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는 그랬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는 것보다는 보일 듯 말 듯한 야릇함이 더 야하다고 말이다. 섹스버스터 <님포매니악>이 이런 경우에 속하는 듯하다. 자연색보다 살색이 스크린을 압도하는데도 관객이 침을 삼킬 때 꿀꺽 하는 소리가 하나도 들리지 않는 건 남녀의 잠자리가 야한 것이 아니라 다큐멘터리로 만들어버린 라스 폰 트리에의 연출 덕이다.

사랑의 마지막 종착지는 잠자리라고들 한다. 잠자리를 나누며 사랑의 종착지를 확인한다고들 하는데 <님포매니악>은 사랑의 이러한 공식을 보란 듯이 비웃는다. 사랑이 먼저가 아니라 몸이 먼저 반응하는, 사랑이 배제된 여자 색정광을 통해 사랑과 잠자리의 공식을 거꾸로 만들어버린다.

<님포매니악>의 도치는 이게 다가 아니다. 조가 사랑을 느낄 때 조는 <님포매니악 볼륨1>의 끝자락에서 오르가즘을 잃고 만다. 진정한 사랑을 할 때 여성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고의 극치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상실하고야 만다는 영화 속 설정은, 사랑하는 남자와의 잠자리가 사랑의 마지막을 확인하는 최종 관문이 아니라 사랑으로 말미암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역설을 보여준다.

즉, 두 연인의 온전한 사랑은 그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랑의 달달한 판타지가 아니라, 거꾸로 진정한 사랑에 들어서면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랑의 헌신’이라는 테제를 여자 색정광 조라는 캐릭터를 통해 라스 폰 트리에는 보여주고 있다.

잃어버린 오르가즘을 찾기 위해 마조히즘에 빠지는 조의 군상은, 오르가즘을 되찾기 위한 상실에 대한 보상으로도 잃을 수 있지만 더불어 중독에 대한 경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고 본다. 평범한 성생활로는 자극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더 나은 자극을 추구하기 위해 사디즘이나 마조히즘으로 빠져드는, 자극을 생의 최우선 목표로 삼아가는 중독에 대한 환유로도 읽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쾌락을 되찾기 위해서라면 가족이나 자식도 희생할 수 있는 조의 모습 가운데서, 쾌락 중추를 자극하기 위해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쾌락 중추를 자극하는 버튼만 눌러대다가 그만 굶어죽고 마는 실험실의 생쥐가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건 무리가 아니다.

밤을 새워가며 섹스에 대한 인생 여정을 들려주는 조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샐리그먼은 감성과 이성, 혹은 본능과 이에 맞서는 종교적 억압으로 읽을 수 있는 캐릭터다. 조는 충동적이다. 오르가즘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어린 아들을 홀로 내버려둘 정도로 정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감성적이고 본능적인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샐리그먼은 그녀의 이야기에 열광하거나 동조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듣거나 해석한다. 셀리그먼은 인간의 본능적인 충동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제나 성을 죄악시하고 터부시하는 종교적 도그마를 연상케 만든다. 그럼에도 이성을 상징화하는 샐리그먼의 마지막 반전은, 종교적인 테제 혹은 이성으로 인간의 본능을 억압하려 든다 해도 이성이 감성을 100% 지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쥬라기 공원>에서 태어나는 공룡의 젠더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려고 했지만 자연의 본능은 쥬라기 공원의 시스템을 비웃기라도 한 듯이 번식의 물꼬를 터놓았던 것처럼 말이다.


늘 이성과 감성의 공존을 꿈꾸고자 혹은 디오니시즘을 바라며 우뇌의 쿠데타를 꿈꾸지만 항상 좌뇌에 진압당하는 아폴로니즘의 역설을 겪는 비평가. http://blog.daum.net/js7keien

저작권자 © 미디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