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아베 신조 내각이 1일 일본 국가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가능하게 하는 헌법해석 변경을 각의 결정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과거엔 ‘개별적 자위권’ 행사만이 가능했다면 이 헌법해석 변경으로 ‘집단적 자위권’과 ‘집단안전보장’이 가능해졌다. ‘개별적 자위권’은 자국 공격에 대해 반격할 권리라면 ‘집단적 자위권’은 밀접한 관계의 타국에 대한 공격에 무력 반격할 권리이며 ‘집단안전보장’은 UN 결의에 따라 침략국에 무력 제재할 수 있는 권리다.

이는 1981년 스즈키 젠코(鈴木善幸) 내각 이후 지켜 온 ‘집단적 자위권 불인정’ 방침을 33년 만에 뒤집은 것이다. 이에 따라 전수방위(공격받았을 때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방위력 행사) 및 전쟁포기를 규정한 평화헌법 9조의 근간이 흔들리게 되었다는 평가다. 자위조치로서 무력행사가 가능한 요건으론, 일본에의 무력공격 및 밀접한 관계에 있는 타국에의 무력공격으로 일본의 존립이 위협받고 국민의 생명·자유 및 행복추구의 권리가 근저에서 뒤집힐 명백한 위험이 있거나, 일본의 존립을 유지하고 국민을 지키기 위해 다른 적당한 수단이 없을 경우, 최소한도로 필요한 실력(무력)을 행사한다고 정리되었다.
대부분의 한국 언론의 반응은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총리 맘대로 전쟁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이는 일본 언론의 반응을 참조한 것으로 전적으로 틀린 분석이라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총 한번 안 쏴본 자위대’의 성격 변화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의 논의지형은 이 사태를 바라보는 한국 사회의 입장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듯하다. 당장 아베 신조는 “다시 전쟁하는 국가가 된 게 아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만, 굳이 우리가 이 논쟁에 끼어들 이유는 없는 것이다.
▲ 2일자 한겨레 1면 기사
한국의 입장에서 일본의 헌법 해석 변경이 문제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은 크게 보아 두 가지 정도다. 하나는 일본 자위대가 중국과의 센카쿠열도(중국명 조어도) 분쟁이나 한국과의 독도 분쟁을 더 수월하게 일으킬 가능성이다. 다른 하나는 미군이 한반도에서 중국이나 북한과 마찰을 일으킬 때 일본군이 한반도에 개입할 가능성이다.
그리고 비록 아베 정부가 주변국과의 갈등을 불사하며 전환의 속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나, 이 가능성들은 중기적으로 볼 때 한국 사회가 이미 대비해야 할 가능성들이었다고 봐야 한다. 이번 헌법해석 변경에 미국이 ‘양해’를 넘어 ‘환영’을 표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일련의 작업들은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과 관련이 있다.
오바마 미국 행정부의 핵심 외교전략 중 하나인 ‘아시아·태평양 재균형(rebalancing)’, 혹은 '피벗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로의 외교중심축 이동)' 자체가 사실상 미국이 아시아의 동맹국들을 동원하여 중국을 포위하는 전략에 해당한다. 그렇기에 미국은 일본이 ‘집단적 자위권’을 가지기를 바랐고, 일본 극우파는 미국의 지지를 얻어 평화헌법 개정까지 추구하려 드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은 군사안보적으로는 미국·일본과 함께 중국을 포위하게 되면서, 경제문제와 대북문제를 위해선 중국에 협조를 구할 수밖에 없는 난감한 지경에 처한다. 또 일본의 역사왜곡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최근 중국과 공동전선을 펼쳐왔다는 복잡한 부분이 있다.
이에 대한 보수진영의 단순한 해법은 우리가 다른 문제는 무시하고 오직 중국과 북한을 포위하는 한·미·일 반공주의 동맹만을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에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사과를 받을 필요없고, 식민지배와 분단도 반공을 막아준 사건으로 받아들이며, 중국의 민주화를 바라야 한다는 문창극의 관점이 바로 그것이다. 반면 진보진영의 단순한 해법은 우리가 ‘동포 북한’을 포위하는 한미일 극우파 동맹 블록을 벗어나 안보적으로도 중국과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 2일자 동아일보 2면 기사
대체로는 이 양극단의 입장을 함부로 주장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의 대응은 이들이 마치 이미 미국 및 일본과 협의 하에 전자를 추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청와대에서 제대로 된 항의 입장 내지 못하고 외무부의 입을 빌려 ‘한반도에 개입할 시엔 협의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일본 측의 무리한 행동에 대한 추인의 영역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한 각 신문 사설들의 비판도 이 딜레마를 충분히 반영하고 있는 것 같지가 않다. <동아일보>는 <과거 반성 외면하고 ‘전쟁할 수 있는 나라’ 택한 일본>란 제목의 사설에서 일본과 우리 정부의 선택을 사실상 추인하는 모습을 보였다. 사설은 “집단 자위권 행사가 기정사실이 된 이상 일본은 이웃 나라들의 걱정과 불안을 키우지 않고 역내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투명하게 행사해야 한다. 한국도 일본의 집단 자위권 용인에 따른 잠재적 위험성에 경각심을 늦춰선 안 되지만 이 사안을 냉철하고 균형 있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라고 주문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란 수사를 택한 제목이 무색할 정도였다.
<조선일보> 사설의 경우 미국의 중재를 요구했다. <조선일보>는 <'전쟁할 수 있는 일본'의 등장 以後>란 제목의 사설에서 “그런데도 미국은 경쟁자로 떠오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 일본의 군사 대국화까지 용인할 태세다”라면서, “우리의 유일한 동맹국인 미국에도 한국이 왜 그토록 '아베의 일본'에 대해 우려하는지에 대해 충분히 납득시키지 못했다. 주변 강국의 움직임을 쫓아만 다니는 즉흥적 외교를 뛰어넘는 전략과 방책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주문했다. 한·미·일 반공주의 동맹은 성찰없이 그대로 둔 채, 한국이 미국을 충분히 설득하지 못한 것을 문제로 제시했다.
▲ 2일자 조선일보 3면 기사
<한겨레>의 경우 아베 신조 내각의 선택을 강도 높게 비판했지만 대안제시에선 사실상 <동아일보>와 차등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한겨레>는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동북아 정세>란 제목의 사설에서 이번 조치가 “그 요건의 해석에 얼마든지 자의성이 개입할 수 있어 사실상 일본이 원하는 어디서나 전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한겨레> 사설은 “어떤 경우든 우리 정부는 일본의 군사력이 지역갈등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행사되지 않도록 견제·견인하는 데 초점을 맞춰 대응해야 할 것이다”라고 주문함으로써 미국의 승인을 받은 일본의 우경화 조류에 대해 뾰족한 해법이 없음을 드러냈다.
문제의 핵심에 대한 인지와 해법에 대한 고민의 감각이 빛난 것은 <경향신문> 사설이었다. <평화를 포기한 아베 정권의 집단적 자위권 결정>란 제목의 사설은 아베 정권의 행동이 절차적으로 볼 때 어째서 문제인지, 맥락적으로 볼 때 어째서 문제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했고, 한국 정부의 대처에 대해서도 현실적인 주문을 했다.
<경향신문> 사설은 “일본 헌법은 여전히 전쟁 포기를 분명히 못 박고 있다. 따라서 그걸 바꾸고 싶다면 개헌을 해야 한다. 각의가 ‘해석 변경’이라는 임의적 방법으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일본 시민 다수가 집단적 자위권을 반대하고 있다. 해석의 문제로 ‘전쟁할 수 없는 나라’를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바꾸는 것은 변칙 개헌이자 정치적 반칙이다”라며 아베 정권의 결정을 절차적인 측면에서 비판했다.
또 <경향신문> 사설은 일본이 언제든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호들갑’을 떨지 않으면서도 아베 정부의 행동을 맥락적인 측면에서 비판했다. <경향신문> 사설은 “물론 무력 사용에 대해 ‘필요 최소한의 실력 행사’로 제한하고 조건도 달았다. 그 때문에 일본이 실제 무력을 행사하는 상황이 쉽게 발생할지는 알 수 없다”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면서도 <경향신문> 사설은 ”그러나 요즘 동북아는 전례없는 갈등의 회오리에 빨려들어 가고 있고 군사적 긴장도 어느 때보다 높다. 게다가 일본 사회는 우경화하고 있으며, 그런 흐름을 타고 아베 정권은 역사인식 및 영토문제로 주변국과 대립하고 있다. 이는 일본이 과거사를 진지하게 반성하고, 주변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맺는 가운데 내린 결정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집단적 자위권 그 자체도 걱정스럽지만, 그런 결정이 이런 일본 내부의 정치적 맥락과 긴장된 안보 정세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더 우려된다. 그건 동북아 불안을 부추기고 군비 경쟁을 촉발하는 도화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아베 정부의 행동을 비판했다.
▲ 2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마지막으로 <경향신문> 사설은 나름의 대안 제시를 했다. <경향신문> 사설이 “이런 현실에서는 한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부는 우선 주권을 훼손하거나 안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도록 무력 사용 범위와 절차의 투명성을 요구하고 사전 동의 없이 한반도 문제에 간여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고 말한 부분에선 <동아일보>나 <한겨레>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경향신문> 사설은 “나아가 동북아 안정을 위한 협력 체제 구축에 나서야 한다. 박근혜 정부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을 낸 바도 있다. 그 구상이 필요한 때가 바로 지금이다. 일본의 헌법해석 변경은 한국이 평화를 주도하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평화 만들기에 당장 뛰어들어라”라고 지적하면서 동북아 국제정세에 대한 좀더 사려 깊은 식견을 드러냈다.
즉 한·미·일 반공주의 동맹의 고수나 이로부터의 단순한 이탈을 주문하지 않고, 동북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평화체제 구축에서 한국이 중간자의 역할을 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를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에 포갰으니, 비록 박근혜 정부가 경청하지 않을 지라도 세련된 조언을 건넸다고 평가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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