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홍원 국무총리의 유임이란 결정과 그 결정이 내려진 과정이 당혹스러울 정도로 비상식적이란 것은 너무나 쉽게 설명된다. 크게 보아 세 가지 지점에서 그렇다.

'정홍원 유임' 한심한 세 가지 이유

첫째, 정 총리의 유임은 국가가 세월호 참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에서 진 유일한 책임인 ‘총리 사임’이란 결정을 뒤집었다. 이런 결정을 발표하면서 청와대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질 것인지라도 설명했다면 명분이 섰겠으나 그런 일도 없었다.
둘째, 정 총리의 유임은 박근혜 대통령이 한 ‘국가 대개조’의 약속에 어긋난다. 사실 한국 정치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제 국가에서 국무총리야 별다른 권한도 없고 하는 일도 없는데 누구를 시키든 무슨 상관이냐고 반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새 총리와 내각에게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발본색원할 수 있는 국가 대개조의 역할을 맡기겠다는 건 박근혜 대통령 본인의 약속이었다. 그 기조에 따라 지난 두달 동안 총리 후보 두 명을 내밀어 놓고 그들이 낙마하자 ‘도로 정홍원’이 카드로 나왔다는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 27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셋째, 정 총리의 유임은 박근혜 대통령이 ‘문고리 권력’에만 의존하는 ‘수첩 인사’를 타개할 의사가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많은 언론들이 지적했듯 새누리당, 더 나아가 야당들까지 끌어들여 폭넓은 추천을 받는다면 청문회도 통과하고 실무능력을 발휘할 인사를 찾지 못할 리가 없다. 하지만 자신들이 잘 아는 사람만 써야 한다는 기조를 정권이 포기할 수 없었기에 고작 두 명 낙마 이후 기존의 대안이 재검토된 것이다. 많은 언론들이 정 총리 유임 문제에서 박근혜 정부 인사 기조를 다시금 문제삼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겨레-경향신문-한국일보, '어깃장' 동맹
27일자 신문 사설들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러한 문제들을 각각의 방식으로 지적하였다. 그런데 정부가 한 일이 너무 ‘유치찬란’하다 여겼는지 비판에 동원된 어휘가 안쓰러울 지경이다. 무려 세 개 신문사 사설에서 ‘어깃장’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젊은 세대의 입말에서 잘 쓰이지 않는 ‘어깃장’이란 말은 ‘짐짓 어기대는 행동’을 나타내는 말로 여기서 ‘어기대다’는 ‘순순히 따르지 아니하고 못마땅한 말이나 행동으로 뻗대다’로 풀이된다. 정부의 행동이 얼마나 몰상식해 보였으면 이런 단어가 등장할까.
▲ 27일자 한겨레 1면 기사
<한겨레>는 <시키는 사람이나, 남는 사람이나…>란 제목의 사설에서 “개그라면 너무 황당한 개그고, 코미디라면 너무 슬픈 코미디”라고 개탄한 이후, “박 대통령은 심기일전해 국민의 눈높이에 맞는 새 총리 후보자를 고르기는커녕 ‘정 그러면 예전 총리로 가버리겠다’고 어깃장을 놓아 버렸다”라고 지적했다. <한겨레> 사설은 “박 대통령의 이번 결정에는 ‘인사는 내 고유권한인데 누가 뭐라고 할 거냐’는 오기가 가득 차 있다. 이미 보따리를 싼 총리를 유임시키는 대통령이나, 붙잡는다고 슬그머니 주저앉은 총리나 모두 염치없고 부도덕하기 짝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경향신문> 역시 <정홍원 총리 유임… 말문이 막힌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다른 사건도 아니고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퇴한 총리를 재신임한, 헌정사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기상천외의 결정”이라 규정한 이후, “민의를 외면한 채 ‘경질 총리’를 유임시키는 어깃장을 놓고 있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라고 개탄했다. 진보언론들의 사설이라지만 매서운 비판이기 이전에 정권의 행동에 대한 탄식이 가득한 표현들이다.
▲ 27일자 경향신문 1면 기사
심지어는 중도언론인 <한국일보>의 사설에서도 ‘어깃장’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한국일보>는 <총리에 '책임'주고, 비서실장에 책임 물어야>란 제목의 사설에서 “박 대통령이 이를 검토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고 댓바람에 정 총리 유임 카드를 빼든 것은 오기나 오만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이래서는 국민들이 대통령으로부터 존중 받는다고 생각하기 어렵다. 혹여 두 차례의 총리후보 낙마를 청문회 또는 야당과 언론 탓으로 돌리고 어깃장을 놓은 것이라면 더욱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이 정권이 의회와 국민을 상대로 ‘어깃장’을 놓는 ‘오기’를 부리는 게 아니냐는 것이 이들 신문들의 진단 내지는 의구심인 것이다. 이것은 너무 나아간 비판일까. 보수언론들의 사설을 함께 보며 판단해 보자면, 그렇지도 않다. 사설들의 내용을 보건대 보수언론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다만 보수정권의 행태를 너무 부정적으로 묘사하여 지지율 하락을 이끌어 내는 것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일이기에 표현수위를 조절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보수언론도 '예의'와 '성의'없는 '시위'로 봤다
<조선일보>는 <정 총리 유임, 대통령이 국민에게 직접 설명하는 게 옳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청와대가 총리 교체를 비롯한 인사 쇄신을 통해 국정을 혁신하겠다는 약속을 내팽개치는 것은 국민에 대한 기본 예의가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조선일보> 사설은 “무엇보다 청와대 홍보수석을 통해 총리 유임 사실을 발표하고 끝내는 것도 성의가 없어 보인다. 박 대통령이 직접 국민에게 정 총리를 유임시킬 수밖에 없는 배경을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순리다”라고 지적했다. 말하자면 ‘예의’와 ‘성의’가 없다는 것이고, 이렇게 행동하면 ‘어깃장’ 놓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는 충고다.
▲ 27일자 조선일보 1면 기사
<중앙일보> 역시 <흔들리는 대통령 … 국정의 위기>란 제목의 사설에서 “이런 사정들은 명확한 것이었는데 대통령이 정 총리를 유임시킨 건 정치권과 사회에 대한 일종의 시위로 보여진다”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표현 역시 ‘개탄’이란 말에 어울린다. <중앙일보> 사설은 “국가개조의 중요성, 정권의 새로운 기운, 원칙의 실천, 인재발탁 능력의 입증은 중요하다. 대통령이 이런 것들을 미뤄놓고 항변과 시위에 매달리면 매우 심각한 문제다”라고 비판했다. <중앙일보> 사설은 “이런 비정상적인 결정이 내려질 정도로 정권 핵심부는 중심을 잃고 있다”라면서, 정치인 시절엔 그렇지 않았던 대통령이 “절제와 판단력을 상실하고 있다”라고 까지 썼다.
<동아일보> 사설이라고 대통령의 결정을 곱게 봐주지 않았다. <60일 만에 ‘도로 정홍원 총리’ 갈 길 멀고 험하다>란 제목의 사설에서 정홍원 총리의 유임은 “국민의 상식과는 거리가 먼 결정이다”라고 평가됐다. <동아일보> 사설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1년 4개월 됐다. 그런데도 대통령의 인사 스타일이나 민심은 레임덕에 빠진 정권 말기를 보는 듯하다. 총리 하나 뽑지 못하는 무기력 무소신 무책임의 ‘3무(無) 정권’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 27일자 동아일보 1면 기사
이어서 <동아일보> 사설은 “월호 참사에 대한 국민의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았는데도 대통령은 마치 국민의 기억력을 테스트하는 듯한 인사를 단행하고 말았다”고 평가했다. 이 역시 ‘개탄’이나 ‘한탄’이란 수사가 어울리는 수위의 표현이다. 결국 사실상 모든 신문들이 대통령의 총리 인선을 의회와 국민에 대한 ‘어깃장’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의 품격’을 그토록 욕하던 보수언론들의 입장이 참으로 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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