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 KBS이사회는 조대현 전 KBS 부사장을 신임 사장 후보로 내정했다. 조대현 내정자에 대한 임명 제청안은 안전행정부로 간 상태로, 현재 박근혜 대통령의 ‘결재’만을 앞두고 있다. 결재가 떨어지면 조대현 내정자는 내년 11월 23일까지 약 1년 4개월 동안 KBS의 수장을 맡게 된다.

‘공영방송 사장의 노골적인 보도·인사 개입의 표면화’가 지난 5월 불 붙은 KBS 사태의 시작이었다. <뉴스9> 큐시트를 받아 보는 것이 관례화돼 있고, 국정원 대선개입 등 정권에 불리한 내용은 뒤로 빼되, 박근혜 대통령 동정은 앞에 배치하라는 ‘보도 원칙’까지 지시한 사장에 대한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KBS 구성원들은 너나없이 길환영 퇴진을 주장했다.

공영방송 KBS의 방송을 망쳐 온 사장은 결국 불명예 퇴진했지만 아직 상흔은 곳곳에 남아 있다. 그래서 어떤 사장이 오더라도 보도공정성 및 제작자율성을 훼손할 수 없도록 내부적인 장치를 만들어 잘 실천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내부 구성원들은 새로 조직을 만들고, 사측에게 수용을 요구할 단일화된 ‘안’을 완성하는 등 ‘새로운 사장 맞이’ 준비에 한창이다.

대토론회 열고, 평PD협의회 만들고…
‘제작자율성 사수’ 나선 PD들

교양문화국 PD들은 지난달 23일 <긴급 대토론회>를 열었다. 교양문화국 평PD 절반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토론회는 3시간 동안 이어졌으나 제대로 된 결론을 맺지 못했다. 그만큼 PD들이 느끼는 불만과 위기의식은 다양했다. 이날 가장 많이 나온 말은 ‘간부들이 해야 할 고민을 왜 우리가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뚜렷한 결론은 못 내렸으나, 교양문화국 PD들은 서로의 불만을 확인했고,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함께 움직이겠다는 데에는 뜻을 함께 했다.

1주일 후인 30일, 교양문화국 PD 74명은 <교양국을 살리기 위한 교양국 평PD 선언>을 통해 PD들의 입장과 다짐을 밝혔다. △모든 기획·아이템·MC·출연자는 제작진의 공적 논의를 거쳐 제작진의 제작 체계 내에서 자율적으로 결정 △상명하달식의 관제성 특집에 일방적으로 동원되는 것 거부 △프로그램 MC 선정 시 제작진의 공식 논의 통해 결정 △대표 브랜드 프로그램 발전 및 시사 기능 회복 △선후배 PD들이 협업할 수 있는 프로그램 신설 및 교양국 내 기획반 설치 △국장직선제 등 간부들의 역량 감시 시스템 확보 △교양국 인력관리에 대한 총체적 개선 등 총 7가지다.

▲ 지난 3일 발행된 KBS PD협회보
기획제작국 PD 98명은 지난달 24일 평PD협의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우선 △프로그램 공영성 및 제작과정 합리성 확보 △기획제작국 PD 상호 간 활발한 소통과 교류를 통해 바람직한 제작문화 만들기 △<KBS파노라마>의 능동적 시사기능 강화 및 아이템 결정 투명화 △<추적60분> 팀 내에서 결정된 아이템에 대한 제작방해 거부 및 제작진 자율성에 의한 아이템 선정 △<심야토론> 아이템·출연자·MC 선정은 팀장과 담당 PD가 결정 △가을 개편에 맞춰 시사 프로그램 부활 위해 노력 △개편 시 업무 분장은 PD 의견 최우선으로 존중 등 7가지 사항을 추진하기로 합의했다.

기획제작국 PD들은 “평PD협의회는 상시적이고 유연한 ‘민주적 모임’이 될 것”이라며 “프로그램별로 간사단을 구성해 주 1회 모임을 가지며 현안과 과제에 대해 논의해가고 있다. 국의 주요 사안과 프로그램 기획 관련 회의에 평PD협의회의 참여를 요구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본부장 평가제·편집 모니터 위원회·탐사보도팀 강화 요구
‘사람’이 망친 보도공정성 ‘제도’로 회복하려는 기자들

KBS기자협회(협회장 김철민)는 지난 7일 총회를 열어 보도공정성 강화 제도가 담긴 단일 안을 96.3%의 찬성률로 통과시켰다. 앞서 KBS기자협회는 지난달 9일부터 이세강 보도본부장 추인 아래 방송독립을 위한 제도 개선 TF와 뉴스 개선 TF 두 가지를 가동했다. 이때 “안을 조건 없이 수용하라”는 기자들의 요구에 이세강 보도본부장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각각의 TF에는 막내 기수부터 국장급 기자까지 10여명이 고르게 배치됐다.

KBS기자협회가 만든 안에는 △신임투표 결과에 따른 해임 의무 적시를 포함한 본부장 평가제 실시 △보도·시사 담당 국장 임명 동의제 시행 △뉴스 편집 모니터 위원회 가동 △탐사보도팀 강화 △보도정보게시판 익명화 추진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다.

KBS기자협회 김철민 협회장은 8일 <미디어스>와의 인터뷰에서 “방송법을 개정해 근본적인 거버넌스를 개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게 사실이다. 그래서 내부에서 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하자는 차원에서 TF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내부 견제 장치들을 구체화하고 구속력 있게 하기 위한 작업이었다. (단일 안 통과는) 새 지도부가 들어서면 우리의 안을 관철시킬 수 있도록, 사측과 교섭할 준비를 해 놓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KBS기자협회 심인보 정책1국장은 “사람만 바뀌는 건 의미가 없다. 더한 사람이 와서 우리 보도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제도를 바꾸는 게 중요하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돼 있었다”며 “젊은 기자들 입장에서는 다소 미진한 점도 있지만 최대한 보도본부 전체의 총의를 모았다는 것, (선후배 기자들) 양족 요구를 절충한 안이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해당 안은 KBS노동조합-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 양대 노조와 KBS이사회에 전달된 상태다.

KBS 4대 협회, 쇄신 인사 단행·실효성 있는 국장책임제 실시 촉구

KBS경영협회·KBS기술협회·KBS기자협회·KBS PD협회는 10일 연명 성명을 내어 조대현 내정자에게 KBS 정상화를 위한 선결과제 해결을 주문했다.

이들은 특별다수제와 사장추천위원회를 수용하지 않은 KBS이사회의 사장 선임 과정을 비판하며 “KBS가 거듭나 시청자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을 ‘정치적 독립’을 위한 제도를 전면적, 즉각적으로 공표하고 시행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대현 내정자에게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KBS 협회 및 양대 노조와 협의해 KBS 전 사원 이름으로 전면적인 혁신방안을 발표할 것”을 촉구했다.

이들은 △길환영 사장의 전횡과 줄 세우기로 피폐해진 KBS 간부 인사에 대한 전면적 쇄신△보도개입 및 제작자율성 침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질적인 국장책임제의 즉각 시행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을 위해 매진할 것 3가지를 요구했다.

이들은 “현재는 이사회의 통과가 아니라 국민들과 시청자로부터의 양해와 인정이 시급하고 절박한 상황”이라며 “대원칙 수용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보직사퇴와 제작거부 등을 포함한 전면적인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 지난 2010년 KBS 블랙리스트 논란이 일었을 때 '뉴스9'에 직접 출연해 해명한 조대현 당시 부사장의 모습

조대현 내정자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가 꼽은 ‘절대불가’ 후보는 아니었으나, 간부를 역임하며 각종 프로그램의 제작자율성을 침해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병순 체제에서 <시사투나잇>, <미디어포커스>를 폐지했을 때 그는 TV제작본부장이었고, 김인규 체제에서 G20, 천안함 등의 아이템이 과도하게 편성될 때 그는 부사장이었다. 더구나 좌파 성향 연예인을 배제시키는 것이 아니냐는 ‘KBS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졌을 때, “개탄스럽다”며 해명한 인물도 그다.

조대현 내정자는 과거의 흑역사와 결별하고 KBS 정상화에 매진할까. 아니면 ‘제2의 길환영’의 길을 택해 KBS 안팎을 다시 시끄럽게 만들까. 그의 결심에 KBS의 1년 4개월이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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