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축구 국가대표팀이 인천공항에서 '한국축구는 죽었다'는 현수막과 함께 '엿'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그 행위의 옳고 그름 여부를 떠나, 국가대표팀의 귀환이 이처럼 황폐해진 것은 한국 축구의 수준이 20년 전으로 돌아갔다는 세간의 평가가 허투루 된 것은 아니란 걸 보여주는 광경이다. 명보와 그의 팀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축구스타 28인>을 발간하기도 했던 골닷컴 김현민 기자가 문제의 근본원인을 지적하는 글을 보내왔다.

태극전사의 2014 브라질 월드컵 도전이 결과적으로 ‘악몽’으로 막을 내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위 등극을 기점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 원정 첫 승, 그리고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원정 첫 16강 진출에 이르기까지 매 월드컵 때마다 한 단계씩 발전하는 모습을 보인 한국이었으나 이번 월드컵에선 1무 2패로 표면적으로 드러난 성적만 놓고 보면 1998년으로 퇴보하고 말았다. 국내 광고에선 앞 다투어 첫 원정 월드컵 8강을 노래하고 있었으나 이는 공허한 외침에 불과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었던 한국 축구
애당초 한국은 준비 과정에서부터 삐걱댔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종료 후 허정무 현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이 자진 사임한 가운데 그 후임자 문제를 놓고 고심하다 진통 끝에 2010년 7월 21일, 경남 FC 감독 조광래에게 대표팀 지휘봉을 맡겼다.
▲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과 전현직 국가대표팀 감독들이 2013년 2월 14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파크 하얏트 호텔에서 오찬을 가졌다. 정몽규 회장(오른쪽)과 조광래 전 감독이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자리를 정돈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조광래 감독은 협회와 자주 대립하던 ‘반(反) 축구협회’ 인사로 유명하다. 실제 조 감독은 축구계의 야권으로 분류됐던 허승표 전(前)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이자 현 피플웍스 회장과 두터운 친분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축구협회는 '학구파'로 소문난 조 감독의 대표팀 부임과 함께 야권과의 ‘대화합’에 나섰다.
하지만 조 감독과 축구협회는 처음부터 ‘잘못된 만남’이었다. 선수 선발에 있어서도 사사건건 부딪치는 장면을 연출했다. 조 감독은 자신의 로망인 '패스 축구'를 대표팀에 이식하기 위한 장기적인 리빌딩을 꿈꿨기에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을 대표팀의 주축으로 활용했으나 축구협회에겐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의 가시적인 성과도 중요했다. 이에 조 감독은 이회택 전(前) 축구협회 기술위원장을 겨낭해 "감독의 고유 권한인 선수 선발에 간섭하지 말아달라"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하고 나섰을 정도였다.
그나마 성적이라도 좋았다면 어느 정도 융합이 가능했겠지만, 일본과의 평가전에서 0-3으로 대패하면서 조 감독의 입지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고, 월드컵 3차 지역 예선 레바논과의 원정 경기(2011년 11월 15일)에서 역사상 첫 패배를 당하자 결국 축구협회는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던 12월 9일, 조 감독을 경질하기에 이르렀다.
더 큰 문제는 경질 과정에 있었다. 조 감독에겐 일언반구도 없었다. 도리어 KBS를 통해 경질 소식이 가장 먼저 흘러나왔다. 자연히 밀실 해고라는 비아냥이 떠돌았다. 이에 대해 축구협회는 관계자는 "공식적인 과정을 파악하기도 전에 언론보도부터 먼저 나와 당혹스럽다"라는 입장을 표명했을 정도였다.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후임 감독도 내정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무턱대고 조 감독을 경질했다. 결국 전북 현대를 성공적으로 이끌며 K리그 명장으로 평가받던 최강희 감독에게 월드컵 지역 예선까지 한시적 감독직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정상적인 감독 부임도 임기도 아니었다.
▲ 2014년 3월 12일 오후(현지시간) 호주 멜버른 도크랜드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4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G조 2차전 전북 현대 대 멜버른 빅토리의 경기. 전북 최강희 감독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다. (엲바뉴스)
자연스럽게 최강희호도 시작부터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소기의 성과를 올리긴 했으나 과정 자체는 그리 매끄럽지 못했다. 2013년 3월 26일에 열린 카타르와의 월드컵 4차 예선 경기에선 인저리 타임에 터져나온 손흥민의 골로 어렵게 2-1 승리를 거두었고, 레바논 원정에선 1-1 무승부에 그쳤으며, 우즈베키스탄전(이하 우즈벡)에서도 상대 자책골 덕에 천신만고 끝에 1-0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이란과의 4차 예선 최종전에서 0-1로 패했으나 골득실 차에 힘입어 간신히 우즈벡을 제치고 본선 티켓을 거머쥘 수 있었다.
우여곡절도 많았다. 특히 기성용은 자신의 사적인 SNS 계정을 통해 최강희 감독을 ‘뒷담화’하는 글을 쓴 사실이 김현회 축구 전문 칼럼리스트를 통해 드러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홍명보 감독의 과오
최 감독은 당초 공언했던 대로 월드컵 예선 기간이 끝나자 미련 없이 2013년 6월 18일, 대표팀을 떠났다. 그리고 그의 후임으로 런던 올림픽 당시 한국에 동메달을 안긴 홍명보 감독이 부임했다. 월드컵 개막까지 1년 밖에 남겨놓지 않은 시점이었다.
당연히 성적이 제대로 나올리 만무했다. 한국은 엄연히 월드컵 무대에서 '언더독(약팀)'에 해당한다. FIFA 순위부터 참가국들 중 호주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순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런 한국이 월드컵에서 호성적을 올리기 위해선 장기적인 관점 하에서 조직력을 극대화 시켜야 한다. 스위스(오트마르 히츠펠트 감독, 재임 기간 6년), 그리스(페르난두 산토스, 재임 기간 4년), 그리고 코스타리카(호르헤 핀토, 재임 기간 3년) 같은 팀들을 벤치마킹할 필요성이 있었다.
실제 이번 대회에서 16강 진출국들의 감독 평균 재임 기간은 3.4년인데 반해 조별 리그 조기 탈락국들의 감독 평균 재임 기간은 2.8년에 해당했다. 홍 감독과 유사하게 1년 미만 재임한 감독 4인 중 팀을 16강에 진출 시킨 감독은 멕시코의 미겔 에레라 감독 밖에 없다.
솔직히 홍 감독이 올림픽 대표팀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짠 것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실제 대다수의 감독들은 자신이 잘 아는 선수들로 대표팀을 구성하는 경향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알레한드로 사베야 감독도 에스투디안테스 시절 자신이 지도했던 마르코스 로호와 페데리코 페르난데스, 엔조 페레스, 마리아노 안두하르, 그리고 아우구스틴 오리온 같은 애제자들을 대표팀에 불러들였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다. 게다가 홍 감독은 시간이 촉박했다. 마지막 선택은 자신이 잘 아는 선수들일 수밖에 없었다.
▲ 홍명보 감독이 6월 30일 오전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 취재진과 인터뷰하고 있다. 홍명보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은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H조 꼴찌로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 (연합뉴스)
게다가 홍 감독이 부임하기 전에도 한국 대표팀은 말 그대로 표류하고 있었다. 4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무려 3명의 감독이 부임했다. 평균 재임 기간은 1년 4개월에 불과했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조 감독은 해외파 어린 선수들을 중심으로 팀을 짰고, 최 감독은 경험 있는 국내파를 중용했다. 당연히 팀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홍명보호의 주장 구자철 역시 "예선부터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면 팀의 문화가 하나로 되기 용이하다. 그런데 이번 팀은 그럴 시간이 부족했다. 우리들의 팀을 만들기에는 외부에서 주는 압박감과 스트레스가 상당했다"라며 1년의 준비기간이 짧았음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홍 감독에게 잘못이 없다는 건 절대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 무덤을 팠다고 볼 수 있다. 차라리 부임 초기부터 '시간이 부족해 내가 잘 아는 선수들을 중용할 수밖에 없다'라는 식의 발언을 했다면 당장은 비난 여론이 있었을지 몰라도 지금처럼 속칭 '엔트으리' 논란까지 불거지진 않았을 것이다.
홍 감독은 대표팀 부임 인터뷰에서 "실력으로 선수를 선발하겠다. 소속팀에서 꾸준하게 뛰는 선수들만이 내 팀에서 뛸 수 있다"라고 공언했다. 또한 지난 2월, 대표팀 홈 유니폼 공개 행사에서도 "2012년 올림픽을 끝으로 런던 올림픽 세대 선수들을 모두 강가에 던져버리고 왔다. 이제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정작 대표팀 명단을 발표하는 과정에서 소속팀에서 출전 시간이 현격히 부족한 박주영과 윤석영 같은 선수들을 호출했다. 반면 2014 시즌 K리그에서 연신 맹활약을 펼치며 역대 최다에 해당하는 10경기 연속 공격 포인트를 올린 '역사의 사나이' 이명주는 끝내 외면했다. 본인이 말한 원칙을 본인이 저버린 셈이다. 이에 대해 홍 감독 본인조차 대표팀 엔트리 발표 기자회견에서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주었으나 내가 원칙을 깼다"라고 토로했다. 전형적인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홍 감독과 박주영은 런던 올림픽의 성공에 지나치게 젖어있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2012년 런던 올림픽 당시에도 박주영은 소속팀 아스널에서 출전 기회를 전혀 잡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모나코 영주권을 획득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박주영을 향한 국내 여론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 6월 27일 오전(한국시간)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 대 벨기에 경기. 벨기에의 얀 페르통언에게 결승골을 내줘 0대1로 패한 축구대표팀의 박주영이 눈물을 흘리는 이근호를 위로하고 있다. (연합뉴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 감독은 "박주영이 군대를 가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가겠다"는 강도 높은 기자회견을 통해 박주영을 올림픽 대표팀에 뽑았고, 이에 박주영은 스위스와의 조별 리그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은 데 이어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1골 1도움을 올리며 화답했다. 이와 함께 박주영과 관련된 비난 여론은 일정 부분 사그라들 수 있었다.
하지만 엄연히 올림픽과 월드컵은 다른 무대다. 만 23세 이하 선수들을 상대하는 것과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스타들이 출전하는 월드컵을 직접적으로 비교할 수 없다. 실전 경험이 전무한 박주영이 통할 만큼 만만한 무대가 아니다. 당연히 홍 감독의 도박은 태생부터 실패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이젠 4년 후를 바라봐야 할 때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면, 어쨌든 한국의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도전은 실패로 끝났다. 이번 월드컵은 아마도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실망스러운 성과라고 할 수 있다. 축구 팬들이 느끼는 박탈감도 마찬가지. 도리어 대표팀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만을 놓고 보자면 역대 최악이라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다. 심지어 현 대표팀을 가리켜 '축피아'라는 용어까지 등장하고 있다.
이제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4년 후의 월드컵을 앞두고 큰 그림을 그릴 필요성이 있다. 단기 감독직으로는 더 이상의 성과를 바라보기 어렵다. 한일 월드컵 당시 한국이 4강 신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건 합숙 훈련에 기인하고 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첫 원정 16강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2년 6개월 이상 허정무 감독이 팀을 지도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실제 허정무 감독은 남아공 월드컵 기간 동안 무려 A매치 44경기를 소화했다. 조광래와 최강희, 그리고 홍명보 감독의 A매치 숫자를 모두 더한 횟수가 A매치 46경기이다. 즉 허 감독 홀로 소화한 A매치 숫자만큼을 세 감독이 분담한 셈이다.
더 이상 임시방편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해선 안 된다. 2015년 아시안 컵이 눈 앞에 다가왔다고는 하지만 아시안 컵보다도 4년 후의 월드컵이 더 중요하다. 일본은 월드컵 탈락이 확정되자 지난 30일, 발 빠르게 멕시코 출신 하비에르 아기레 감독을 차기 감독으로 잠정 확정지었다.
▲ 2014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 H조 3차전 한국과의 벨기에의 경기가 열린 6월 27일 오전(한국시간) 브라질 상파울루 코린치앙스 경기장에서 기성용이 벨기에 케빈 미랄라스에게 태클을 걸고 있다. 벨기에에게 1대0으로 패한 한국 축구는 16강 진출에 실패했다. (연합뉴스)
당장 홍 감독의 거취 문제부터 결정해야 한다. 물러난다면 철저한 검증을 통해 새 감독을 찾아야 한다, 유임한다면 어떤 점에서 개선이 필요한지 치밀하게 분석할 필요성 있다. 지난 4년간 3명의 감독이 부임하는 동안 승률은 줄곧 하락세를 탔다는 점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잃어버린 4년’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다만 개인적인 의견을 첨언하자면 현 시점에서 홍 감독의 유임은 사실상 어렵다고 보고 있다. 이미 홍 감독에 대한 여론은 바닥에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태다. 만약 홍 감독을 유임한다면 앞으로도 '엔트으리'라는 꼬리표가 주홍글씨마냥 따라다닐 것이다. "한 번 잃어버린 신뢰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참고. 지난 4년간 대표팀 감독 성적

조광래, 21전 12승 6무 3패 승률 60%
최강희, 14전 7승 2무 5패 승률 50%
홍명보, 11전 4승 3무 4패 승률 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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