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에 옷 젖는다”는 속담이 떠오르는 시국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높은 지지율을 자랑하던 박근혜 정부는 불과 집과 2년차에 위기를 맞고 있다. 총리후보 두 명이 연이어 낙마하면서 국정 운영의 중심을 잡지 못하는 모습이다.

'최악'이 된 안대희 이후 문창극, 중도층 이탈의 역설

기술적으로 평가한다면, ‘안대희’ 이후 ‘문창극’이 나온 것이 청와대에겐 안타까운 상황이다. 아마도 이 순서가 반대로 제시되었다면 안대희는 무난하게 총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야당 역시 연달아 두 명의 총리후보에 반대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문창극 후보는 너무나도 문제가 많았다. 청와대가 차기를 생각해 아껴둔 카드로 추정되는 안대희가 너무 일찍 나왔고, 그럼에도 너무 맥없이 소모되어 버렸다. 반면 문창극 후보는 청문회 통과가 목적일 뿐 아무런 장점이 없는 카드였는데 두 번 연속 낙마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너무 오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머뭇거린 결과는 고스란히 타격으로 돌아왔다. 문창극 후보가 사퇴하지 않는 동안 중도층이 이탈했고 청와대가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사퇴를 유도하자 보수층이 분열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인사청문회 못 가 안타깝다”는 예의 유체이탈 화법을 또 다시 사용했다. 언제나 대통령은 사태의 책임에서 한발 물러나겠다는 것인데, 한두번도 아니고 이런 모습이 반복되면서 보수진영에서조차 피로함을 느끼고 있다.
▲ 중앙아시아 3개국 순방을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21일 저녁 서울공항에 도착, 김기춘 비서실장 등과 함께 공항을 나서고 있다. (연합뉴스)
그런데, 박근혜 정부의 국정운영 지향점은 무엇인가?
무엇보다 기술적인 평가 이전에 이 정권의 국정운영 지향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크나큰 문제다. 반대파에게 환영받은 목표는 아니나, 이명박 정부에게는 4대강 사업이라는 숙원사업이 존재했다. 참여정부의 경우는 4대개혁 입법에 실패한 후 한미FTA가 정책목표가 되었다. 박근혜 정부에게도 그런 것이 있을까?
어느 때보다 국정운영 철학이 필요하건만,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문창극 총리후보가 많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어떤 철학을 구현하는 부분이 있었다고 한다면, 청와대가 여론을 설득하면서 끌고 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청와대조차도 문창극 후보가 왜 총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몰랐던 것 같다.
문창극 총리후보는 사퇴 의사를 전하는 기자회견에서 자신이 총리가 되어서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 두 가지로 설명한 바 있다. ‘나라의 근본 개혁’과 ‘분열된 이 나라를 통합하고 화합을 이루어내는 일’이 그것이다. 전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국가 대개조의 필요성과 맞닿아 있을 것이고 후자는 반대파를 아우르는 정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문창극 후보가 전자에도 후자에도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총리의 역할은 제한적이고, 박근혜 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국가 대개조 역시 매우 모호하다는 한계는 있다. 그러나 특정 진영에 충실히 봉사해왔던 언론인은 실무형 인사도 화합형 인사도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길 잃은 박근혜 정부, 적당한 포퓰리즘 처신으로 집권 끝낼텐가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제대로 된 국정운영 목표를 잡을 수 있을까? 경제민주화는 경제활성화로 바뀌었고, 공공기관 개혁이란 미명하에 추진되던 공기업 민영화는 세월호 참사 이후 이름도 모호한 국가대개조로 옷만 바꾸어 입었다. 지금 정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것을 왜 해야 하는지 가늠이나 공유가 안 되는 시점이다.
지금의 박근혜 정부는 2004년 탄핵정국에서의 총선 승리 이후 야심차게 추진한 4대 개혁입법이 좌초된 후 길을 잃은 참여정부의 모습과 흡사하다. 4대 개혁입법을 무리하게 엮어서 추진하다가 성과를 얻지 못한 참여정부는 부동산 정책에서 헤매면서 집권 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한미 FTA를 추진하게 되었다. 민주정부 2기가 보수적 경제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처지는 이보다 더 나쁜 것일 수 있다. 보수정부 특유의 권력자원 확보와 이권분배 행위 이외엔 적당히 포퓰리즘적으로 처신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한미 FTA처럼 방향이야 어찌되었든 비전을 말해볼만한 제안도 없다. ‘통일 대박’이 그에 가까운 것이었으나 세월호 참사 이후 그러한 장밋빛 일변도의 제안을 내밀기가 부담스러워진 것이 사실이다.
비전이 없는 정치세력이 지지율이 떨어지면 더욱 포퓰리즘에 집착하게 된다. 한국 사회에서 추진해볼만한 포퓰리즘 정책은 남북정상회담을 통한 교류협력 증진, 전임 정권의 비리 캐기, 일본 등 주변국과의 갈등 증폭 등이다. 첫 번째 것은 박근혜 정부가 나름대로 추진한 적도 있지만 번번이 국내정치를 위해 납북관계를 희생하면서 어려워졌고, 두 번째 것은 정권의 기반을 허물 수 있다는 위험부담이 있다. 세 번째 것은 지지율 상승을 위해 할 만한 것이고 현재 진행 중이라고도 볼 수 있으나 한미관계가 악화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이도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 속에서 새로운 국정운영 철학과 정책목표를 찾다 보면 숙고되지 않은 엉뚱한 것이 나올 수 있다. 그게 아니라 지금처럼 일하는 시늉만 하며 시간을 보낸다 하더라도 문제는 누적된다.
지금이야말로 박근혜 정부는 스스로 무엇을 하기 위해 집권을 해야 했는지를 다시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다. 대통령이 ‘가업 계승’에만 의지가 있었다면 주변 참모들이라도 국정 운영 목표를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 하지 못한다면 이번에 구설수에 오른 문창극 총리후보의 강연 내용이 박근혜 정부의 미래가 될 수도 있다. 위기에 직면해서 ‘허송세월’을 하면, 아무래도 ‘시련’이 오기 마련이다. 박근혜 정부는 87년 체제의 단임제 대통령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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