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밤 육군 22사단 소속 임아무개 병장은 총기를 난사하고 탈영했다. 5명이 죽었고 7명이 다쳤다. 22사단은 최전방 철책을 지키며 GOP를 경계하는 부대다. 임 병장은 수십 발의 실탄을 가지고 부대를 벗어났고, 10km가 넘게 도망쳤다. 23일 오전까지도 ‘대치’ 중이다. 임 병장은 A급 관심병사였다가 GOP 투입 직전 B등급으로 분류된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도 군에 있을 때, 주요관심병사였다. 대학 시절 이라크 전쟁, 한-칠레 FTA 반대 집회에 나갔다가 연행된 이력 탓에 국가의 관심을 받았다. ‘오뚜기부대’로 알려진 8사단의 수색대대에 지원했고, 여기서 24개월을 보냈다. 군번으로 볼 때 내가 속한 분대(8~10명 편성의 초소 병력 단위)의 장을 할 수 있었고, 분대장 교육에 갔으나 교육 첫날 돌연 복귀를 명 받았다.

불만을 토로하던 내게 한 장교(위관급과 영관급, 장성급을 통칭)는 “가끔씩 위에서 박장준은 잘 지내냐고 물어본다”고 말해줬다.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기자는 속칭 ‘A급’이었지만 결국 관리자가 되지 못하고, 끝까지 관리 당하는 신세가 됐다. 어찌 보면 기자는 한겨레 식으로는 ‘군 부적응자’였다. 중앙일보가 보기에는 ‘사고유발 고위험자’였다.

비슷한 시기, 기자는 한 병사를 잡으러 출동했다. 2006년 8월 경기도 가평에 있는 수도기계화보병사단(맹호부대) 포병대대 소속 이등병이 근무 복귀 도중 선임병에게 총을 쏘고 탈영한 사건이 있었다. 근처 포천에 위치한 우리 부대는 이 이등병을 잡기 위해 포위 작전에 투입됐고, 기자는 실탄을 지급받은 채 대기했다. 이 사건은 이등병의 자살기도로 끝났다.

2005년 경기도 연천 GOP 총기난사 사건 이후 군은 ‘푸른병영’을 만들겠다면서 내무반을 생활관으로 바꾸고, 호칭도 ‘민주적’으로 바꿨다. 그러나 생활은 똑같았다. 여전히 침상은 이등병이 닦았고, 고참은 침상 닦는 속도를 ‘자의적’으로 쟀다. 저녁 점호 시간 <개그콘서트>를 보다 웃으면 한 시간 동안 갈굼을 당하던 관행(?)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원치 않은 입대였지만 ‘나는 잘 적응해야지, 후임에게 잘 해줘야지’라는 생각뿐이었다. 마침 구타와 욕설이 급격하게 줄던 ‘푸른병영’ 시기였다. 그런데 실패했다. 기자는 ‘A급으로 키우고 싶었던’ 후임을 지독하게 괴롭혔다. 몇 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가혹행위를 한 적도 있다. (후에 여러 차례 사과했지만) 결국 부적응자 박 병장은 부적응자 후임을 만들었다.

부적응자를 줄일 근본적인 방법은 사람이 적응하지 못할 제도를 없애는 것뿐이다. 군대와 폭력 문제를 다룬 애니메이션을 만든 연상호 감독은 기자와 통화에서 “수십만 명이 가기를 원치 않는 곳을 만들어두고 강제로 보내는데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했다. “징병제라는 당위성이 군대라는 부적응 장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연상호 감독은 “군대는 일과시간이 끝난 뒤에도 사실상 일과가 이어지는 곳”이라며 “군대라는 ‘일과’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고민을 해결할 시간도 공간도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연 감독이 지적하듯 군대에 있거나 제대군인은 대부분 “기본적인 위계질서가 24시간 내내 이어지는 군대에서 제대할 날까지 참아내는 게 정상”이다.

연상호 감독은 “군대와 징병제라는 폭력을 없애는 게 가장 근본적인 해법”이라고 말했다. 방사포로 무장하고 한국군의 수배에 이르는 특수부대가 있는 저 ‘북괴’ 때문에 모병제는 안 된다? 관심병사는 GOP에 보내지 말고 실탄을 지급하지 말라? 헛소리는 이제 관뒀으면 좋겠다. 그럼 20세 안팎의 멀쩡한 사람들을 부적응자로 만드는 게 정상인가?

‘한국이 군조직을 축소하면 북괴가 바로 내려온다’는 허황된 선동에 놀아나기에 대가가 너무 참혹하다. 임 병장은 왜 군대에 부적응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징병제 군대라는 부적응자 양산 조직을 이대로 두면 안 된다는 게 핵심이다. 부적응자 기자는 또 다른 부적응자를 만들었다. 임 병장에게 총을 들게 한 군대가 계속 부적응자들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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