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의 시작

스포츠에서 선수를 영입하는 과정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일명 스토브 리그와 드래프트입니다. 스토브 리그는 시즌이 끝난 후 전력을 보강하기 위해 각 구단끼리 트레이드 등의 의사를 타진하거나 연봉협상을 펼칩니다. 드래프트는 주로 그 해에 프로로 입단하고자 하는 선수들을 대상으로, 모든 구단들이 성적에 따라서 순번을 나눠 원하는 선수를 자신의 팀으로 데리고 오는 제도입니다. 이 드래프트에는 장점과 단점이 많습니다. 표면적인 장점이라면 역시 부유한 구단이 뛰어난 선수들을 싸그리 점유하는 사태를 막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하위권 팀에서는 최고의 유망주를 영입하여 전력을 상승시킬 수 있는 절호의 무대가 바로 드래프트입니다.

당연히 가장 큰 주목을 끌면서 1순위로 지명된다면 그 해의 드래프트에서 최고의 실력을 가진 선수라는 걸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게 곧장 프로에서의 진짜 실력으로 이어지는 건 아닙니다. 대표적으로 스포츠 사상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인 마이클 조던이 있습니다. 마이클 조던은 1984년에 3순위로 지명됐지만 그 결과는 여러분이 아는 그대로입니다. 다만 이것은 마이클 조던을 패스한 두 팀이 멍청하다는 걸 의미한다고 볼 순 없습니다. 아시다시피 단체 구기종목에서는 포지션이란 게 있기 때문에 각 포지션에 필요한 선수를 데려오는 게 현명한 선택입니다. 예를 들어 이미 훌륭한 투수가 있다면, 굳이 또 투수를 영입하는 것보다는 다른 취약한 포지션을 보강할 수 있는 선수를 영입하는 게 맞습니다.

신인선수가 쏟아지는 드래프트는 그만큼 각 팀에게 중요합니다. 성적의 역순으로 드래프트 순서를 배정하기에 1순위 지명권을 가진 꼴찌로서는 사활을 걸고 최고의 신인을 영입해야 합니다. 다른 팀은 앞선 지명권을 가진 팀이 어떤 선수를 영입할 것인지 예측하고 거기에 맞춰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만약에 예상이 어긋나기라도 한다면 낭패니 여러 가지 변수를 감안해서 치밀한 전략이 필요합니다. 잠깐, 근데 왜 여기서 이걸 구구절절 떠드냐고요? 지금부터 그걸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드래프트 데이>를 보면서 기대한 게 이런 이야기였는데 완전 낭패를 봤기 때문입니다.

뒤통수의 서막

드래프트와 관련한 영화는 근래에도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빌리 빈의 실화를 다룬 <머니볼>입니다. 메이저리그 구단인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단장인 그는 '세이버매트릭스'로 팀을 혁신적으로 재건하는 데 성공했던 입지전적의 인물입니다. 유망주 위주로 선수를 영입했던 빌리 빈은 드래프트에서도 재미를 봤습니다. <머니볼>에서 더 거슬러 올라가면 피도 눈물도 없는 프로 세계를 통해 진한 인간미를 보여줬던 <제리 맥과이어>가 있습니다. 빌리 빈과 달리 제리 맥과이어는 스포츠 에이전트로, 드래프트 등에서 자신의 선수가 더 많은 금액을 받고 입단할 수 있도록 실력을 행사하는 핵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희대의 사기꾼 또는 협상의 천재로 불리는 스콧 보라스를 통해 잘 알려진 직업이기도 합니다.

<드래프트 데이>는 이 두 영화의 중간쯤에 있을 것 같았습니다. 주인공인 써니는 NFL 구단인 클리블랜드 브라운스의 단장입니다. 그가 새 시즌을 앞두고 드래프트로 팀을 보강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은 영화가 <드래프트 데이>입니다. 하지만 굉장히 긴박한 순간 속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오고갈 것이라고 예상한다면 작은 코라도 얼마든지 다칠 수 있습니다. 사실 이건 일찌감치 눈치를 챘어야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프트 데이>는 미식축구의 인기가 절대적인 북미에서의 흥행성적이 영 신통치 않았습니다. 미식축구 결승전인 '슈퍼볼'이 전 세계인의 주목을 받는 챔피언스 리그를 시청률에서 능가하는 지역인데도 말입니다. 북미 박스 오피스를 전하면서 이게 참 의아했는데 막상 보니 그 이유를 명백하게 알 수 있더군요. 한마디로 말해 <드래프트 데이>는 제가 바랐던 영화에서 한참 벗어났습니다.

항상 재치와 유머로 승부하던 이반 라이트만은 아무래도 스포츠에 큰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스포츠에 문외한인 관객까지 섭렵하려고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독이 되는 해법을 고수하다가 함정에 빠졌을 것입니다. <드래프트 데이>는 <머니볼>이나 <제리 맥과이어>가 그랬던 것처럼 스포츠 경기 그 자체가 아닌, 막후의 현장을 담은 영화입니다. 할 수 있는 이야기와 할 이야기는 얼마든지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도 <드래프트 데이>는 각본과 연출에서 모두 스포츠의 세계를 멀리하고 온전히 인간적인 드라마를 그리는 데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이 영화는 드래프트 시작 12시간 전을 배경으로 하고 문을 열면서도 긴장감이라는 건 거들떠도 보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야말로 혼란과 고난에 빠진 써니가 그것을 극복하고 일과 사랑을 동시에 쟁취하는 능력 좋은 남자의 성장기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드라마가 날개를 달아줘요?

스포츠 드라마가 아닌 휴먼 드라마를 지향했다고 해서 나쁘다는 건 결코 아닙니다. <제리 맥과이어>를 한번 보세요. 엄밀히 말해서 이 영화는 스포츠의 세계를 발판으로 삼은 휴먼 드라마라고 보는 게 적절할 것입니다. 소재와 인물을 연결하고 능숙하게 활용하여 드라마틱한 이야기로 감동을 자아내는 카메론 크로우의 능력은 발군입니다. 아마 <드래프트 데이>도 이런 노선을 취하려고 계획했을 것 같습니다만, <제리 맥과이어>와 달리 <드래프트 데이>에 제가 실망한 이유는 드라마를 주입하는 과정과 방법이 시종일관 너무나도 허무맹랑하다는 것입니다. 설득력, 개연성, 현실성이 모두 결여된 상태에서 억지로 캐릭터를 드라마틱하게 꾸미려고 하니 탈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 주변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면서 가뜩이나 머리가 뒤죽박죽인 사람을 궁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드라마의 기본은 갈등"이라는 말이 있으니 주인공에게 그것을 부여하는 것은 자연스레 필요합니다. 그러나 <드래프트 데이>는 외부가 아닌 내부의 인물, 그것도 주인공과 매우 밀접한 관계의 인물을 한심한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자지만 미식축구에는 도가 튼 애인 겸 부하직원은 자신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하고 많은 날을 두고 드래프트가 열리는 바로 그날에 말입니다. 이건 약과입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유해를 들고 와서는 사무실 뒤에 있는 운동장에 뿌릴 테니 함께 가서 기도문을 읊어달라고 조릅니다. 주인공의 아버지는 전설적인 감독이었는데도 말입니다. 즉 어머니란 사람은 평생을 아버지의 곁에서 보필했던 배우자며 아들이 어떤 직책에 있는지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초반에 드래프트와 관련하여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훈계까지 했습니다. 이런 인물들을 <드래프트 데이>는 나잇값 못하고 기행이나 일삼는 민폐로 전락시켰습니다. 이반 라이트만이 여성 캐릭터를 우습게 여기는 것처럼 보일 지경입니다.

<드래프트 데이>도 마지막에는 구색을 갖추려고 회심의 승부수를 띄웁니다. 길고도 황망한 잡담을 늘어놓더니 그제야 드래프트에 집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어느 정도 대미를 수습하는 데 먹히긴 합니다만, 감정적으로 현혹되지 않고 잘 보면 이것마저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사연의 조합에 불과합니다. 제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건 얼마든지 이해하지만, <드래프트 데이>가 취하는 태도는 평범한 인간에게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기준으로도 과할 정도입니다. 그렇게 애써 최고의 신인에게선 누구도 찾아내지 못했던 흠결을 잡아내더니, 정작 폭행을 저지른 선수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게 선뜻 면죄부를 주면서 이야기에 끌어들이고 있으니 어찌 황당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차치하더라도 결말이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대체 저 대단한 미식축구 구단의 단장들이 왜 그토록 멍청한 것인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애초에 써니가 내렸던 선택부터가 드라마를 끌어들이기 위한 무리수의 투척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반 라이트만의 유머와 재치는 여전히 간간이 빛나고 있으나 드라마에 있어서만큼은 아들에게서 좀 배워야 할 것 같습니다.

★★★

영화가 삶의 전부이며 운이 좋아 유럽여행기 두 권을 출판했다. 하지만 작가라는 호칭은 질색이다. 그보다는 좋아하고 관심 있는 모든 분야에 대해 주절거리는 수다쟁이가 더 잘 어울린다.
*블로그 : http://blog.naver.com/nofeetbir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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