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불미스런 사고로, 꽤 큰 금전적 정신적 손해를 겪었습니다. 불안과 분노와 두려움도 컸지만 사람과 세상을 경계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이 저를 괴롭혔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돈을 버는 인간들에게 과연 양심이란 게 있을까. 양심이 없으니 의심하고 의심해야지. 똑같은 수준의 양심을 갖고 있는 인간들이 아니야. 인간이 아닌 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인간들은 인간이 아닌 거지요. 이 사건으로 늘 깨어있어야 하고, 경계해야 하며, 조심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나 자신에 대한 믿음과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깨졌습니다. 의심과 불안이, 마음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세상이니 순진하게 뭘 믿을 수 없고, 늘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고, 안전하고 싶다면 아예 차단을 해야겠지요.
때마침 본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신뢰에 대한 영화였습니다.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인간과 유인원은 서로를 믿을 수 있는가' '유인원과 유인원은 서로를 믿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바이러스가 유포된 지 10년 후, 살아남은 소수의 인간들은 도심의 건물에 한데 모여 목숨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병에 대한 공포와 생존에 대한 불안에 지쳐있습니다. 반면 시저가 이끄는 유인원 종족은 숲에서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꾸리고 살아갑니다. 진화한 유인원들은 수화로 의사를 전달하고,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는 원칙을 계명 삼아 평화롭게 살아갑니다. 이렇게 서로의 존재를 모르며 살아가던 두 종족이 숲에서 마주하게 되면서 평화가 깨지기 시작합니다.
<혹성탈출: 진화의 시작>에서 시저는,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의 가정집에서 따뜻한 보살핌과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찰스 할아버지(존 리스고)는 시저를 친구이자 손자처럼 대해줬지요. 유인원 보호소에 갇히면서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라는 걸 깨달았지만 시저가 경험한 인간이란 '신뢰할 수 있는 따뜻한 존재'에 가깝습니다. 반면 코바가 경험한 인간은 달랐습니다. 코바는 연구실에 갇혀, 생체실험을 당하며 자랐습니다. 코바가 경험한 인간이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다른 이를 파괴할 수 있는 '폭력적이고 이기적인 존재'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이런 코바를 시저는 '인간에게 증오심만 배웠다'고 표현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을 믿는 시저에게는 말콤처럼 공존과 평화를 중시하는 사람이 곁에 머뭅니다. 그러니 시저의 인간관은 그 단 하나의 이유로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나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그 믿음이 흔들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입니다. 인간들 또한 어느 부류는 인류의 멸망을 유인원 탓으로 돌립니다. 인류의 멸망은 제약회사가 알츠하이머를 치료하기 위해 만든 약이 바이러스를 일으키면서 시작됐습니다. 이 점에 대해 인간의 탓이라고 인정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어느 부류는 피해의식에 젖어 유인원을 공포와 공격의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서로를 신뢰하기엔 이미 한 종족 안에서의 신뢰도 확보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신뢰란 '다른 실체가 자신이 기대하는 바와 똑같은 행동을 하리라고 가정할 수 있는 믿음'을 의미합니다. 양심과 행위의 급이 같은 존재들만이 약속 하에서 공존을 꾸릴 수 있는 거지요. 이러한 신뢰의 문제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에서는 유인원과 유인원 사이에서도 다뤄집니다. 부족을 지키겠다는 명분으로 시저를 암살하고 인간에게 전쟁을 선포한 코바는 자신의 명을 거부하는 동료를 죽입니다. 코르넬리아의 치료로 목숨을 건진 시저는 코바와 몸싸움을 벌이다 절벽에서 코바의 손을 잡습니다. 이 때 코바는 "유인원은 유인원을 죽이지 않는다"고 외칩니다. 그러자 시저는 "너는 유인원이 아니다"는 말과 함께 손을 놓습니다.
스토리와 스케일, 모션 캡쳐 연기의 수준을 보면 아무 것도 불안해 할 것이 없는데, 무엇이 불안했는지 <혹성탈출: 반격의 서막>은 개봉 일을 앞당기는 반격을 가했습니다. 초기 통보된 개봉일에 맞춰 개봉일 스케줄을 기획한 타 영화들에게는 곤혹스런 소식이었을 겁니다. 영화 밖에서도 '신뢰'가 깨지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걸까요. 이를 통해 매사 의심하고 경계하라는 메시지를 심어주고 싶었던 걸까요. 약간의 씁쓸함과 함께 시저가 한 대사가 귓가에 맴돕니다. "코바를 믿은 게 잘못이었어" 또 하나의 적을 발견한 시저가 맞닥뜨릴 전쟁은 인간과의 전쟁, 마음속의 전쟁일 겁니다. 자기 종족에 대한 끝 없는 의심. 그러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대사이에서 저울질해야만 하는 시저. 시저는 매 순간 슬기로운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진심을 다해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