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최근 <씨네21>에 실렸던 미술평론가 반이정씨의 글을 사전 허락 없이 세 줄 인용하며 시작. 너그러이 봐주시길.

사물과 공간 사이의 힘겨루기 긴장은 과연 어디에 유리할까? 사물의 영험함이 남다르다면 공간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중략) 하지만 구조적으로 공간이 사물의 성질을 규정할 가능성이 높다. (미술평론가 반이정, 씨네21 669호)

“사회적 존재 social being는 사회적 의식 social consciousness을 규정한다” 라는 탁월한 명제를, 이제는 고급 화랑 畵廊 에 입주한 90년대 청년 미술 (후기 민중미술이라고도 하는) 을 진단하는 데 적용한 셈. 칼 막스의 저 명제가 딱딱하게 느껴진다면,

‘우리 인생의 선택들은, 윤리나 꿈, 개성, 창의력, 노는 스타일 (요약하여 ‘의식’) 따위가 아닌 전세금과 교통비, 사는 평수, 자주 왕래하는 공간의 견적, 갑을병정의 계약서들 (그리하여 ‘존재’) 등에 의해 좌우되는 경우가 많다’

... 정도로 거칠게 번안해보자. 게다가 나이가 들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능력’이 감퇴할수록 우리는 후자의 항목들에 의해 전자의 가치관이 재편되곤 하는 것이다. 더 거칠게 요약하면 ‘출세하더니 사람 달라지더라’, ‘짤리고 나니까 세상이 달리 보이더라’, ‘상자가 썩으면 사과도 썩는다’ 등등.

나도 당연히 예외는 아니어서 (예외는커녕 꽤나 적극적인 속물인지라) 인용한 글이 염려하는 지점들에 끄덕거리는 한편으로 ‘사물의 영험함이 남다르다면 공간을 압도할 수 있으리라’ 는 어떤 여지에… 더 솔깃해하고 있는 거다. ‘영험함’ 까지는 무리겠지만 그간 지켜온 ‘시력’이나 나름 가꿔온 ‘서정’ 같은 것들에 의지해 내 영화나 글들이 어떤 균형 정도는 지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

그렇다면 어디와 어디 사이의 균형? 좀 더 좋은 데서 먹고 싸고 자고 놀고 치료받고 보호받는 개인이 되고 싶은 탐심과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라며 사람을 쓰다듬는 바르고 튼튼한 명제 사이에서의 균형. 그러나 이게 쉬운 일일까, 립 서비스로 버틸 수 있는 사안들일까.

간단히 예를 들면, 가령, 기득권만을 철저하게 대변하는 대선 후보에게 “각하, 힘내십시오” 따위의 ‘싸바싸바’를 날리는 중견배우가 운영위원장을 맡고있는 영화제에서 우리가 만든 영화가 틀어질 때의 경우의 수.

프로그래밍은 ‘국제’가 맞으며 상영작들은 준수하다. 소위 제3세계의 영화 경향을 일별하고 빔 벤더스와 장선우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극장에서 회고할 기회이다. <바그다드 카페>, <위선의 태양>, <블레이드 러너>,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등등 상당히 대중적인 영화임에도 90년대 한국의 비디오 대여점에서는 ‘예술영화’ 섹션으로 분류되어 있던 메뉴들이 어느새 고전의 반열에 올라 지금의 관객들에게 스크린으로 선뵈여지는 풍경이 흥미롭기도 하다. 그 규모와 스펙을 ‘영화’ 2음절에 대한 애정으로 감당하기 위해 바삐 뛰어다니는 스태프와 자원활동가들의 수고와 진심에는 늘 그렇듯 감읍하는 마음을 보낸다.

그러나, 그 위상이나 레드카펫 마케팅, 뭣보다 압도적인 예산과 운용을 가능케 해준 윗사람들의 이데올로기는 철저하게 좁고 반문화적일 때, 그러니까 영화제 운영위원장이 “영화제를 위해 동원을 열심히 하겠다” 는 식의 멘트를 어떤 저어함도 없이 날리는 판국이라면, 그런 게임의 논리들이 어쩌면 거기서 틀어지는 영화들의 토대까지 결국엔 갉아먹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안 할 수 없다.

영화도 일종의 매체인지라 그 내용만큼 유통의 과정 및 의도가 그 기운을 좌우하니까. 덧붙이자면 충무로 국제영화제는 국제적인 작품들을 트는 중구청의 영화제라고 하는 게 맞다. 그건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게 어떤 이들의 체제 과시적인 이벤트로 기능할 수 있다면 여기엔 쓴 소리가 필요하다.

이번 경우 그런 영화제의 속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상영 소식을 듣고 흔쾌히 끄덕였고 연하여 관객들과의 만남도 고맙게 끝냈지만 (솔직히 요런 게 속 편하다) 앞으로 이런 식의 제2, 제3의 ‘충무로’를 마주할 때 나는 무엇과는 거리를 두고 또 어떤 무엇은 뽑아 먹어야 하는 걸까, 아니 그게 가능하긴 할까?

물론, 사람들이 이런 고민 없이 애호하는 다른 크고 작은 영화제들에도 정치적인 안배와 처세는 횡행하기 마련. 예전에 생계형 편집 알바를 하던 중 부산국제영화제의 10년 역사를 담은 테이프를 볼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규모나 매너나 어느새 국내를 넘어서 아시아 최고 수준의 영화제가 된 이 페스티벌 역시 영화제 초반, 즉 권위주의 정권 시절로 기록을 되감기 할수록 그런 ‘권력형 촌스러움’이 존재했었다. 민망할 정도로 길고 지루한 YS의 축사를 국내외 게스트들이 감내하는 모습이라든지.

물론 그런 적나라한 부분들까지 관객들이 알고 맘 쓰길 주문하는 건 무리겠다. 그러나 서사를 만들고 유통하는 사람들의 고민은 어쨌든 좀 더 정교해야 할 터.

뭔가를 보이콧하는 것이 힘든 선택인 한편 나름의 스펙이 될 수 있던 시절도 있었다. 허나, 이제 당분간 (또는 좀 더 오랜 기간) 공공 영역의 축제와 상영장, 지원제도, 매체와 채널의 돈줄과 인사줄 모두를, 신자유주의를 과신하거나 권위주의와 어깨동무한 사람들이 쥐게 될 판국. 그러니 이 생태계를 아예 떠날 요량이 아니라면 매번 작두를 타야 할 판.

그리하여 다시금 존재냐 의식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차라리 다른 명제를 힌트로 삼을까 한다. 반성 없이 주입된 어떤 의식들이 자기 존재를 배신하게 만드는 데 있어선 독보적인 우리나라와 미국-가령 비정규직 택시기사나 영세 상인, 서민 주부들이 기득권 위주 정책의 정치인을 침이 마르게 옹호한다든지 하는 아이러니-그런 현실들은, 칼 막스의 명제를 뒤집는 근거라기 보다는 오히려 그 명제가 참인 것을 확인시켜주는 그 명제의 ‘대우’일 수도 있겠다. ‘사회적 의식의 결여는 사회적 존재의 결핍을 규정한다’… 뭐 이렇게.

저게 좀 말재미에 가깝다면 이런 데 방점을 두는 건 어떤가. ‘존재’가 ‘의식’으로 이어지는 경로에 예상 밖으로 자꾸 끼어드는 노이즈의 문제. 그런 잡음들을 우리가 부록처럼 허투루 다뤄선 안된다는, 그러다 큰 코 다친다는 따끔한 교훈.

어쩌면 또 저 아이러니를 역으로 이용할 수 있지 않을까. 일종의 정신적인 스퀏 squat. 다른 식으로 말하면 전유 [專有, appropriation]. 즉, 어떤 형태의 문화자본을 수용한 뒤 그 문화자본의 원소유자에게 적대적이게 만드는 행동. 우리가 뺏긴 공간에 그렇게 침투하자?

그러나 여기서 주의하고 또 주의해야할 점. 아직 상호작용이 가능한 수준의, 그러니까 ‘전유’ 라는 게 이루어질 수 있는 영역이 있는 반면, 이미 그 존재 자체가 거대한 오류가 되어버린 공간도 있다는 사실 (사과를 썩게 할 정도의 상자. 가령 조선일보). 게다가 그 밖의 영역에서도 대부분 위의 미술평론에서 인용했듯 ‘구조적으로는 공간이 사물의 성질을 규정할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하여 소 잃기 전에 외양간을 지키려는 노력의 필요성. 그렇게 우리의 공간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미리 버텨야할 싸움들을 올 추석에도 YTN 노조와 KBS 사원행동은 해나갈 것이라 한다. 그 모든 수고들에 진정 감읍. 존재와 의식과 소통을 공히 지키려는 그들 ‘진짜’ 매체 종사자들에게 미리 “메리 추석!”

2001년에 스물다섯이었던 성호. 그 해부터,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아예 모르는 『산만한 제국』『나는 내가 의천검을 쥔 것처럼』『우익청년 윤성호』『이렇게는 계속 할 수 없어요』등등 극영화 같기도 하고 다큐 같기도 한, 실은 UCC에 가까운 - 중단편을 만들어왔다. 2007년『은하해방전선』이라는 장편영화를 만들며 나름 촉망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별로 안 풀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존재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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