의 진상 규명을 일종의 ‘푸닥거리 굿’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랬는데 그만 유병언 전 회장이 무능한 검경의 포위망을 피해 죽어버려 ‘멘붕’이 왔다고 보는 것이 훨씬 상식적인 해석이다. 유병언 전 회장의 증언이 두렵다고? 검찰이 갑자기 인권 기준을 선택적으로 지켜 피의자 진술을 언론에 공표하지 않으면 될 일이다. 그 시간에 국정원이든 검찰이든 나서서 유 전 회장과 박근혜 정부의 연결고리가 있다면 그 증거를 지워버리면 될 일이다.
이명박 정부의 민간인 사찰 의혹에 관한 대응에서 본 바, 한국 사회의 보수 정부는 아직까지 그런 일을 벌일 수는 있을 정도다.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그렇게 우리 사회가 부족한 부분을 직시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이미 어느 정도 권력분립이 되어 있고 정권도 전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공공기관을 의심하는 일은 실익이 없다.
검증된 의혹이 아닌, 검증 안 된 새로운 의혹들을 제기해야
▲ 29일자 한겨레 30면에 실린 김우재 박사의 칼럼
초파리 유전학자 김우재 박사는 29일자 <한겨레>에 실린 <유병언에서 국과수로>란 제목의 칼럼에서 “국과수가 유병언의 디엔에이를 조작할 이유는 없다. 조작한다 해도 금방 들통날 일이다. 오히려 우리는 디엔에이 감정 한 건에 40여일이나 걸릴 수밖에 없었던, 국과수의 열악한 현실에 눈 돌려야 한다. 국과수가 효율적으로 작동했다면, 검경이라는 값비싼 공권력이 40여일을 낭비하고, 이처럼 국민에게 신뢰를 잃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이는 전적으로 타당한 분석으로, <한겨레> 지면이 과학자에게 개방되면서 생겨난 순기능을 잠깐이나마 보여준다.
적어도 이 사체가 유병언이고, 언제부터 거기 누워 있었든 그 시간에 민간의 신고가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의혹 제기가 가능해진다. 김우재 박사의 글에선 제기 가능한 의혹의 일단이 나온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디엔에이 감정은 비교 대상을 특정해야 한다. 지문처럼 모든 국민의 정보가 데이터베이스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검경은 국과수에 디엔에이 감식을 의뢰할 때부터 사체를 유병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유병언의 대퇴부 뼈에서 채취한 디엔에이는 구속된 유병언의 형의 디엔에이, 유병언의 자택에서 발견된 체액에서 추출된 디엔에이 등과 비교된 것으로 알려졌다. 개인마다 길이가 제각각인 유전체의 부위 중 13군데를 선택해서 비교하는 것이 현재 디엔에이 지문감정의 표준이다. 약 10여 종류의 변이체가 존재하기 때문에 그 조합은 10의 13제곱, 세계 인구의 천 배를 넘는다. 유병언의 경우 형의 디엔에이와 부계 와이(Y)염색체 마커, 모계 미토콘드리아 분석에서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발견된 사체가 유병언이 아닐 경우에도, 유병언과 부모를 공유하는 형제라는 뜻이다. 100% 확실한 것은 아니다. 10의 13제곱에 1 정도의 불확실성이 존재한다 (...)”
- <한겨레> 김우재 칼럼, <유병언에서 국과수로>
김우재 박사가 제시한 맥락은 이중채 논설위원이 묘사한 화들짝 놀란 검경의 풍경과는 또 다르게, 검경의 적어도 일부에서 이 사체가 유병언 임을 의심하는 이들이 있었다는 의혹을 야기한다. 이 문제 역시 다른 맥락이 밝혀지면서 설명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제기할 수는 있는 의혹이다.
박지원 의원이 제시한 의혹 역시 마찬가지다. 그가 내민 정황증거는 '시체 바꿔치기'의 가능성보다는 검경의 일부가 그 사체가 유병언 전 회장일 수 있음을 인지하고 책임전가를 위해 발표시기를 조율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문제 역시 다른 맥락이 밝혀지면서 설명될지도 모르지만, 현 시점에서 합리적으로 제기할 수는 있는 의혹이다.
세월호 참사, 유씨 일가 넘어 정부 대응 문제로 이동하자
무엇보다. 검찰과 경찰과 보수언론과 종편방송이 정권의 의중을 충분히 대변하여 벌이는 이 ‘유씨 일가를 제물로 한 푸닥거리 굿’에서 빠져나와야 한다. 그리하여 진실검증이 가능한 형태의 세월호 특별법을 통과시켜 대한민국의 문제를 대면해야 한다. 지금 시민들은 정부를 불신하면서도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의 대응이 과도하다 여기는 것으로 보인다. 새누리당은 "(해상) 교통사고다", "유가족들이 보상을 노린다", "국가를 위해 죽은 천안함 유족보다 더한 보상은 불과하다"란 논리를 유포하여 체계적인 대응을 하고 있다.이 시점에서 새정치민주연합은 도대체 '유병언의 시체'를 붙들고 무엇을 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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